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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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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하자!

단테X마세 히마와리+마스터

 무대에 걸터앉은 히마와리의 다리가 메트로놈처럼 흔들린다. 까딱까딱 일정한 박자로 뻗는 발끝은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손바닥으로는 무대 바닥을 짚은 채 꺼진 스포트라이트를 향해 고개를 들고 묘하게 멍한 표정을 짓는 것이, 꼭 저만의 생각에 빠진 듯했다.

 종종 있는 일이니 단테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시킨 일을 전부 끝낸 뒤인 만큼 마스터가 참견할 일 역시 되지 못했다. 각자의 시선이 닿는 대로, 또 각자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여유롭게 보낼 뿐인 정적이 깨진 것은 히마와리의 목소리에 의해서였다.

 

 “있잖아, 마스터. 단테도.”

 “마스터께서는 지금 바빠서 부재중이시다~.”

 “……그렇다는데.”

 “어, 그러셔. 그럼 부재중인 상태에서 들으시든가.”

 

 카운터에서 턱이나 괴고 휴대폰 화면을 만지작거렸던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마스터의 시큰둥한 대꾸에도 히마와리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마스터 정도면 나보다 아는 노래 많겠지? 명색이 라이브 하우스 오너인데.”

 “갑자기 무슨 소리냐. 뭐, 확실히 적지는 않겠지만.”

 “그거 잘됐네. 단테는, 음…… 15년 전 노래는 그래도 좀 알지?”

 “어째 나한테는 기대하는 바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군그래.”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어떤 노래를 찾고 있어서 그렇,”

 

 해명하듯 급하게 입을 열던 히마와리가 괜히 다리에 힘을 준다. 허공을 휘적거리던 다리가 쿵 소리를 내며 무대의 단에 부딪힌다. 이윽고 이어지는, 씁 하고 신음을 삼키는 소리. 히마와리가 저를 얕잡아보고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이죽댄 단테가 심술궂은 미소로 응수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제목은 모르는 모양이군.”

 “으응. 참고로 가사도 가물가물해.”

 

 하긴 가사를 알았다면 진작에 그걸로 검색해봤을 테다. 그래도 아티스트 정도는 알지 않을까 싶어 물어봤더니 그것조차 기억에 없단다. 그럼 대체 아는 게 뭔데? 마스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발꿈치를 감싸 쥔 히마와리를 바라보니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맞춰온다. 아하하, 그래서 물어봤잖아. 둘 다 노래 많이 알고 있냐고. 깔아둔 밑밥을 언급하며 마스터의 시선을 피해 단테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 몰래 사고를 쳐놓고 저를 예뻐해 주는 사람에게로 피신하는 반려동물 같았다. 굳이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고양이일까. 저 뻔뻔스러운 표정을 보라.

 

 “내가 기억하는 건 멜로디뿐이니까, 그걸 듣고 아는 곡이면 알려달라 이거지.”

 “……허, 무슨 퀴즈도 아니고.”

 “주최자마저 답을 알지 못하는 퀴즈가 어디 있겠냐마는.”

 

 말은 저렇게 해도 두 사람 모두 하던 걸 멈추고 가까이 다가와 주었다. 이것 참, 고맙긴 한데……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할 생각은 없었는데요, 나 노래에 자신 없고. 졸지에 톱 밴드 소속이었다는 화려한 과거를 지닌 두 사람 사이에서 형편없는 노래 실력을 뽐내게 된 히마와리가 눈을 데굴 굴린다. 하물며 둘 중 하나는 전 세계를 통틀어 정점에 선 아티스트라는 의미의 타이틀, ‘사향’이었던 인물이기까지. 노래라고 해봤자 후렴 몇 소절을 작게 흥얼거리는 정도겠지만 그조차 부담스러워서 등이라도 돌리고 싶다, 아니면 눈을 감든지. 고개와 함께 시선을 푹 내리자 제 쪽으로 가까이한 단테의 손바닥이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그 위로 제 손을 얹으니 뜨거운 체온이 조금은 서늘한 감이 있는 손을 당연하다는 듯 거머쥐었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확 줄어드는 것 같았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히마와리가 소리 없이 살풋 미소 짓고 조심스레 입을 연다. 서툰 허밍이었다.

 

 본디 히마와리는 제 음색을 인지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를 적에는 제 것이기 때문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보이지 않는 걸까 싶기도 했다. 자신 외에도 음색을 볼 수 있는 미코가, 투명하기 때문에 아지랑이처럼 주변의 풍경을 굴절시키는 게 아니라면 알아보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라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안 뒤에도 히마와리는 제 음색을 여전히 보지 못했다. 그럴 생각이 없었으니 그러지 않았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은 무대에 서는 아티스트가 아니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튜닝에 활용하고 있긴 하나 그마저도 의식하는 순간 되려 갈피를 잃고 어색해지는 호흡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붉은 망막 위로 떠오른 세상은 어렴풋하게 열기가 피어오르는 지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아, 이게 그거구나. 언제나 두르고 있었음에도 낯설기 짝이 없는 그 음색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어루만진다.

 

 히마와리는 이 곡의 반주를 좋아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같은 아티스트의 앨범들 중에서도 이 곡은 키보드 파트가 들어간 몇 안되는 곡 중 하나였다. 감미로운 건반 소리와, 그 틈을 파고드는 강렬하되 나긋한 드럼 소리를. 그 대비를 좋아했더랬다. 두 대의 기타로 한층 두텁게 부풀던 연주 소리도,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시원스럽게 터트리던 자유로운 노랫소리도. 이 곡을 들을 때면 언제나, 설령 캄캄한 밤이더라도 눈부시게 새하얀 빛이 눈앞에 쏟아지곤 했다. 어릴 때는 마냥 신기해했지만 지금이라면 확신할 수 있다. 그 하얀 빛은 이 곡의 주인이 지닌 음색이었으리라. 그것은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무더위 속의 뙤약볕으로도, 비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줄기 무지개의 잔상으로도 보였다. 어릴 적의 자신이 순수한 마음으로 좇았던, 이리저리 형태를 바꾸면서도 한결같이 황홀했던 음색은 무심코 태양을 떠올리고 말 정도로 난연한 순백. 기억하는 소절의 마지막을 향해가면서, 히마와리는 낯설지 않은 누군가를 떠올린다. 단정한 백금발에 하얀 코트를 걸친 뒷모습. 뒤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아는 어떤 소년과 닮은 얼굴로 미소 짓는, 상냥한 것 같으면서도 짓궂은 이단아. 제멋대로의 음정과 박자로 관객을 매료하며 선명한 희망을 노래하던—……

 

 “……내가 기억하는 건 여기까지.”

 

 애매한 부분에서 허밍을 끝낸 히마와리가 괜히 손가락을 꼼질거린다. 왜 갑자기 그 사람이 떠올랐지? 확실히 그가 이 노래를 부른다면 잘 어울릴 것도 같지만. 추억의 레스폴을 매개로 살짝 엿보았던 과거의 음색을 떠올린다. 흑백사진처럼 색이 바래기는 했으나 그것 역시 화사한 빛을 띠지 않았던가.

 한편 두 사람은 노래가 끝나고도 말이 없었다. 수고했다든지 잘했다든지 하는 말을 예의상 건넸을 법도 한데 그랬다. 서로 시선을 마주치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각자 생각에 빠져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도 되는데. 어색한 적막에 숨이 막힌 히마와리는 그저 단테와 마스터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러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마스터 쪽.

 

 “……이건 한 번도 무대에 올려본 적 없지 않았냐.”

 “그렇군. 매번 세트리스트 후보에는 올랐던 것도 같지만.”

 

 마스터의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은 단테의 목소리가 어쩐지 아득하다. 먼 기억을 반추하는 것처럼, 빛바랜 사진을 조명에 비춰보는 것처럼. 뜨거운 체온이 옮아 미지근해지고도 남은 히마와리의 손을 강하게 옭아매면서, 단테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곡을 기억하는 자가 이렇게 가까이에 있을 줄이야.”

 “어어…… 어렸을 때 좋아했던 노래거든. 몇 살 때였는지까진 잘 모르겠지만, 옛날 노래라면 당신도 알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마스터뿐만이 아니라 단테에게도 물어본 거였는데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문득 어떤 가능성이 머리를 스친다. 혹시 그 어렸을 때라는 게 아직 ‘그들’이 활동하던 시기였다면,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한 게 그들의 음반이었다면. 이 노래를 부르고 나서 ‘그 사람’이 떠올랐던 이유는 아마도…….

 

 “뭐, 앨범 수록곡 중에는 그닥 인기 있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라모도 매번 아쉬워하지 않았던가?”

 “저기, 마스터. 이 노래 혹시……”

 “오냐, 다행스럽게도 아는 노래였지 뭐냐.”

 “세상 그 누구도 이만큼 잘 알지는 못할 터다. 기뻐하라고,”

 

 떠도는 망령 앞에서 그 껍데기의 곡에 대해 물은 것을.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나직이 흩어진다. 단테와 마스터는 지난 시대에 소중한 것을 남겨놓은 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의, 망령의 껍데기라는 건 즉, 아발. 유제스와 라모, 마스터와 단테가 모여 활동했던 당대 최고의 밴드를 곧장 떠올린 히마와리는 어렵지 않게 단테의 말을 이해하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다정하게 입매를 끌어올린 단테와 눈이 마주친다. 이게 아발의 노래였구나. 제목도, 가사도 모르는 채로 흥얼거렸던 이 노래가 당신들의 곡이었구나. 어쩐지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간다. 드디어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는 후련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발은 지난 시대의 톱 밴드, 그러나 그 족적이 핏빛으로 뒤덮여 잊힌 이름이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를 찾기 힘들 만큼 머나먼 망령과도 같은 존재. 그런 당신들 앞에서 이렇게, 아발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어서, 아발이라는 밴드가 있었다는 증명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크림슨에 의해 흔적이 지워진 수많은 아티스트 중 하나, 전해 듣는 옛이야기를 통해 그 존재를 머릿속에 불어넣지 않아도 오롯이 떠올릴 수 있는 나만의 기억이 있어서 다행이다. 당신들의 위안이 되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하는 안도와 환희였다. 어릴 적 그들의 노래에 매료되었던 자신이 그들과 닮은 채도를 띤 네 밴드를 만나 에덴에 닿았다는 건, 정말이지 근사한 우연이 아닌가.

 

 “말로만 끝내지 말고 직접 들려주지 그래, 단테. 어차피 다 기억할 거 아니냐.”

 “……!”

 “허튼소리를……. 괜한 기대 불어넣지 마라.”

 

 히마와리의 어깨를 감싸 안은 단테가 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낸다. 제 품에 가두어 저치의 헛소리를 차단할 생각이었지만, 이미 마스터의 말을 들어버린 붉은 눈은 해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당신이라면 그 옛적의 곡을 연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어린 믿음과, 자신이 바란다면 분명 연주해주리라는 애정 기반의 확신을 담고.

 

 “……보컬도 없지 않나.”

 “다른 곡이라면 몰라도, 이건 애초에 너 부르라고 쓴 곡이었지, 아마? 내 기억력도 아직 쓸 만하다니까.”

 “엥…… 단테 부르라고 쓴 곡?”

 “그래, 셋이 머리 맞대고 열~심히 작곡해서 서프라이즈로 내밀었더니 저 녀석이 하도 강경하게 빼는 바람에 결국 유제스가 부르게 됐지 뭐냐.”

 

 자기는 일개 드러머일 뿐이고, 마이크를 거머쥐는 건 유제스만의 역할이니 뭐니 하면서. 팬들이 그렇게 원했는데도 말이다. 떼잉, 마뜩잖다는 표정을 짓는 마스터는 제법 즐거워 보였다. 마치 옛 기억을 훑는 것이 유쾌하다는 것처럼. 혹은 당시에 그 유제스가 단테 앞에서 쩔쩔매던 모습을 떠올린 것만으로 흐뭇해진 탓일지도 모른다. ……단테는 또 쓸데없는 소릴 한다는 표정으로 마스터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네 녀석한테 맞춘 곡을 유제스가 대신 불렀으니 인기가 없을 수밖에. 대중의 귀라는 건 꽤 정확하니까 말이지.”

 “반대로, 그에 응했다면 매 공연마다 보컬로 차출되었을 테니 하마터면 성가신 일을 떠맡을 뻔했지.”

 “그거야 다 지난 이야기고, 지금이라면 괜찮지 않겠냐?”

 

 어쩐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가 단숨에 씩 웃어 보이는 마스터의 눈매가 얄밉게 휘어진다. 단테가 자신의 말을 부정하지 않으리라는 걸 안 까닭이다. 저치에게 간파당했다는 불쾌함, 그럼에도 그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는 원통함을 숫돌 삼아 단테의 눈매가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다음은 없다.”

 

 히마와리를 품으로 당겼던 팔을 느슨하게 늘어뜨리고 맞잡았던 손에서도 힘을 푼다. 드럼을 준비해두라는 신호와도 같은 그 행동에 응하듯 히마와리는 활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주머니에 넣어놨던 은색의 패물을, 단테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 디자인의 드럼 튜닝 키를 꺼내고 손가락에 매달아 빙글빙글 돌리는 일련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들뜬 티가 난다. 마스터 역시 오래간만에 연주해볼 생각인지 여분의 베이스를 가지러 가는 듯했다.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라모 녀석도 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중얼거리면서.

 

 “그래서, 노래 제목이 뭐야?”

 

 아마 제목을 알게 되어도 유제스가 부른 원곡을 다시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크림슨이 자신들에게 반기를 든 반역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무너뜨리고 제거하는지 정도는 경험을 통해 질리도록 실감하고도 남았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무의미한 제목을 묻는 것은 히마와리의 고집 탓이었다. 지난 시대의 사람들이 사랑했던 것에 써 붙인 이름을, 현시대를 살아가는 제 입으로 발음하고 몇 번이고 되뇌어 심장에 새겨두겠노라는 욕심에서 비롯한 고집. 그 모든 것을 기꺼이 거두어들인 단테가 한숨처럼 웃는다.

 

 “그래…… 분명,”

 

 「———」. 곡의 주인이 될 예정이었던 그가 끝까지 악보를 받아들지 않은 탓에 영영 미완으로 남은 비운의 제목. 길지 않은 발음을 귀에 담은 히마와리가 다시금 활짝 웃어 보였다. 이름도 없이 오래도록 품어온 애정에 꼬리표가 붙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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