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紅煙>
‘택언, 그것 알아요? 인연인 사람들은 새끼손가락에 붉은 실이 매여 있대요.’
이택언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연인들이 앉아 사랑을 속삭였을 법한 벤치는 볼품없이 부서져 있었고, 무더운 날씨에 지친 몸을 시원하게 식혀 줄 음료를 판매했을 작은 매점의 유리창은 산산이 조각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커다란 호숫가에서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주었을 나무는 불에 타 기둥만 간신히 남아 있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한때는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테지만 이제는 부서지고 깨어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노을이 내려앉은 황량한 폐허 속을 걷는 그의 뒤로 새가 지저귀는 듯한 청량한 목소리가 따라왔다.
‘언젠가 한 번은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과 내 새끼손가락에 매여 있는 붉은 실이요!’
정말로 제가 듣고 있는 목소리인지 착각인지, 이택언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들을 수만 있다면 그게 환청이라 한들 무슨 대수겠는가.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 미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정말로, 그 붉은 실을 찾으러 간 겁니까, 바보. 내가 여기 있는데.”
17년을 뛰어넘어 선물처럼 그의 앞에 갑작스레 나타났던 미엔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사라졌고,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중요했던 단 하나의 의미를 17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키지 못했다. 무너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기에 바스러지려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고 평소처럼 일상을 영위하면서도 이택언은 끊임없이 인맥과 재력을 이용해 그녀의 흔적을 집요하게 좇았다. 그리고 그 결과 알아낸 사실은… 그조차도 사실인지를 의심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001, Code Name Queen, 안드로이드 관련 극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담긴 문서 발견. 구체적인 프로젝트 내용 및 외압 개입 여부 확인된 바 없음. 생사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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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다양한 종류의 쓰레기들이 이택언의 발에 밟혀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부서졌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택언 자신이 이중 삼중으로 신경 써서 보호했던 그녀를 스스로 보호막 밖으로 나가게 만들었던 미끼는 무엇이었는지, 현명한 미엔이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사실 그 모든 것들은 부가적인 이유일 뿐이라는 것을, 굳이 자신의 행적이 노출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자신이 직접 나서는 이유를, 이택언은 새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있습니까, 미엔, 내 고양이.”
그녀가 제 곁에서 웃으며 행복해하는 동안 흘러가는지 느낄 겨를도 없을 만큼 무심하게도 흘러가던 시간이 멈춘 탓이었다. 미엔이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며 그 작은 몸집으로 가득 채우던 공간들이 휑하니 비어 버린 탓이었고, 그녀의 부재를 느끼는 순간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는 탓이었다.
“왜 그래야 했는지 묻지 않을 테니, 돌아와요. 알잖습니까, 내게는 당신이 전부라는 것.”
미엔이 사라진 직후, 그녀가 온 힘을 다해 지탱하고 있던 세계는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곁을 지키는 미엔의 얼굴에는 한 점의 그늘도 보이지 않았기에 이택언조차도 몰랐던, 그녀가 짊어지고 있던 균형의 무게란 실로 무거운 것이었다. 일반인들은 인간의 능력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Evolver들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Evolver들은 그런 일반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들의 Evol을 과시하며 그들을 통제하려 들었다. 미엔을 잃은 ‘화예의 CEO’가 할 수 있는 일은 Evolver들의 능력을 강제로 증폭시키기 위해 암시장에 유통되고 있는 ‘바늘통’을 비밀리에 회수하는 것 정도였다. 혼돈의 그 시대 어디에도, 미엔의 흔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사라졌기에 시작된 카오스였겠지, 쓴웃음을 짓던 이택언의 발에 무언가가 밟혔다.
뚝.
단단한 무언가가 그의 구두 굽에 밟히며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부러지는’ 파열음이었다. 그제야 발걸음을 멈춰 제 발에 밟힌 그것을 살피던 이택언의 표정이 굳었다. 오래되어 군데군데 녹이 슬고 낡은 그것은 익숙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사람의 손가락 모양과도 같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여기저기 찢어지고 더러워진 하얀색의 원피스를 입은 몸통과 팔다리의 일부인 듯 보이는 부서진 부품들이 들어왔다. 기묘하게도 머리 부분만이 보이지 않는 부서진 안드로이드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택언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누르기 위해 작게 심호흡을 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보란 듯 던져 놓은 악의야 이유가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훤했고, 자신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놀아나기에는 한시가 급했다. 그녀가 안전한지 아직은 모르지 않는가.
얼마나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며 폐허 속에서 헤맸을까. 망가져 버린 안드로이드의 부품들을 산처럼 쌓아 놓은 고철 더미 위쪽으로부터 밀려오는 익숙한 향기에 이택언의 눈이 커졌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향기.
“미엔!”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하얀색의 원피스를 입은 채,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허랑한 모습으로 안드로이드의 무덤 위에 멍하니 앉아 있는 여인의 새끼손가락에 묶인 붉은 실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다급하게 제 왼손을 바라본 이택언은 제 손가락에도 어느새 붉은 실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엔, 내 말 들립니까? 미엔!”
‘신기하지 않아요, 택언? 만일 당신이 나를 잃어버린다면 그 붉은 실을 기억해요. 당신이 볼 수만 있다면, 내게로 안내해 주는 유일한 등대가 되어 줄 테니까요.’
빽빽이 쌓여 있는 부품들을 밟고 올라가 비로소 여인의 앞에 선 이택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총기로 반짝이던 주홍빛의 눈동자는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텅 비어 있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더러워진 원피스로도 가릴 수 없었던 가느다란 팔과 다리에는 크고 작은 흉터들이 가득 나 있어 성한 곳이라고는 목과 얼굴뿐이었다.
“…여기 이렇게 앉아 있으면 다칩니다, 미엔.”
“…….”
멍한 눈으로 물끄러미 저를 올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미엔의 앞에 무릎을 꿇은 이택언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다소 가쁜 숨소리, 뼈가 만져질 정도로 말라 버린 작은 몸. 그런데도 그녀는 이택언 자신이 감히 짐작하지도 못할 것들을 이겨내고, 언젠가 지나가듯 그에게 했던 약속대로 필사적으로 살아남아 이택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목구멍으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눌러 삼킨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 늦었군요, 내가. 미안합니다. 이제 돌아가죠.”
“…돌아, 갈 수… 없어요…. 내, 기억… 그들이, 가져, 갔어…. 당신, 위험… 해요….”
숨을 할딱이면서도 필사적으로 저를 밀어내려는 미엔을 힘있게 껴안은 그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그녀의 손을 깍지 끼어 잡고는 조심스레 미엔을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미엔. 나는 위험하지 않아요. 당신도 위험하지 않을 거고. 약속하겠습니다.”
“…….”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떠오른 희미한 두려움을 읽은 이택언은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들고는, 미엔과는 어울리는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는 그 음울하고 낡아빠진 폐허를 뒤로 한 채 돌아섰다. 아무리 추악하고 더러운 세계라고 할지라도 대체할 수 없는 제 유일한 의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지킨 이 세계만이, 그가 줄곧 보아 왔고 앞으로도 보게 될 수많은 시간선 속 그가 길을 잃지 않게 할 유일한 빛이 되어 줄 것이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기진맥진해 잠이 들어 버린 그녀의 귓가에 이택언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바보, 누가 뭐라 하든 내 말만 들어요.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언제나, 내 옆입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