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sick, love pill
나나세 카즈마는 밴드 멤버들과의 대화방에 올라온 공지사항을 보고 손가락을 멈추었다. 페어리 에이프릴의 신곡 녹음 일정이었다. 녹음이라는 단어를 보니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신곡 소식 자체를 기대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앨범에 수록될 음원의 녹음 과정을 구경하고 싶다던 에덴의 직원, 마세 히마와리. 그녀가 스치듯, 하지만 생각이 날 때마다 꾸준히 언급했던 그 말을 용케도 상기한 카즈마는 잠시 고민하다가 연락을 넣었다. ‘다음 주 수요일에 녹음하러 갈 건데 궁금하면 오든가.’ 답장이 돌아온 건 문자를 보내고 3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 * *
“약속대로 구경하러 왔다!”
“오, 마셋치 어서 와~! 아사히 녹음은 시작도 안 했는데 빨리 왔구만.”
“그보다 아직 준비도 덜 끝났지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던 미사토가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일일 견학생을 맞아주었다. 널브러진 앰프 선과 기타의 피크, 분리되어 굴러다니는 크고 작은 드럼 때문에 앉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반주 녹음이 끝나는 대로 부르겠다더니 과연 방금 막 끝난 모양이다. 라이브 하우스의 직원답게 능숙한 손길로 선을 정리하기 시작한 히마와리가 주변을 둘러본다.
“아사히랑 나나카즈는?”
“아사히는 가이드 녹음된 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들어보는 중이고, 카즈맛치는…… 어디 갔더라. 화장실인가?”
가벼운 어투로 어깨를 으쓱하는 요시무네의 말에도 그런가~ 하고 수긍하더니 이내 갸우뚱 기울어지는 황혼빛 정수리. 가이드…… 가이드가 정확히 뭐지,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노래는 아사히가 부르지만 작곡은 나나카즈가 하니까…….
“가이드라는 거, 아사히한테 어떤 느낌으로 불러야 하는지 알려주려고 미리 녹음해두는 노래……인가? 맞아?”
“응, 맞아. 보통은 카즈마 군이 불러.”
「빗소리 발렌타인」은 요시무네가 쓴 곡이라서 요시무네가 불렀지만. 미사토와 함께 옆을 바라보자 이름이 불린 탓인지 이쪽을 바라보는 요시무네와 눈이 마주쳤다. 후련하게 웃어 보이는 그 얼굴에 수고했다는 미소로 화답한다. 그나저나 나나카즈가 노래라……. 「blue moon」 외의 곡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그때도 엄청 민망해하더니 잘만 불렀지. 예상외의 상냥한 톤으로 노래하던 카즈마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히마와리의 눈가에도 은은한 녹색이 돈다.
……어라, 잠깐만. 보통은 나나카즈가 부른다고 했지. 그럼 혹시 그 곡도 부른 적 있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을 떠올린 붉은 눈이 크게 출렁인다. 그 표면에 즐거움이 가득한 것은, 카즈마의 입장에서는 제 치부와 관련된 곡이라 언급만으로도 꽤 격렬한 반응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뭐야, 빨리 왔네.”
“마침 잘 왔다, 나나카즈! 방금 막 물어볼 거 생겼는데.”
“……뭔데, 그런 수상한 표정으로.”
카즈마는 히마와리가 슬쩍 장난을 걸어오는 순간의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덴의 수많은 밴드맨들 중에 유독 저를 자주 건드리는 탓이었다. 어느 날은 자신이 만만하느냐고 물었는데,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반응이 재미있어서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느 쪽이든 그다지 마음에 드는 취급은 아니었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얕보이고 싶은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생수병 뚜껑을 열 때의 까득 소리를 한숨 대신 흘려보낸 손가락에는 미세하게 기타의 현 자국이 남아 있다.
“페어에프의 곡은 대부분 나나카즈가 가이드 보컬을 맡는다며.”
“그렇지, 대부분의 곡을 내가 쓰니까.”
“그럼 「secret lovesick」도 불러봤어?”
푸웁. 물을 한 모금 머금자마자 귓가를 파고든 이름에 카즈마는 입안의 내용물을 힘차게 내뱉고 말았다. 으악, 뭐야 이 물벼락! 근처에 있던 요시무네만 쫄딱 젖은 생쥐꼴이다. 불쌍하게도. 물벼락의 원흉인 히마와리는 안쓰럽다는 눈으로 요시무네를 위로했다.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궁금하잖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고.”
“불렀다고 하면 어쩔 건데!”
“당연히, 들어보고 싶어!”
“들려주겠냐!!”
카즈마의 목소리에 실리는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간다. 자연스레 떠오른 치부에 의한 민망함이 반, 단테한테 물이 든 탓인지 짓궂은 장난을 진담처럼 던지는 히마와리를 향한 노여움이 반이었다. 그 노여움이라는 것도 고달픈 짝사랑에 허물어지고 말지만. 아니, 허물어지는 게 아니라 견고해진다고 해야 하나. 그저 그 방향이 히마와리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날을 세운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니까.
「secret lovesick」는 나나세 카즈마 본인의 짝사랑을 소재로 한 곡이다. 히마와리를 좋아하기 전의 이야기. 하지만 그 상대는 동성이었고, 철저하게 그가 이성일 것이라고 믿은 카즈마의 짧은 짝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랬는데 또 이 꼴이다. 이번에는 이미 연인이 있는 상대를 열심히 좇고 말았다. 어쩜 이렇게 가망 없는 마음만 품는지. 스스로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하물며 그 두 번째 짝사랑 상대는 페어에프의 곡 중에 하필 「secret lovesick」를 가장 좋아해서. 좋아하는 만큼 자주 언급해서 흑역사로 치부하는 첫 번째를 다시금 떠오르게 한다. 첫 번째만큼이나 부질없는 마음이리고, 두 번째의 마음에 난도질을 한다. ……자신을 두 번째로 품었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히마와리는, 그 곡을 언급할 때마다 보이는 반응을 그저 첫 번째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기야, 이 편련을 들키는 것보다는 나은 오해였다. 하지만…….
“……너한테만큼은 절대로 안 들려줄 거니까.”
“아, 거참. 치사하시네요.”
“시끄러워. ……아사히는 언제 나오는 거야.”
확 끓어올랐다가 또 확 가라앉은 텐션으로 녹음실 근처의 문을 바라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금방 나올 모양이었다. 카즈마는 기타 코드를 잡았던 왼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준비 끝났어! ……어라, 분위기가 왜 이래?”
“카즈맛치가 물대포를 쏴서 그래.”
“나나카즈, 꼬부기였구나…….”
“누가 포켓몬이야!”
방금까지의 축 처진 분위기가 다시금 소란해진다. 작은 장난에 일일이 반응하는 본인 탓이라는 자각이 카즈마에게는 없는 듯했다. 이래서 놀려먹기 재밌다는 건데. 히마와리가 은은한 웃음을 지으며 소리 없이 뻐끔거린다. 그리고는 포기라는 걸 모른다는 듯 재차 카즈마의 가이드 보컬에 대해 생각했다. 그 파일은 아마 아사히만 들어봤겠지? 애초에 가이드가 필요한 건 보컬뿐이니까.
“아사히, 나나카즈가 부른 「secret lovesick」는 어떤 느낌이었어?”
“마세, 너 아까부터 자꾸……!”
“감상을 묻는 거잖아. 어차피 파일도 없을 거고.”
버럭거리는 카즈마를 어설픈 변명으로 달래는데, 어쩐지 아사히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방금 한 말의 어떤 부분 때문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히마와리가 결국 입을 열었다.
“아사히, 왜 그래? 대답하기 힘들면 안 해도……”
“어, 그게 사실…… 휴대폰을 뒤져보면…… 남아 있을지도…….”
“……? 뭐가?”
“……카즈마 군의 가이드 녹음 메시지.”
그것도 여태까지 보내준 거 전부. 우물쭈물 말을 마친 아사히의 눈에 경악한 표정의 카즈마와 잘됐다! 싶은 표정의 히마와리가 동시에 들어왔다. 엄청난 기세로 달려들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혹시 말실수라도 한 걸까 싶어 고개를 돌리면, 곤란한 표정의 미사토와 가까스로 웃음을 삼키는 표정의 요시무네가 보였다. 그래서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나는 무슨 대답을 했어야 해?? 극과 극의 반응을 마주한 아사히의 눈이 혼란스럽게 진동한다.
“아사히, 휴대폰 좀 잠깐—”
“아사히! 그거 전부 지워, 당장!”
히마와리와 카즈마의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이쯤 되면 두 사람 모두 오기의 영역에 발을 걸친 꼴이다.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꺾어가며 낄낄대기 시작한 요시무네를 뒤로하고, 아사히는 유일하게 침착함을 유지하는 미사토에게 다가간다. 미사토오오……. 떨리는 목소리로 다가온 아사히를 듬직하게 안아주는 미사토의 손길이 따듯하다. 괜찮아, 아사히. 괜찮으니까…….
“진짜 잠깐이면 되니까 휴대폰 좀 빌려주라, 아사히~.”
“절대 빌려주지 마! 그리고 메시지는 지워, 제발 부탁이니까!”
“아하하학—, 뭐야 이거?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궁극의 선택을 앞둔 아들?”
“정말, 요시무네! 그만 좀 웃어!”
“마세 씨랑 카즈마 군은 우리 부모님도 아닌데…….”
……난장판이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카즈마는 직감한다. 지금 결판을 내지 못하면 언젠가 반드시 히마와리가 「secret lovesick」 가이드 녹음 파일을 청취하고 말 것임을. 다행히 그는 잦은 마찰과 화해로 아사히에 대한 이해도가 제법 쌓여 있었다. 가령,
“……아사히! 휴대폰 메시지나 전자 메일 보관함을 수시로 비워주면 데이터를 관리하는 데에 드는 전기가 줄어서 지구온난화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어.”
이런 말을 들으면 착해빠진데다 동물을 사랑하는 아사히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카즈마는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예상대로, 여전히 상황 파악은 덜 된 것 같지만 눈빛이 살아난 아사히가 미사토의 등 뒤에서 꼼질거리는 게 보인다. 분명 극지방의 동물 친구들을 위해 메시지 함을 비우고 있는 것일 테다.
“아, 아사히의 착한 마음씨를 이용해먹다니……!”
“하아…… 이걸로 됐나.”
마치 큰 싸움을 끝낸 것만 같은 한숨과 함께, 카즈마는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보컬 녹음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는데 녹음실 이용 가능 시간은 30분 가량 흘러 있었다.
* * *
“하여간, 마세 그 녀석…….”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는 하마터면 제때 마무리하지 못 할 뻔했다. 다행히 신곡 녹음은 예약 시간이 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끝이 났다. 작업해야 할 건 아직 남았지만 뭐, 외부 시설을 빌려야 하는 단계는 대강 다 마쳤으니 그걸로 됐다.
……히마와리는 아사히가 녹음 부스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는지 허둥거리며 사과했다. 자기도 모르게 오기가 생겨서 그랬다나 뭐라나. 굳이 승패를 따지자면 완패한 것이나 다름없어서인지, 묘하게 섭섭해하는 표정으로 예약한 시간 내에 녹음을 끝내지 못하면 추가 예약을 잡아두겠다고까지 했지만 결국 그럴 일은 없었다. 히마와리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에덴에서 박봉으로 일하는 주제에. 책임을 지겠답시고 식비까지 갖다 바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이지 대책 없는 녀석, 카즈마는 무모한 소리를 진지하게 내뱉던 히마와리의 눈을 떠올리고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뭐라고, 가이드 녹음 따위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어차피 파일도 없을 거고.’
“그러고 보니 노트북에는 남아 있을 텐데…….”
작업한 음원 폴더를 몇 번이고 달칵거리던 카즈마의 눈앞에 수십 개의 노래 파일이 떠올랐다. 개중에는 히마와리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제목도 껴 있었다. 「secret lovesick」. 뒤에 가제라는 말이 붙은 파일명을 빤히 바라보던 카즈마가 다시금 어이없는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 곡은 아사히가 부르는 걸로 만족하라고.”
모처럼 다음 라이브의 세트리스트에는 넣어놨으니까. 한동안 공연에 올리는 것조차 피해왔지만 팬들의 간곡한 의견도 있고, 언제까지 외면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트리스트를 받아들면 또 언제 서운해했냐는 듯 활짝 웃어 보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부질없는 것이라 해도 결국은 제가 놓지 않은 마음이다. 포기하지 못한 마음이었다. 대체 어떤 구석이 그렇게 좋아서 눈으로 좇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런 자신이 마냥 원망스럽지만은 않다. 난도질당한 자리가 아물 적에는 참을 수 없이 간지러운 감각이 스치고 지나가지 않던가. 그 느낌이 싫지 않아서, 카즈마는 근질거리는 가슴 한 켠에 두 번째 반창고를 비뚤게 붙이며 미소 지었다. 당사자의 앞이 아니라면 이다지도 담담하게 드러낼 수 있는 연정이었다.
—이토록 애처롭게 흔들리는 고동에도
네 마음에는 닿지 못해—
익숙한 후렴구를 흥얼거리며, 하루치의 작업을 마친 손으로 노트북을 덮었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웠음에도 어디선가 반주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사랑에 빠진 순간의 심장 박동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드럼 소리와 후렴구를 보다 풍성하게 채워 넣는 베이스 소리. 자신이 퉁기는 기타 소리에 맞춰 몇 번이고 고쳐 쓰길 반복한 가사를 읊조리다가 눈을 감는다. 꿈결에는 부디 그 곡이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