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케님 커미션
옛날, 옛날 아주 먼- 아니, 아주 멀진 않지만 아무튼 옛날, 숲속의 작은 왕국, 니베이아에서는 어여쁜 공주님이 태어났어요. 가을날 나무에 열린 아주 밝은 오렌지를 닮은 머리칼과 그 오렌지를 따서 눈에 넣어 만든 빛에 밝은 금빛이 섞인 보석 같은 눈동자를 가진 공주님에게 가족들은 꿈과 환상이라는 뜻을 가진 아실링이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답니다. 어여쁜 공주님은 시간이 무색하게도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이거 봐!! 아실링이 만들었어!”
이름 모를 노란 꽃, 빨간 꽃, 주황 꽃, 하얀 꽃들로 얼기설기 얽은 어설퍼 보이는 화관은 하나씩 세 오빠와 왕과 왕비의 머리에 하나씩 씌워졌고 화관을 쓴 가족들은 모두 해맑게 웃었어요. 온갖 보석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왕관보다도 어린 공주님이 만든 화관이 훨씬 빛났으니까요. 다섯 가족들은 언제나 화목했고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질 못했어요. 연이은 출산과 넘치는 내궁의 업무를 견디지 못한 왕비는 결국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죠. 아직은 어린 공주님도, 나이가 지긋한 왕도 그리고 세 왕자님들도 극진히 왕비를 간호했지만 결국 왕비는 앓기 시작한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성을 비롯한 백성들은 비탄의 슬픔에 빠졌고 찬란하게 피었던 그들의 행복의 꽃들도 모두 시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온 왕국이 슬픔에 빠져 지낸지 3년 쯤 지났을까요?
이렇게 슬픔에만 빠져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왕은 저가 젊은 시절 왕자일 때 만나던 한 여자를 데려와 왕비로 앉혔습니다. 그의 슬하엔 이미 장성한 아들이 있었고 왕비가 된 여자는 이 아들이 어린 시절 연애하던 적에 가진 아이라며 정통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답니다. 이는 곧 왕가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어요. 세력다툼에 휘말린 세 왕자님들은 더 이상 공주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어요. 그저 공주님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그의 방 앞에 보초를 잔뜩 세워 생활을 압박할 뿐이었죠. 분홍색과 주황색 온갖 어여쁜 색으로 휘둘러진 방에서 공주님은 점점 말라갈 뿐이었습니다. 공주님이 방에서 가장 많이 한 일은 유모가 이따금씩 가져다주는 잡지와 바느질 도구로 자수를 놓고 재봉을 배운다던가 거울을 보며 예쁘디 예쁜 자신을 가꾸는 일이었죠. 그러던 어느날 거울에는 자신이 아닌 웬 오렌지색의 단발머리를 가진 예쁜 아가씨가 비춰지기 시작했어요.
“너, 너는 뭐야?”
“나는 나미! 네가 그려낸 환상이지!”
“그, 그게 가능해??”
“불가능 할 게 뭐야? 우리 공주님의 환상인데.”
아실링과 닮은 듯 닮지 않은 소녀, 나미는 얇은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어요. 그렇게 놀라는 것도 잠시, 외롭던 우리 공주님은 거울 속의 아가씨와 좋은 친구가 되었죠. 어쩐지 거울 속의 아가씨는 그동안 잡지에서만 보던 바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바다는 아주 무서워. 잔잔한 듯 하다가도 어느새 돌변하여 이빨을 드러내지. 하지만 이것이 바다의 묘미. 이렇게 자유로운 것이 바다야.”
“우와... 나도 언젠간 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
“으음.. 그건 모르지. 아실링, 넌 꿈이 뭐야?”
꿈.... 그것은 아실링이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무언가였어요. 어릴 때는 그저 그 행복이 계속될 줄 알았고 지금은 그저 답답한 이 생활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으니까요.
“몰라. 꿈... 그게 뭔데?”
“음... 아실링. 넌 뭘할 때 가장 즐거워?”
“음.. 이렇게 너랑 이야기하고, 또 바다에 대해 떠올리고.. 그리고... 바느질! 바느질하면서 처음엔 무언지 모를 점 하나가 아름다운 꽃이 되어갈 때!!! 제일 좋아!!”
“그래. 그거면 돼. 네가 좋아하는 것을 구애받지않고 계속 이어나가는 것. 그게 바로 꿈이야. 그리고 그걸 계속 키워 나가는 거지.”
“좋아! 아실링은 꼭 여기를 벗어나서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될거야!”
“그거 좋은 꿈인걸-? 그럼 난 네가 만들어주는 옷을 입을 수 있겠네?”
“응!! 아실링이 만든 옷을 입을 영광을 줄게!!”
“풉.. 좋아.”
두 소녀는 꺄르르 웃으며 바다에 대한 이야기와 그리고 꿈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죠. 하지만 아무도 없는 방에서 거울을 보고 혼자 웃으며 떠드는 공주님은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저 작은 방안에서 메말라가는 미친 사람일 뿐이었어요.
때마침 왕자님들은 드디어 세력다툼을 끝냈고 첫째 왕자님이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를 축하하는 무도회가 열렸어요. 우리의 공주님은 오빠들의 맘에 들도록 예쁘게 예쁘게 마치 제 방에 장식해놓은 공주인형처럼 레이스가 가득 달리고 코르셋을 꽉 조인 분홍색의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로 불려나갔습니다. 공주님은 생각했어요.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세력다툼이 끝났으니 자신은 바다로 나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왕자님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 공주가 미쳐서 가치를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큰 나라로 시집보내서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자고... 옆 제국엔 공주님과 약 서른살 정도 차이 나는 황제가 있었고 이 황제에게 공주님을 첩으로 보내 자신들의 뒷배를 챙길 생각이었습니다.
황제는 무도회에 나와 아실링에게 춤을 청했고 아실링은 벗겨진 머리에 쭈글쭈글한 주름, 표독스럽게 올라간 눈과 퉁퉁 불어있는 입술을 가진 황제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자신의 나라보다 훨씬 큰 나라의 황제가 춤을 청하는데.. 공주님은 억지로 웃는 얼굴로 무도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시녀가 끌러준 코르셋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습니다.
“기분 나빠!!!!”
“왜 그래, 아실링?”
“옆 나라의 황제 말이야!! 다 늙은 쭈그렁탱이가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막 더듬고!!! 악!!”
황제의 끈적하고 냄새나는 손길을 떠올린 공주님은 소름끼친다는 듯 부르르 떨면서 몸서리쳤어요. 거울 속의 아가씨는 손을 뻗어 공주님을 어루만지듯 거울을 어루만졌죠. 마치 엄마가 아이를 달래주듯 말이에요.
“무례하네. 우리 공주님을 함부로 더듬고 말이야.”
“나 이런 일 더는 못참아! 내일 꼭 말할거야!!! 내일은 꼭 바다로 나간다고 말할거야!”
“아실링. 바다는 자유롭지만 위험해. 괜찮겠어?”
거울 속의 아가씨는 짐짓 겁을 주듯 눈을 가늘게 뜨고 눈썹을 찌푸려 무서운 표정을 지었어요. 하지만 그런 것에 겁먹을 공주님이 아니죠. 공주님은 몇 겹을 껴입은지 모르겠는 무거운 겉치마와 속치마를 모두 벗어던지며 소리쳤어요!
“괜찮아!! 바다는 넓어, 언젠가 나도 동료를 만날 수 있을거야!”
“그래. 바로 그거야, 아실링.”
두 소녀는 서로를 마주보며 꺄르르 웃었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다음날. 역시 공주님은 오빠들의 맘에 들도록 아름다운 레이스가 달린 속치마를 겹겹이 겹쳐입고 하늘하늘 날리는 드레스 차림으로 왕정에 섰습니다!
“오빠들 나...!”
“아실링, 너에게 혼처가 들어왔다.”
공주님이 입을 떼려는 순간 왕자는 아실링의 말을 끊고 선언하듯 이야기했죠.
“싫어! 난 이 성을 떠날거야!!”
“아직도 꿈속에 빠져 사는구나. 언제까지 미친년처럼 거울만 보며 혼자 떠들어댈 참이지? 너도 널 키워준 이 왕국에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키워줘? 죄수처럼 가둔게 아니고? 말은 제대로 해!! 세력다툼에 방해되니까 방에만 처박아놓고 나오지도 못하게 했잖아!!”
악에 받혀 소리치며 반항하는 오빠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병사들을 시켜 공주님을 다시 방에 가두었어요. 하지만 아실링은 바로 그날 밤 성을 빠져나갈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옷장을 뒤져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검은 드레스를 꺼내 발을 덮는 길이의 기장을 재단하여 짧게 만들고, 어딜가나 눈에 띄는 아름다운 색의 긴 머리를 높게 올려묶고 검은 두건을 둘러 가렸습니다. 그리고 몸을 낮추어 언젠가 발견하였던 비밀통로에 숨겨두었던 크기 조절이 가능한 왕가의 낫, 그동안 생일이며 기념일이며 들어왔던 보석과 패물, 그리고 그 속에 숨겨두었던 무슨 열매일지도 모를 악마의 열매를 먹고 비밀통로를 통해 창문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예상했던대로 풀숲에 자연스레 착지하였지만 숨어있던 덤불에 종아리가 여기저기 긁히고 채여 상처가 나기 시작했죠. 하지만 공주님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그대로 달렸습니다. 니베이아 왕국은 꽤나 깊은 숲 속인줄 알았건만, 숲을 빠져나오니 항구가 그리 멀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공주님의 탈주는 금방 탄로가 났고, 나라 곳곳엔 공주님의 수배서가 붙었습니다. 공주님는 자신을 잡으려는 마수의 손길을 요리조리 피하며 드디어 항구에 도착하였죠!
쏴아아... 쏴아.. 끼룩끼룩...
드넓게 펼쳐진 푸르른 바다는 하얀 거품과 같은 파도를 밀고오며 공주님을 반겨주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러기들도 어여쁜 공주님의 자유를 축하한다는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맴돌았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나왔어...!”
하지만 그런 기쁨과도 잠시, 병사들은 코앞까지 들이닥쳐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공주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배에 오르기 전, 뒤를 돌아본 공주님은 눈 아래를 늘려 붉은 살을 보이며 혀를 쏙 내밀곤 다른 나라에서 온 귀족들의 파티선에 올라 탔습니다. 그리고는 귀족들이 모두 잠든 그날 밤.. 인근 바다에 내려 다른 섬까지 조금 헤엄쳐 가기로 마음을 먹은 공주님은 안 그래도 짧은 드레스의 프릴을 모두 떼어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 다시 선상에 섰습니다
바스락...
“음?”
공주님의 뒤에는 언제나 거울에 비치던 오렌지색 단발머리의 아가씨가 둥글게 올라간 눈으로 공주님을 빤히 보며 서 있었습니다. 우리의 공주님은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 너, 너는?!”
하지만 아가씨는 공주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죠. 어떻게 보면 당연했어요. 거울 속의 아가씨는 정말 미쳐가던 공주님이 보던 환상일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거울 속의 아가씨가 이렇게 눈 앞에 나타났는데 공주님은 이를 놓칠 수 없었죠. 공주님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아가씨가 먼저 공주님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나미!! 너, 나랑 동업하지 않을래?”
“좋아!”
그날부턴 공주님의 거울에서 아가씨는 보이지 않았고 대신 공주님은 오래오래 언제건 아가씨를 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공주님의 모험길에 언제나 아가씨도 함께 하겠죠!!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겠지만 아가씨와 공주님의 모험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