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누님.png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나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아서, 그래서 그만두었을 뿐이다. 다이어리에 글씨를 적는 일이 지나치게 버거웠다. 손끝이 무거웠고 펜은 떨려왔다. 꼭 제 마음처럼 불안정했다. 흔들리는 글씨가 두 겹으로 겹치다 말았다. 많이도 마셨구나. 결국 펜과 다이어리를 바닥에 떨구고 눈을 감았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투명한 병을 발로 밀어버리며 이온은 몸을 일으켰다. 낡아빠져 더는 수복되지 못하고 푹 꺼져 있기만 한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과정이 험난했다. 잇새로 절로 신음이 빠져나왔다. 에어컨을 18도까지 낮춰두곤 이불도 덮지 않고 잤으니 그럴 수밖에. 테이블 위에 늘어진 과자 봉지와 치킨 상자를 본 이온은 소파의 팔걸이에 기댄 채 이마를 한 번 쓸고 손가락 사이로 주변을 한 번 봤다. 벗어 던진 옷과 가방이 바닥을 뒹굴고, 심지어 가방은 발에 한 번 채이기까지 했는지 안에 든 것들이 전부 제 위치를 벗어나 바닥에 산개해 있었다.

 

망했다는 생각이 곧바로 들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무엇이든 집어먹는 것이 그녀의 성정이었고, 술에 취하면 아낌없이 돈을 쓰는 게 지독한 버릇이었다. 그런 두 상황이 겹쳤으니 어젯밤의 자신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핸드폰을 확인하자 문자가 가득히 날아와 있었다. 저 중에서 과연 얼마만큼이 카드 결제 문자일지, 보지 않아도 머리가 아득했다. 숙취로 인한 두통이 별 것 아니라 느껴질 정도였다. 팔을 뻗어 무성의하게 소파 위를 대충 헤집었다. 손에 에어컨 리모컨이 걸릴 때까지 헤집어 보려 했지만, 쉬이 걸리는 것은 없어 결국 이마를 짚은 손에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에어컨 리모컨은 어째서인지 테이블 저 밑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가방에서 튀어나온 파우치 아래에. 대체 술에 취해 어떤 동선을 개척해 나간 것인지 자신도 기가 차 할 말이 없었다. 이온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바닥에 앉아 다리를 뻗어 리모컨을 끌어왔다. 다행스럽게도 발끝에 닿은 리모컨은 언제 도망쳤냐는 것 마냥 자연스레 딸려왔다. 발로 툭 차내 손 옆까지 온 리모컨을 들고 버튼을 꾹 눌렀다. 그렇게 24도까지 올리고 나서야 이온은 숨이 트인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뒤지겠네."

 

감기로 인한 두통인지, 냉방병인지, 숙취인지, 혹은 스트레스성 편두통인지. 제 머리를 헤집는 고통의 근원들은 각자의 개성이 지나치게 뚜렷해 평소라면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음에도, 오늘따라 그 원인을 잡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생각해보니 술까지 그렇게 먹어두고 진통제를 먹는다는 것 또한 꽤 무모한 일이라 이온은 결국 생각을 포기해버리고 소파에 엎드리고 말았다. 오래된 가죽 소파 특유의 끈적한 느낌은 에어컨 덕분인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조금 매끈하게, 반질반질하게, 그렇게 닿았을 뿐. 고개가 숙여지자 헛구역질이 절로 나왔지만, 토할 것은 별로 없는 듯 목 아래로 걸리는 것은 없었다. 테이블 위로 뜯긴 과자봉지들 안에는 과자가 여전했고, 치킨 상자 안에는 치킨이 반이나 넘게 남아있었다. 내일이 없도록, 배가 부를 정도로 술만 마셔버린 것이겠지.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들어버린 지독한 버릇이다. 술에 한 번 취하기 시작하면 술로 배를 채우고 술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던 것. 그런 짓을 하기 시작한 것도 어느덧 십여 년 전이니, 세월이 많이 지났다. 지금으로서는 힘겹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금의 제 몸이 그 방증이지 않은가. 이온은 다시 한번 엉망이 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눈썹의 피어싱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손가락에 걸리지도 않았다.

 

핸드폰에서는 다시 한번 진동음이 들려왔다. 문자거나 메신저 둘 중 하나겠지. 고개를 겨우 들어 벽의 시계를 확인했다. 아침 9시 13분. 평소의 평일 같으면 출근을 한 다음에 책상 정리를 다 하고 빌어 처먹을 대표 새끼의 커버까지 꼬박꼬박 한 다음에 회의실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시간이었다. 이젠 정리할 회의실도 없지, 개 같은 대표 새끼. 양손을 모아 얼굴을 가리곤 마른세수를 하듯 훑어 내린 뒤에 겨우 소파를 짚고 일어섰다. 전신이 뻣뻣하게 굳은 몸은 우는 소리를 냈다. 체육관 관장은 이온의 몸에서 이런 소리가 날 때마다 얼어 죽은 사체에서나 날 법한 소리라고 말했다. 그 실없는 말이 생각나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나마 용케도 트레이닝복의 바지는 챙겨 입고 잔 탓에 무릎이 시리지는 않았다. 술에 절여져 불지 않은 게 이상한 몸을 이끌고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섰다. 겨우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것은 하얀 냉장고의 내부였다. 먹을 만한 것도 없지만 마실만 한 게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주문해 둔 생수병은 전부 발코니에 뒀던가. 냉장고 문에 기대 한참을 생각하던 이온은 삑삑거리는 냉장고 소리를 듣고 나서야 피곤한 얼굴로 문을 닫고 발코니로 걸어갔다.

 

바깥에서는 매미 우는 소리가 격렬했다. 제 짝을 찾기 위해 보름이 채 되지 않는 수명 동안 울어대는 곤충. 언제 생각해도 시끄럽기만 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땅속에 묻혀있다 겨우 기어 나와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간까지 반려를 찾기 위해 울어대다 죽어버리든, 번식에 성공하고 죽어버리든 둘 중 하나의 경우만을 맞이하는 것이라니. 신체의 모든 기관이 '울음'을 위해 진화된 생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온이 매미에 대해 든 생각은 왜 아직 도태되지 않았지? 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까지도 여전해, 그 울음이 그저 시끄럽기만 하다고 생각하며 생수 여섯 개들이를 집 안으로 들여왔다. 아주 잠깐 바깥이라기도 민망한 발코니에 있었을 뿐인데 몸에는 엷게 땀이 배어 나왔다. 며칠은 바깥을 나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갈 일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으니까.

 

성운통운을 나온 뒤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주말이었다. 창밖으로는 아주 가끔 오토바이가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리다 말았다. 이미 나갈 사람은 나가는 것을 끝냈을 시간이긴 했다. 동네가 이렇게 조용하다는 것은 처음으로 알았다. 여덟 달 전에 이사를 왔음에도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여태까지의 제 삶이 어땠는지 더욱 또렷해졌다.

 

물 여섯 병을 냉장고에 대충 밀어 넣은 이온은 물이 시원해질 때까지 기다리려는 듯 다시 소파로 돌아와 그 위로 몸을 눕혔다. 제가 잠들었던 그 모양 그대로 눌린 베개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 집에는 죄다 낡아빠진 것들뿐이라 전부 한 번 모양을 잃으면 수복을 하기까지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중심에는 자신이 있었고. 이온은 자조적으로 코웃음을 치며 팔로 눈을 가렸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어렴풋하게 생각났다. 슬프지는 않았다. 애초에 사랑해서는 안 될 대상이기도 했으니까. 이것은 제 잘못에 대한 책임이고, 그것에 굳이 무언가를 첨언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배신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알았을 때, 이온은 곧바로 결심했다. 이젠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서로를 보는 일은 여기까지인 것이 좋겠다고. 그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은 얼마나 별것 아닌 것인가. 개새끼. 날카로운 시선과 대비되는 미소를 지으며 은은하게 흘리던 욕설인지 뭔지 모를 호칭이 생각나 이온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러니 그만두는 것만큼 현명한 선택이 없었다.

 

썩 좋아하지도 않는 클래식이 울렸다. 딴에 수준을 맞추겠다 걸어둔 벨소리였다. 전화를 할 사람도 없을 텐데 어디서 제가 쉬는 것을 알아 전화를 했을까. 보이스 피싱이라도 되는 걸까. 소파에 가로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끊어질 법도 한데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어차피 그냥 두면 알아서 상대는 끊을 것이리라. 제게 두 번이나 전화를 할 이는 없었다. 이온은 길게 한숨을 쉬면서 몸을 뒤척였다. 여전히 몸은 단단히 굳어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전화는 끊겼다. 다시 조용히 쉴 수 있으리라. 뻣뻣한 손을 천천히 뻗어 이불을 당길 때쯤에 다시 전화는 걸려왔다. 끊어졌다 다시 걸려온 텀을 보니 분명 제게 용건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온은 눈을 감고 핸드폰이 있는 곳에 손을 뻗어 거두었다. 습관이기에 보지 않고도 받을 수 있는 전화를 받아들고 그 귓가에 가져다 댔다.

 

"누구세요."

"내려와요."

"누구신데요."

"길 비서님, 내 목소리도 잊었어요?"

 

자신에게 '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쓸 인간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온은 감았던 눈을 뜨고 핸드폰을 한 번 봤다. 자신은 좋아하고 있던가? 아니다. 이것은 불쾌함이다. 불쾌함과 동시에 찾아온 불길함이 그녀의 감에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전신거울 속의 이온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답이 없자 핸드폰에서는 잠시간의 침묵이 있었다. 딱히 되묻지는 않았다. 모태구는 길이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언제부턴가 비밀을 찢어발길 듯 노려보는 그 눈이 이상하게도 두려운 사람이니까. 이온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말이 아닌 꼴을 정리하기엔 이미 늦어버렸어도.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내고 이불을 밀며 천천히 일어났다. 지금의 제게 선택권이 있는가? 아니다. 모태구는 제 뜻을 거부하면 언제든 타인의 목에 사슬을 채우고 조여 끌고 갈 인물임을 이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온이 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목소리의 떨림을 에어컨의 소음이 겨우 채워주었다.

 

"금방 내려갈게요."

00:00 / 04:02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