*앞선 합작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그 날 이후로 팔계와 산옥은 조용히 지냈다. 일행들과 지내며 요괴와 맞서 싸우는 건 같았지만,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일행들도 둘 사이에 무언가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으나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특히 오공은 둘 사이에서 분쟁이 생기는 걸 극도로 꺼려하는 통에, 더욱 입을 다물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둘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기에 자신을 좀 더 들여다 볼 여유가 있었다. 특히 산옥은 그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게 표정에도 고스란히 전해져, 일행들은 표해 왔던 우려를 조금 덜어냈다. 그는 며칠 전보다도 잘 잤고, 잘 웃었다. 원체 곧잘 웃는 이이기는 했지만 팔계와 일이 있은 직후부터 한동안 웃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가 다시 웃기 시작한 것이다.
“커피 맛있어요?”
살갑게 산옥이 삼장에게 말을 걸었다. 삼장은 그런 그를 눈짓하다가 마셔 보겠냐는 듯 잔을 내밀었다. 산옥이 눈을 반짝이다가 한 모금 마셨다. 이윽고 가늘어진 눈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써.”
“그걸 뻔히 다 알면서 맛있냐고 묻긴 왜 묻냐.”
“하지만 법사님이 워낙 맛있게 드시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어디서 내 핑계를 대.”
“악!”
예고 없이 날아온 하리센을 맞고 산옥이 정수리를 문질렀다. 울상을 짓기는 했지만 금방 얼굴이 풀렸다. 그리고 오정을 찾아가 여느 때와 같이 툭탁거리기도 했고, 오공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팔계를 먼저 찾지는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빙긋 웃어주고 일상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 뿐이었다. 팔계도 평상시처럼 그를 대했다. 하지만, 묘하게 자신에게 그어지는 선을 알고 속으로 못마땅해 하는 일이 늘었다. 물론 팔계가 보이는 태도를 못마땅해 하는 이도 있었다.
“어쩔 셈이냐?”
삼장이 묻는 말에 팔계는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다. 산옥은 오정, 오공과 함께 마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분명 오정이나 오공에게도 질 터였지만, 그는 아무래도 좋은 눈치였다. 심각한 얼굴로 패를 들여다보는 양에 팔계가 시선을 주었다. 삼장이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산옥을 보고 있었다.
“알면서 언제까지 외면할 건데.”
“그 이야기는 산옥에게 들었으니 다른 이야기 하는 건 어때요?”
“네 표정은 그런 이야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삼장이 한 말에 팔계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랬다. 산옥이 먼저 그를 찾는 일이 사라지자, 마치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하면 과장일까. 한결같이 자신에게 애정을 쏟던 이가 돌아보지 않는 건 예상보다 더 냉혹한 일이었다.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옥은 여전히 마작에 몰두했고, 결국 크게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아아, 망했어! 이게 뭐야!”
“아싸, 또 졌다. 야, 이리 와.”
“너 진짜 세게 때리기만 해 봐. 죽여 버릴 거야.”
“힉, 산옥. 아까 팔뚝 맞은 데 빨개졌어!”
“오공 씨. 제발 복수해 주세요. 저 망할 새끼를 그냥.”
아까도 졌는지 팔뚝에 붉은 기운이 머무른 산옥이었다. 고통 때문에 울먹이긴 했지만 그것보다 복수심이 더 컸다. 오공의 힘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이겨서 오정을 한 대 쥐어박는 게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앞선 일은 자신이 받을 벌칙이었다. 산옥이 긴장감에 굳어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팔계가 입을 열었다.
“산옥.”
“네?”
“이따 먹을 전골 재료 좀 사다 주지 않을래요?”
“네? 네!”
“야, 지금 타이밍이.”
“밥 먹을 시간이지! 산옥, 나랑 같이 갈래?”
“그럴까요?”
“내 이야기 안 듣냐!”
오정이 외마디로 내질렀으나 응하는 이들은 없었다. 작은 장바구니를 챙겨 든 산옥이 오공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그들을 보던 오정이 팩 하고 팔계를 보았다.
“하나만 해.”
“알아요. 아는데, 그냥. 이렇게라도 해야 저 이가 나를 보잖아.”
“가지가지 한다.”
지탄받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잔상을 실재로 만들어내기 위해 식음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고, 산옥이 먼저 말했듯 잔인하게 자신을 향한 마음을 희롱하는, 지극히 대립되는 행동을 했음에도 그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믿었다. 적어도 자신한테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산옥은 지친 모양이었다. 봐 주지 않는 상대를 위해 애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래. 그게 옳지. 다칠 바에는 주지 않는 편이 맞지. 알지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산옥이 제게 근래 보여주는 태도였다.
한편 산옥은 팔계가 시킨 대로 오공과 함께 장을 보러 갔다. 오공은 산옥을 따라 걸으며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산옥이 여유롭게 시장 주변을 걷다 제게 닿는 시선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공 씨.”
“어, 어?”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산옥은 더 묻지 않았다. 오공이 제게 할 말이 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구태여 먼저 묻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게 물음이 돌아옴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지금처럼.
“산옥은 이제 팔계를 사랑하지 않아?”
“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요새 산옥이 먼저 팔계에게 다가가지 않으니까. ‘이제 더 그런 마음을 품지 않는 건가.’ 해서.”
“하긴, 오공 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네요.”
예상한 질문이었기에 산옥은 빙긋 웃었다. 대충 전골 재료를 장바구니에 넣으니 오공이 바구니를 금세 가로챘다. 그가 까르르 웃다 이내 덧붙였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어요.”
“어?”
“하지만 이제는 혼자 매달리고 싶지 않아요. 괜히 몇 번이고 울기가 싫은 거예요. 애닳는 건 좋지만, 혼자 그렇게 있고 싶지 않고요. 저 같이 매력 있는 이를 울게 만들었으니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거라고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말을 마친 산옥이 개운하게 웃고 있어 오공은 저도 모르게 따라 씩 웃었다. ‘산옥이 좋다면 그거로 충분해!’ 라는 말을 던지는 것도 있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산옥은 여유롭게 씻고 침대 위에 누웠다. 오공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 역시 팔계는 신경 쓰지 않는 게 불가능했다. 마작을 할 때도,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팔계가 저를 쳐다보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일부러 그 시선을 외면하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마치 소중히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강에 떠밀려 간 아이처럼 자신을 바라보는데 그냥 그 자리에서 팔계를 붙잡고 싶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제 마음은 변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오공에게 한 말의 일부대로 다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길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결국 그는 눈을 감았다. 잠들면 조금이라도 머릿속이 비워지겠지.
얼마나 잤을까. 갈증이 나 저절로 눈이 떠졌다. 물이라도 마시려 몸을 일으키니 제 옆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다. 단정하고도 익숙하고, 어딘지 조금은 낯선 얼굴이 보였다. 그 주인이 누구인지 물을 것도 없었다. 산옥은 길게 숨을 쉬었다. 손을 뻗어 어깨를 토닥였다. 이름을 부르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야 목구멍이 바짝 말라 언어가 터져 나오지 않는 이 상황이 일어날 리 없었을 터이니. 그는 일어나기를 포기했다. 대신 팔계 옆에 다시 누웠다. 잠든 얼굴을 응시했다. 왜 제게 왔는지 몰라도 며칠 전보다 한결 편안한 기색이어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이 광경은 꿈이 아닐까? 팔계를 너무나 사랑해서, 오랫동안 애닳아 와서 신이 산옥을 가엾어 한 나머지 만들어 준 환상이 아닐까? 손을 뻗어 뺨을 꼬집으려 했다. 그 때였다.
“하지 말아요.”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어느새 팔계는 눈을 뜨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둘의 눈이 맞닿았다. 산옥이 애써 미소 지었다.
“거짓말 같아서요. 정말 팔계 씨가 이 곳에 있는 게 맞나요?”
“응.”
“어째서일까. 내가 가여웠어요?”
팔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산옥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산옥이 먼저 손을 뻗었다. 그는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손은 머리카락을 지나 얼굴 가장자리를 훑어갔다. 거두려던 찰나 온기에 가둬졌다. 불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듣기 좋았다. 산옥이 눈을 감았다. 어떤 마음으로 팔계가 이 곳에 있는지 여전히 몰랐다. 그럼에도 한 가지 명백한 건,
“산옥.”
다정하게 그가 부른 이름이 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