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이에는 거짓이 없었다.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아뇨, 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가 그녀의 눈 색이 검은 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챌 즈음이었다.
잔비가 내리는 초여름 새벽의 맛도 향도 없는 차가운 실내의 공기가 그녀를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뼈마디가 굵은 그녀이지만 유독 두드러지는 쇄골을 감싼 피부에 오히려 강렬한 체취를 느끼면서, 그는 그녀의 목과 어깨 사이 어디 즈음에 입술을 묻었다. 그녀의 눈을 보고싶어졌다. 깊은 바다는 너무 많은 것을 숨기기에 오히려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다고 착각해 버리고 싶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의 몸에서는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십 오 달러 남짓의 귀걸이. 상대의 눈을 먼저 신경 쓰기 시작했던것은 그녀의 쪽이었다. 그녀는 상대의 외모에 대해 평가를 비롯한 일말의 사실에 대해서도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으므로 그는 그 날의 언어를 기억했다. 우주에는 없는 녹성(綠星)의 색이라고 했다. 타키온, 녹성, 모두 우주에는 없으나 그녀의 앞에는 실재하는. 그는 그러한 존재들이 자신을 잘 대변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 개선문에 있었다. 그리스 루사노 수도원에 있었다. 전장에 있었다.
다시 말해, 친근한 학교에 없었고, 사랑하는 조국에 없었고, 따뜻한 집에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 그녀의 앞에, 있나. 회사가 아닌 곳에 있는 그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지급한 옷 이외에는 입을 것이 없어 늘 입던 흰 셔츠와 검은 팬츠 차림인 그녀는 그의 옆에 있었으므로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시선이 가판대 위에 있는 에메랄드 색 큐브 귀걸이를 향한 것을 그는 보았다.
저게 마음에 드는 것이오?
마음에 드는가, 좋아하는가. 다분히 주관을 물어보는 질문에 그녀는 언제나 말을 아꼈다. 그도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그가 꾸준한 설득 끝에 얻어 낸 특별한 날이었기에 그녀는 암묵 없이 대답했다.
릭의 눈 색과 닮은 것 같아서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웅성거림을 멈추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서 고요했던 것은 그와 그녀 뿐이었다. 한 음절 한 음절, 자신이 들은 것이 자신의 바람 내지는 주변의 들뜬 분위기 탓에 곡해되지 않았는가를 판단하는 그의 두 눈에 그녀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는 듯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의 눈에는 우주가 있는데. 엉킨 생각들 사이로 튀어나온 것은 스스로도 논리의 전개를 알 지 못할 실없는 소리였다.
우주에는 녹색 별이 없지요.
그는 그 날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육안으로 보이는 녹색의 항성은 사실 백색이나 청색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는 뒷전이었지만. 지금까지 함께 했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쩌면 그와 그녀가 함께 있는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흔히 듣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앞선 단어들을 혀 끝에서 여러 번 되짚었다.
다음 날 그녀의 앞에 내민 육면체의 귀걸이가 비록 밝은 전등 아래에 있는 빛을 띠지 못했어도, 그녀는 이틀 뒤 늘 하던 백탁색의 진주 귀걸이를 데스크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나름 번듯한 직장인이 선물하기에는 아무래도 민망한 금액이니 하루 이틀 기념의 의미 이상을 못 찾을 줄 알았던 귀걸이가 두어 달이 되어가도록 그녀의 귓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만류했지만 그녀는 괜찮다, 고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을 했으면서 퇴근 길에 당최 언제부터 쌓였는지 모를 누군가의 굳어버린 혈취를 귀걸이에 묻히고 왔을 때에도 그녀는 늘 괜찮다, 고 했다.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언제부터인가 그는 그녀의 '괜찮다'는 말 뒤에 늘 입술을 맞물려 입을 막았다. 이를 부딪히고 혀를 얽어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녀의 '괜찮음'을 막았다. 어쩌면 더 많은 말들이 젖혀진 목울대 안에서 녹이 슬다 폐 안쪽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하지 못 했을 뿐이니 우리는 서로 거짓이 없는 것이라 하면서. 그래, 그 또한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새벽 공기에 어스름히 깔린 비냄새가 가실 즈음 그는 자신이 다시 잠에 들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설풋한 졸음을 깨워냈다. 그녀가 옆에 없었다. 블랙. 그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 그녀의 이름은 본래 그런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색을 성으로 쓰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으나 그녀는 그런것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는 속으로 알고 있는 수 많은 이름들을 써 보았다. 앤, 브리아나, 신디, 다나... 그 어느것도 그녀의 이름이 될 수 없었다. 모든 이름 위에 검음이 덮이고서야 그녀는 모습을 보였다. 블랙.
일찍 일어나셨네요.
그녀가 들고있던 수화기를 덮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동이 트기는 커녕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이 시간의 통화는 필시 회사로부터 온 것이었을 테지만, 사실 그 어느 시간대라도 그녀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이유의 시작은 퀘이사요 끝은 회사였다. 그는 유독 그녀가 깨진 향수병처럼 느껴진 날을 되새겼다. 살점은 부서질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무릎의 관절이 녹아내려 주저 앉을 것 같았던 날의 그녀는 표정에서도 시취를 숨기지 못한 채로 농익은 블랙베리의 향을 풍겼다. 그 때의 문책을 당하고 있는가. 그녀가 온전히... 어쨌든 ‘돌아왔’으니 '실패'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성공'이 그녀의 발목을 잡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 것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향수를 두 손목에 들이부었다는 것은 명백히 그에게 불문을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그 또한 모든 것을 눈치챘고,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은 전장이었던 자신을 그녀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 색을 닮아가는 창 밖을 보며 갈 곳 없는 표정을 지을 때마다 옆을 지키는 자신에 대해 마음이 놓이는 것을, 이윽고 그것을 비난하며 스스로 얼마나 비열하고도 열렬하게 이 자리를 원하고 있는지 깨닫는 자신을 그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거짓이 없었다.
우리에게는 ... 없었다. 그는 이미 반쯤 그에게 등을 돌린 그녀의 모습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몸은 그녀가 지나온 세월을 숨기지 못해 단정하고 단단했다. 고개를 숙이자 이마가 그녀의 목이 끝나는 부분의 불거진 뼈에 닿았다. 턱을 들자 이 모든 견고함이 다 거짓된 것이라며, 그의 입술에 닿는 피부는 부드러웠다. 늘 둘의 새벽은 말이 없어 창백했다. 그는 그녀에게 화를 내고 싶었을 것이다. 깊은 바다와 같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하염없이 오열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심연을 바라보는데 어째서 심연은 나를 보아주지 않는가. 괴물이 되어도 좋았던 나를. 그 드넓은 우주에 녹색 별은 없으니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었던 것인가. 여행자로서 살다 죽을것이라면 나의 시신이 돌아갈 곳은 우주가 되어야 했다. 바다가 되어야 했다. 어쨌든간에, 그녀의 눈과 닮은 곳으로.
그녀는 자신의 복부 위를 두른 두 팔에 가만 손을 대었을 뿐, 여전히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 언제나 우리는 진실되었다. 서로에게 전하는 말이 없으니 고하는 거짓도 없었다. 누구라도 상대에 대해 물었을 때 서로는 감당하지 못할 거짓을 대면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입을 닫는다. 진실되게 섞는 것이라면 말 외의 것으로도 충분하다. 앞으로도 부디 우리에게 거짓은 없기를. 그것이 진실에서 도망치는 것이라도, 그 모든 것이 덮힌 자리 위가 언젠가는 썩어 문드러질 것이라도, 가장 밝은 별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무너져 가장 깊은 어둠을 가지더라도.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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