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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몽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그런데 이젠 거짓뿐만이 아니라 너도 없다. 확실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였다. 어디부터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이었는지에 대하여.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이었는지에 대하여. 아무리 생각해도 그 모든 건 거짓이 아니었다. 내 옆에서 쿵쿵 살아 숨 쉬던 분명한 진실이었다. 진실도 거짓도 아닌 허상 같은 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 히지카타는 말했다. 그건 꿈이라고. 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그곳에 이미지로서 존재할 뿐이다. 히지카타의 역설에 대해, 생각에서도 마요네즈 냄새가 나서 기분 나쁘지만 또 한참을 생각했다.

 그 한참이 지나는 동안에도 너는 없었다. 네가 없다는 건 내 가장 가까운 곳에 텅 빈 빈자리가 생긴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 씻은 후 밥을 먹고 둔영을 느긋하게 산책했다. 그건 여느 날과 다를 게 없었다. 걷고 있으면 곳곳에서 대원들이 나를 향해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어, 라든지 응, 하며 성의 없게 인사를 받아주면서 계속 걸었다. 둔영 한켠에 걸린 조직도 앞에서 발을 멈췄다. 검을 쥐고 있을 때면 늘 내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저릿하게 긁어대던 그 느낌이 다시 나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내 허리춤엔 칼이 없었고 양이지사 한 마리도 없을 신센구미 둔영 한가운데에서였다. 순간 눈을 약간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양 옆 복도 끝에 검은 옷을 입은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있을 뿐 적처럼 보이는 사람은 눈을 아세톤으로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눈을 아세톤으로 씻고 찾아봐도 그 아침 보이지 않았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급하게 고개를 위로 젖혔다. 명패 두 번째 줄 맨 윗켠에 걸린 1번대 대원들의 이름을 보았다. 맨 처음엔 대장인 내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다음이 카미야마, 토비구치, 다나카 순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젖히기까지 해 맨 뒤의 신참 대원 이름까지 읽었다가 도로 내 이름으로 시선을 옮겨 다시 한 번 쭉 읽었다. 아무리 보아도 없었다. 늘상 내 이름 뒤에 적혀 있던, 한자로 된 이름 사이에서 홀로 가타가나로 쓰여 있던 기이한 이름에 대해서였다.

멀쩡히 잘 있던 대원의 명패가 사라지는 건 사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신센구미는 순직자가 많았던 탓이었다. 에도에 갓 상경한 열네 살의 나는 적의 죽음을 맞이하는 건 물론이고 동료의 죽음을 맞이하는 일에 대해서도 배워야 했다. 전자는 별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후자는 조금 버거웠다. 지금이야 야마자키가 죽었다 살아 돌아왔을 때처럼 서로 별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굴 수 있었지만 처음에는 아니었으니까. 초기에는 부슈에 있을 적부터 살갗을 맞대며 몇 년을 지내온 대원들이 신센구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늘 박하맛 캔디를 가지고 다니며 나에게는 특별히 딸기맛 캔디를 나누어 주던 요세이 형은 신센구미가 결성되고 두 달만에 죽었다. 도장에서부터 늘상 나이가 지긋이 어린 나를 검술이 뛰어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깍듯이 대하다가 1번대에도 기꺼이 들어와 나를 따르던 아츠시 형도 반 년을 넘기지 못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대원 명패들을 앞에 두고 몇몇 명패를 뜯어내면서 히지카타 씨는 담배를 연거푸 푹푹 피워댔다. 곤도 씨의 태연한 표정도, 히지카타 씨의 무표정도 전부 그런 굴곡진 표정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터였다. 히지카타 씨가 모든 부대의 명패들을 담당하는 것도 옛날 말이었다. 이제는 각 부대의 대장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즉 내가 1번대의 명패를 관리하는 게 맞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너의 명패가 사라졌다면 그 범인은 최소한 나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일 것이다. 신센구미 놈들은 반말을 틀지언정 업무적인 부분에서 상사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두 명 밖에 남지 않는다. 사실 그런 식으로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내 18년 동안의 인생에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면 원인은 꼭 그 사람일 때가 적지 않았다. 내 발걸음은 어느새 부국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히지카타!”

 

 거세게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어젖혔다. 히지카타가 어느새 고개를 돌렸는지 나를 보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휘갈기던 도중이었다. 아마도 신센구미의 중요 서류겠지만 알바는 아니었다. 곧장 걸어가 놈의 크라바트를 붙잡았다. 히지카타는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뭐야, 왜. 굴곡 없는 말투로 말할 뿐이었다. 그가 순찰을 하다 도움을 청하는 시민이 있을 때면 꺼내놓는 말투랑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건조한 눈빛으로 순찰차 바깥으로 고개만 대충 뺀 채 “뭐야, 너는”하고 말하는 투였다.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차올랐다. 네놈에게 내가 처한 일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냐, 히지카타 이 자식아.

 

“무, 무슨 일이심까? 도에스력이 부족하다거나…”

“너는 닥치고 꺼져.”

 

 히지카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테츠의 목소리였다. 눈을 부라리며 이야기하자 테츠는 벌떡 일어서더니 야끼소바 빵을 사오겠다며 후다닥 장지문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히지카타는 말없이 지켜보다가 손을 들어 내 손 위에 얹은 뒤 뿌리쳤다. 꽤 강한 힘에 나는 손이 뿌리쳐지며 몇 걸음 덩달아 뒤로 주춤하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소고. 바주카 쏘면서 등장하지 않은 걸 칭찬해줘야 하나?”

“… 로비에 저희 1번대 명패, 히지카타 씨가 건드리셨답니까?”

 

 히지카타가 비뚤어진 크라바트를 도로 매며 말했다. 내가 답하자 성가시다는 듯 바로 “아니”라고 답했다. 그러면 그 녀석은 어디로 간 겁니까? 내가 물었다. 곱하기와 나누기가 동시에 수학식 안에 있으면 조금 아파오는 머리로는 그 정도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뭐가. 히지카타가 또 바로 물었다.

 

“스우 말입니다. 어디로 갔답니까?”

“…… 너 오늘 어디 아파? 와봐봐.”

 

 히지카타의 말을 듣자마자 몸이 저절로 주춤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지카타는 불쑥 다가와 왼손으로는 내 손목을 붙잡고 오른손을 내 앞머리 밑으로 넣어 이마에 올렸다. 동시에 매캐한 담배 냄새가 지나치게 가까이 느껴졌다. 면도가 깔끔하게 잘 된 인중과 턱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도 수염이 많이 나는 스타일은 아닐뿐더러 면도도 수염 한 털 남지 않도록 꼼꼼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와는 너무 달랐다. 만약에 내가 히지카타 만큼이라도 났다면 아마 군데군데 수염이 난 채로 카부키쵸를 활보하곤 했을 터였다. 물론 그 꼬라지를 본 히지카타가 달려와 내 턱을 붙잡고 면도를 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 인중을 가까이 보는 건 편한 일은 아니었다. 잡히지 않은 쪽 손을 들어 히지카타를 힘껏 밀쳤다. 히지카타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가 한 짓은 아니었다. 아마도 히지카타가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일 테다.

 

“열은 없는데… 아니면 꿈이라도 꿨냐?”

“무슨 개소리입니까? 스우 몰라요?”

“…… 개소리는 네가 하고 있잖아. 안 되겠다 너, 일 쉬고 병원에라도 갔다 와 봐.”

 

 히지카타는 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를 지나쳐 어디에라도 가려는 눈치였다. 달갑지가 않은 장난이었다. 나는 우선 내가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만큼 당하는 걸 꺼렸기 때문이다. 주체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히지카타라는 것은 더욱 싫었고, 소재가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인 건 더더욱 싫었다. 내 정신보다도 몸이 먼저 틀어져 히지카타 쪽으로 갔다.

 

“히지카타 이 새끼야!”

 

 주먹을 쥔 채로 돌진했다. 히지카타는 평온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때 문득 어느 해질녘이 생각이 났다. 히지카타가 드물게 하카마를 입고 검술 연습에 정진하던 도중이었다. 나는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부슈에 있을 적 어린 내가 곧잘 그랬듯이. 이유는 단순했다. 히지카타가 곧 죽을 누님의 행복을 망쳐놓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죽도를 들고 달려드는 나에게 히지카타는 가차 없었다. 늘 내가 숨이 차서 울 지경이 될 때면 적당히 맞아주고 져 주던 히지카타도 그곳엔 없었다. 눈썹 하나 꿈틀이지 않은 채 오키타 소고가 모르는 히지카타 토시로의 얼굴로 나를 끝까지 팼다. 다시 말하자면 오키타 소고가 알고 싶지 않은 히지카타 토시로의 얼굴로. 구태여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나에게 있어선 히지카타와의 모든 기억이 다 그랬지만 그날의 일은 특히 그러했다. 히지카타를 앞에 두고 반갑지 않게도 나는 그 유난히 붉던 해질녘을 기억하고 있었다.

 

 

*

 

 아마 세상에서 제일 잘 드는 칼로는 기억마저도 지울 수 있을 터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얼굴 표정 하나 안 바뀌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에겐 갓난아기일 때의 기억이 없었다. 그뿐이면 다행일 텐데. 그때까지 멀쩡히 잘 살아 있었다던 부모님의 기억도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내 기억 속에서 내 울음을 달래고 웃음을 이끌던 존재는 단 한 명이었다. 내 기억의 가장 오래된 시점에서 이미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고 있던 누님이었다. 아침엔 일을 하고 밤에는 집에 와 나를 돌봤다. 그 반대일 때도 있었다. 내 기억 속의 누님은 대부분 그렇게 흘러갔다. 흘러가다가 멈췄다. 누님이 병원에서 숨을 거두던 그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짐을 싸들고 에도로 상경하던 때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누님의 시간을 멈추게 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뒤도 안 보고 떠나던 히지카타도 목숨을 앗아간 폐병도 아니었다. 바로 나였다.

 누님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온 건 낭이조 결성 끝물이었다. 잔기침이 한 달을 가도 떨어지지 않아 병원에 들렀더니 폐가 조금 좋지 않은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도 치료를 거듭하면 나을 거라며 누님은 웃으며 수화기 너머에서 말하고 있었다. 나는 누님의 말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집에 있었다면 진작에 병원에 보내고도 남을 터였던 부분은 아쉬웠지만, 누님은 매운 음식을 곧잘 즐기는 탓에 늘 기침을 달고 살다시피 했으니 늦게 갔어도 심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 이상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의 나는 한가하지 않았다. 낭이조 조직 체계는 하루가 다르게 히지카타의 지휘 하에 잡혀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요 임무도 예정되어 있었다. 그 임무만 넘기면 마침내 에도에 발붙이고 살 수 있는 사무라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고비를 잘 넘겨 신센구미가 창단되었다. 나도 막부의 신하로서 1번대 대장이라는 어엿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제법이구나. 마츠다이라 선생님은 나를 두고 말하기도 했다. 들뜬 마음에 그 주 주말 곧장 일을 팽개치고 부슈에 내려갔다. 엄연히 말하자면 팽개친 건 아니었다. 내 바로 다음의 부관 자리를 꿰찬 스우에게 떠넘겼다. 글을 읽을 줄은 모르는 녀석이었지만 부관이라는 건 원래 그런 자리라고 생각하면서였다.

역에 내리자마자 한달음에 후다닥 집으로 달려갔다. 천천히 대문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보다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누님, 저 왔어요. 소고 왔어요. 배에 힘을 주고 큰 목소리로 불렀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늘 내가 대문 앞에서 발소리를 내면 그때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곤 했던 누님이었다. 자고 있나, 생각하며 별 생각 없이 신발을 벗고 툇마루에 섰다. 그리고 거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을 때였다. 나는 볼 수밖에 없었다. 누님이 입가에 침이 흥건한 채 거실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었다.

그 다음부터 병원에 가기까지의 기억은 잘 남아 있지 않았다. 누님을 업으려 했지만 축 처진 누님의 몸이 자꾸만 바닥에 부딪쳤다. 깜깜해진 정신을 애써 더듬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구급차를 불렀다. 곧 구급차가 도착해 누님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 그 시간이 마치 천 년 같았다. 누님은 바로 응급조치를 받는 듯했고 나는 의사에게 병명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 일본의 의술 수준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도 했다. 그때의 나는 텅 비어 있었다.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누님은 하루아침에 나를 떠나버리고 말 사람이 하루아침에 되어버렸다. 내가 옆에 있었다면 병이 이렇게까지 악화되는 걸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후회가 무색하게 몸이 자꾸만 떨려왔다.

 

“얘, 소쨩! 그러면 안 돼. 누나는 괜찮단다? 그러니까 너도 그런 표정 짓지 마렴.”

 

 내 어딘가를 꿰뚫어보기라도 했는지 간신히 깨어난 누님은 말했다. 웃고 있었다. 나는 애석하게도 그 표정을 믿고 싶었다. 에도에서 곤도 씨와 히지카타가 도착했고 그들과 함께 에도로 돌아왔다. 얼마 안 가 나는 스우를 붙들었다. 피투성이가 된 전쟁터 가운데 서 있는 스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곳에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우는 당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키스했다. 그건 약속이었다. 누구 하나 서로를 섣불리 떠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머리를 붙잡았다. 스우가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춘 지금 나를 두고 떠나던 누님의 마지막 모습이 머리를 울려대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드디어 누님의 불행이 나라고 말했고 누님은 끝까지 내가 누님의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나에게 그 말이 믿을 수 있는 말인지 어떤지는 나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요로즈야 사무실에 찾아갔다. 뇌가 잘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누군가의 얼굴밖에 없었다. 히지카타는 내 주먹을 아랑곳 않고 휙 피하더니 병원에 가라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자리를 떴다. 야마자키나 세이조 씨 같은 대원들에게 스우가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고 다녔지만 아무도 스우를 안다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떠오른 게 형씨의 얼굴이었다. 아마 이게 누군가의 지독한 장난이라면 믿고 일을 의뢰할 사람은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스우? 그게 누군데? 너네 대원 이름 일일이 형씨는 기억 못한다고?”

 

 그러나 형씨도 이런 반응이었다. 형씨뿐이라면 왕왕 아는 사람도 모른다고 할 때가 많았으니 납득이 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차이나나 안경은 아니었다. 그 녀석들도 고개를 갸웃이며 스우라는 이름을 연신 모르겠다는 투로 발음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억력들이 나쁘셔서야 통장 비밀번호는 어떻게 기억한답니까? 사진 보여줄게요.”

“야 임마! 통장이 있는지부터 묻고 시작하라해, 이 망할 애새끼가!”

 

 차이나가 뭐라 발끈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품에서 지갑을 꺼낸 뒤 열었다. 스우의 사진은 언제나 지갑 가운데에 가장 잘 보이게 꽂혀 있었다. 사진은 왕왕 바뀌곤 했지만 녀석의 사진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이번에 꽂아둔 건 순찰하다가 심심풀이로 놈과 찍은 스티커 사진이었다. 함께 두 장의 사진을 찍어서 한 장은 내가, 나머지 한 장은 녀석이 갖는 식으로 나눠 가졌다. 지갑을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나는 다시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사진이 없었다. 내가 잠시 말이 없자 형씨는 목을 길게 빼 지갑을 들여다본 뒤 없잖냐, 하고 말했다.

 

“… 이게 없을 리가… 잠시만요.”

 

 말꼬리를 늘어뜨리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덮개를 열어 1번을 길게 꾹 눌렀다. 잠시 뒤 화면에 크게 “곤도 씨”라는 글자가 떴다. 급히 통화를 종료하고 녀석의 휴대폰 주소를 입력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들려오는 건 없는 번호라는 내용의 안내음 뿐이었다. 핸드폰과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니까 너는 분명 있다고 생각한 녀석이 알고 보니 없는 녀석이었다 이거지?”

“비밀친구 같은 거냐해?”

“너랑 동급으로 취급하지 마.”

 

형씨와 차이나가 동시에 말했다. 형씨의 말은 들을 만했지만 차이나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었다.

 

“형씨라면 뭔가 알고 있을까 싶어서 왔는데 이거 원… 정말로 제가 맛이 간 걸지도 모르겠군요. 어쨌든 감사했습니다. 병원에나 가 볼게요.”

“잠깐 기다려, 오키타 군.”

 

 형씨가 말했다. 나는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려다가 잠시 멈췄다. 안경과 차이나도 의외인 듯 눈을 크게 뜨고 형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표정을 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나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없을만한 일은 아닌데 말이야… 짚이는 구석이 있거든? 진짜 이번에도 그런 거면 콱 기계공 면허를 취소시켜 버려야 돼, 그 망할 영감탱이.”

“에… 겐가이 씨 얘기 하고 계신 거 맞죠?”

 

 긴가민가하다는 투로 안경이 형씨의 말에 답했다. 겐가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니, 들어본 적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분명히 현상수배범일 터였다. 에도 제일의 기계공이라 해서 축제에서 로봇 무대를 맡겼더니 그 로봇으로 쇼군 암살을 꾀하던 인물이었다. 그때부터 현상수배가 시작돼 지금까지 잡히지 않았다. 평소의 나였으면 뒤도 보지 않고 체포할 인물이었다. 다만 지금만은 아니었다. 형씨의 말을 듣자마자 입이 살짝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마 형씨도 그 점을 모두 재고 내 앞에서 영감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리라. 벌떡 일어서 먼저 현관으로 걷기 시작한 형씨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같은 뒷모습인데도 히지카타와는 너무나도 달라보였다. 지나치게 비슷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이 달라보일 수도 있을 법이었다.

 

 요로즈야 사무실을 나온 뒤 조금 걸어 도착한 곳은 “기계당”이라는 간판을 내건 철물점이었다. 정확히 말해선 철물점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나도 카부키쵸를 순찰하며 쉬이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늘상 안쪽에서 용접하는 소리나 철 두들기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철물점이란 으레 그런 곳이었다.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지금도 가게 안쪽에서는 신나게 용접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가게 앞에 멀찍이 서 있는 나를 두고 형씨와 차이나, 안경은 익숙한 듯 걸어 들어갔다. 어이, 영감, 있수? 형씨가 말했다. 듣지 못한 건지 용접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젠 귀까지 먹었냐, 망할 영감? 형씨가 다시 소리 높여 말했다. 용접하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형씨가 씩씩거리며 다시 한 번 입을 열려 할 때였다. 가게 안쪽에서부터 붉은 레이저가 날아와 형씨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 뭐야 이건?”

“사부로를 좀 개조해 봤지.”

 

 그제야 용접하는 소리가 멎었다. 퍽 개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로봇 한 대를 대동하고 겐가이가 가게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뺨을 붙잡고 주저앉은 형씨를 지나치면서였다. 겐가이도, 로봇도 초면은 아니었다. 분명 시게시게 님이 즉위하기 전 쇼군을 암살하려 했을 당시 사용했던 로봇이었다.

 

“긴노지, 아무리 사람이 못돼도 말야. 경찰을 데려오면 쓰나? 다들 잊은 설정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나 현상수배범인걸?”

“아니다해. 망할 영감탱이. 저 자식은 경찰 아니다해. 맛이 간 경찰이다해.”

“오냐, 병원에 간다면 네놈도 끌고 가주마.”

 

 차이나의 말에 발끈해서 말했다. 곧바로 안경이 싸울 시간이 없지 않냐면서 나와 차이나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딱히 토를 달 생각은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형씨가 몸을 일으키곤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겐가이는 한 번 무슨 상황인지 설명이라도 해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 로봇 팔에 달린 총구가 나란히 나와 형씨를 향해 있는 채였다. 조금이라도 잘못 대답했다간 쏴 버릴 심성인 듯했다.

 

“사람 말 좀 들어. 그러니까 저 녀석이 상태가 이상하다니깐? 갑자기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놈 이름을 대면서 우리한테 아냐고 물었다니까? 사진 보여준다고 해놓고 사진도 없고 말이야.”

“그걸 병원을 데려가야지 왜 나한테 데려와! 내가 의사야?”

“또 댁의 요상한 기계 때문 아냐? 가만 보면 타임머신을 만들지 않나, 사람을 최면파로 세뇌시키는 로봇을 만들지 않나, 다른 애니메이션 세계로 가는 이동 장치를 만들지 않나, 영혼을 바꾸는 기계를 만들지 않나, 돈이 가득 나오는 기계를 만들지 않나…”

“마지막은 만든 기억 없다만?”

“이번에도 그런 거 아니겠어? 있던 놈을 지워버리던가, 아니면 저 놈의 기억 속에 없는 놈을 심었던가…….”

 

 나는 가만 서서 겐가이와 형씨가 이야기 나누는 것을 듣고 있었다. 기대와는 달리 겐가이는 아는 바가 없는 눈치였다. 그런 기계를 만든 기억도 없고, 있어도 경찰에게 쓸 기회가 있겠냐며 발끈하는 중이었다.

등을 돌렸다. 곧장 안경이 “오키타 씨!”하며 나를 붙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갈 거야? 이번엔 형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머니에 살짝 손을 넣으며 입을 열었다.

 

“병원이나 가보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형씨.”

“아, 잠깐만. 생각해보니 짚이는 게 있는데…”

 

 겐가이의 목소리였다. 바로 홱 등을 돌렸다. 겐가이는 오른손으로 턱을 괜 채 무언가 고민하고 있는 눈치였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형씨가 말할 거면 빨리 말하라며 겐가이를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겐가이는 자세를 고쳐 서곤 어기적어기적 가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기계 하나를 들고 나왔다. 어림잡아도 차이나보다는 커 보이는 검정색 쇠 박스였다. 형씨가 표면을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들기자 탱탱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이게 뭐냐해? 차이나의 물음에 겐가이는 기다려보라고 하면서 박스 옆쪽의 자물쇠를 열었다. 자물쇠가 열리자 박스의 가운데가 벌어지더니 이내 활짝 열렸다. 그 안에 있는 건 거울이었다. 맞은편에 선 나와 형씨, 차이나, 안경을 모두 비추고도 남는 크기였다.

 

“이건 ‘다른 패러렐 차원으로 보내주는 거울’이다. 지금은 코드가 꽂혀 있지 않지만 코드를 꽂으면 거울을 보고 있는 너희들을 전부 다른 차원으로 보낼 거야.”

“패러렐 차원이 뭐냐해?” 겐가이의 말에 차이나가 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른바 우리 세계와 비슷하지만 구성 요소가 조금씩 다른 차원이라는 거야. 츠우 짱 팬 소설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러니까 이 오키타 씨는 그 스우라는 사람이 있는 세계의 오키타 씨라는 건가요?”

 

 안경이 대답했다. 솔직히 들어도 무슨 말인지는 명확히 이해가 가진 않는 느낌이었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거울 속의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평소보다 퀭하고 안색이 희멀겋단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런 나를 이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누님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병원의 연락을 받은 후로 며칠 밤을 병원에서 지새곤 했었다. 격리 병실 앞 벤치에 앉아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푹푹 고꾸러졌다. 그럴 때면 화장실로 곧장 향해 찬물로 얼굴을 몇 번이고 씻었다. 물에 젖은 내 얼굴은 꼭 새끼 개처럼 보였다. 어미를 잃고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맞아가며 쓸쓸히 죽어가는 어린 강아지. 내가 하루하루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 속에 휩싸인 것과는 달리 누님은 하루하루를 희미하게나마 너무나도 잘 버티고 있었다. 죽음이 무엇인지 이 눈으로 몇 백 번 똑똑히 지켜봤을 내 눈으론 잘 알 수 있었다. 누님은 그곳에 살아 있었다.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나와는 달리 너무도 명확히 살아 있었다.

모든 게 나에게서 멀어져버리는 느낌이었다. 발밑이 자꾸 무너지고 무너졌다. 어느새 내 주변에는 어둠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주위에 두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그 어둠 너머에 있었다. 곤도 씨도, 스우도 나와 마찬가지로 잠도 한 숨 안 자고 누님 곁을 지켰는데도 그랬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원래부터가 멀리 있던 것이었다. 원래부터 멀리 있지 않고서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상황에서 이토록 멀리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말해버렸다. 스우가 있는 앞에서,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리가 없다고. 스우가 그 어둠 속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우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누님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한참 울다 병실을 나오자 발갛게 부은 내 눈가를 만져주던 손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구석자리에 가서 나는 놈을 한참 껴안고 있었다. 내 뺨에 올라와 있던 누님의 온기가 아직도 생생했다. 스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리가 없다고 말해놓고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사랑이 아닐 리가 없었다. 누님과 히지카타 씨는 이 모양이 났는데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걸까? 동시에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이 먹먹해 논리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키스하고 싶어… 몸을 가까이 한 채 이 세상에서 오직 스우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스우는 내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반대쪽 손을 들어 내 턱을 약하게 붙잡고는 강하게 키스했다. 나는 또 그 시간이 천 년 같았다. 누님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당신의 행복이라고 칭했는지도 왠지 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만큼 스우는 따듯했다. 팔을 뻗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분명히 잡히는 단단한 온기였다.

 

“그런 거겠지. 마침 며칠 전에 개발된 거라서 근처 돌아다니던 쥐로 실험을 해봤는데. 마침 그때 거울에 우연히 저 경찰이 잡힌 모양이야.”

“에, 정말요?” 겐가이의 말에 안경이 곧장 답했다. 내가 생각한 것과 비슷한 말이었다.

“그런 거 아니면 난 몰라. 그리고 이 기계에 휘말린 게 맞다면 아마 오늘 저녁이면 돌아올 거야.”

 

 겐가이의 말에 심장을 꽉 쥐고 있던 무언가가 조금 풀어진 느낌이었다. 사례랍시고 형씨에게 파르페를 사고 둔영으로 돌아왔다. 내 방에서 곤도 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괜찮냐고 묻는 걸로 봐선 히지카타가 무어라 바람을 넣은 게 틀림없었다. 괜찮아요. 나는 답하며 곤도 씨의 맞은편에 앉았다. 곤도 씨가 가만가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병원에선 뭐라니? 소고.”

“그냥… 스트레스라고.” 곤도 씨의 눈을 살짝 피하며 답했다. 곤도 씨는 그런 나를 보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소리 내며 웃었다.

“하하! 네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는구나! 그럴 때는 뜨거운 물에 목욕이 제격이지, 간만에 토시랑 함께 공중목욕탕에라도 갈까?”

“저는 너무 뜨거운 물은 사양이라구요.”

 

 틱틱거리는 듯한 대답에도 곤도 씨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내가 어릴 적부터 가장 좋아했던 웃음이었다. 내가 열심히 검술을 배우고 어른들을 도울 때마다 곤도 씨가 옆에서 늘 그렇게 웃어줬으면, 싶을 정도였다. 그런 어린 나의 바람을 깨부순 게 바로 히지카타였다. 곤도 씨와 히지카타 씨는 좋은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곤도 씨는 더 이상 나만을 신경써줄 수 있는 곤도 씨가 아니었다.

나는 당연히 네가 곤도 씨를 뺏어갔다며 히지카타 앞에서 악을 썼다. 때리고 잡아당기고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빽빽 울기도 했다. 히지카타는 곤도 씨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된 게 전혀 별 일이 아니라는 듯이 굴었다. 태연하게 내가 처한 상황 따위는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곤 히지카타가 곤도 씨와의 관계를 딱 그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커 가면서 알았다. 계기가 뚜렷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름의 더위에 푹푹 찌다가도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면 사방이 눈밭이 되어 있듯이 아주 알 듯 모를 듯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내 옆에 남아 있던 게 스우였다. 놈은 내 곁을 떠나는 법이 없었다. 곤도 씨를 향한 내 투정을 해도, 히지카타 씨를 향한 증오를 내뱉어도 언제나 내 편이라는 듯 내 옆에 꼭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세상은 또 조금 더 다르게 보였다. 히지카타 씨가 아무리 내 주변의 것들을 뺏어가도 스우를 뺏어갈 일은 없었으니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온전한 내 것이었다. 놈과 함께 있다 보면 히지카타가 누님을 좋아하면서도 누님을 끝내 받아주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곤도 씨가 나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주제에 맞지 않게 너무 잘 알아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가슴이 울렁거리는 듯한 이상한 예감을 외면하면서도 그저 스우만은 내 옆에 남아줬으면, 하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하곤 했다.

곤도 씨는 몇 마디 말을 더 걸어주다가 방을 나섰다. 나는 하카마로 옷을 갈아입곤 목욕을 했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방의 바로 옆 방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원래는 스우의 방이 있던 자리였다. 지금은 방 위쪽에 “2번대 대장실”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문에 발라진 종이에 2번대 대장인 나가쿠라 신시치의 그림자가 일사분란 움직이는 게 보이기도 했다. 더 이상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펴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스우가 없는 방 안에 누워 있었다.

 

*

 

 병가를 냈다. 평소였으면 엄살 부리지 말라고 한마디 말이라도 던졌을 히지카타는 아무 말 없이 병가를 받아주었다. 잠옷에서 외출용 하카마로 갈아입고는 둔영을 나섰다. 카부키쵸를 가로질러 병원으로 향했다. 잠시 겐가이의 기계당을 마주치기도 했다. 반쯤 내려간 셔터 너머에서부터 요란스레 쇳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냥 그곳을 지나쳤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검사를 한참 했다. 뇌 사진을 찍고 혈액 검사나 맥박 검사 같은 것도 했다. 마지막은 모든 결과를 늘어놓고는 의사와 상담을 하는 것이었다. 보기에 별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환자분의 말씀대로라면 병일 수도 있겠네요. 의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정말로 내가 헛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한 번 정돈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결과가 완전하게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아무 성과도 없이 둔영을 나섰던 그대로 병원을 도로 나섰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카부키쵸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훨씬 늘어 있었다. 모든 것을 바라보다가 근처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혼자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널찍한 창문 바깥으로 카부키쵸의 풍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이 쉴 새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참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고개를 들어 점원을 찾았다. 팔을 들어 실례합니다, 하고 말하자 근처에 서 있던 점원이 다가왔다. 이마에 더듬이가 두 개 나 있는 걸 보니 천인인 듯싶었다.

 

“와사비 덮밥 있나요?”

“와사비… 요? 죄송합니다, 어떤 요리인가요?”

“가츠동 위에 와사비가 듬뿍 올라간 요리인데요.”

 

손을 들어 산처럼 쌓여진 무언가를 만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점원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래, 그러면 혹시 마요네즈 덮밥은 있나요?”

“음, 그건…”

“있어요. 늘 찾으시는 분이 계시거든요.”

 

점원이 고민하는 눈치자 옆을 지나가던 다른 점원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이 점원은 지구인인 듯 보였다. 진짜로 지구인일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차이나도 생긴 건 지구인과 별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와사비 덮밥은 지금까지 찾는 사람이 없었나보죠.”

“네에… 한번 물어라도 봐드릴까요? 와사비만 올라가는 거면 아마 될 텐데.”

“아뇨, 됐습니다. 오렌지 주스 한 잔 주세요.”

“네, 오렌지 주스 한 잔이요.”

 

 주문을 받은 뒤 점원 둘은 메뉴판을 들고 내 자리 옆쪽을 떠났다. 나는 도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게 내가 알던 에도와 같았지만 너는 없었다. 네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게 달라 보였다. 점원이 음료를 건네준 후에는 음료를 들고 아예 등받이에 등을 푹 댄 채 거리를 보고 있었다. 몰래 하는 땡땡이가 아니어서 그런지 히지카타는 전화 한 통 없었다. 잠시 빨대를 물고 있던 이에 힘이 콱 들어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이나가 레스토랑 앞에 서서 내가 있는 쪽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야토가 햇빛을 피할 때 쉬이 사용한다던 보라색 우산을 든 채였다. 차이나는 또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러고는 잠시 시간이 흐르자 곧 레스토랑 문을 열고 놈이 들어왔다. 자리를 안내해주겠다는 점원의 안내를 무시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맞은편으로 와 퍽석 앉았다.

 

“왜 지지리 궁상떨고 있냐해? 일 안하냐해?”

“부탁이니까 좀 꺼져주라. 300엔 줄 테니까.”

“싫다해. 줄 거면 통 크게 줘라, 세금도둑 자식아.”

“너 일부러 내 신경 돋우러 왔냐?”

 

 차이나는 내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동그란 눈으로 내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지구인과 닮긴 했지만 전혀 다른 푸른색 눈동자였다. 서양권의 사람들도 눈이 파랗긴 매한가지였지만 이 녀석은 얼굴은 어느 쪽이냐 하면 동양인 같았다. 물론 동양인도 렌즈 같은 걸 끼워서 눈 색을 바꾸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타고난 맑은 푸른색은 좀처럼 본 적이 없었다.

 

“못 돌아간 거냐해? 파우스트 차원인가 하는 데로?”

“페러랠이거든, 멍청아. 그래서 안 그래도 착잡하니까 꺼져줄래?”

“… 너 원래 사람 하나쯤 없어도 잘 사는 놈 아니었냐해? 그 소우인지 소고인지 하는 놈이 뭐길래 니가 이렇게 쩔쩔매고 있냐해?”

“소고는 나거든.”

 

 오렌지 주스를 한 입 가득 쭉 빨아들였다. 아무래도 이 새끼는 순순히 내 앞에서 꺼질 생각이 없어보였다. 컵을 소리 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도 차이나의 두 눈은 나를 여전히 쏘아보고 있었다.

 

“…… 네놈은 더할 거잖아. 만약, 형씨나 안경이 사라진다면.”

 

 내 말을 듣고 차이나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고개를 조금 갸웃이고 있었다. 솔직히 그럴 만도 했다. 차이나가 형씨와 안경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는 건 솔직히 별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차이나로서도 이해하기 힘들 터였다.

 

“나라면 아마 찾아 나설 거다해.”

“…… 너,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막…”

“긴쨩도 신파치도 분명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된 걸 거다. 뭐라도 해서 다시 만날 거다해. 아마 둘 다 그걸 기다릴 거다해.”

 

 무언가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스우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생각만 해도 가슴 부근이 저릿해오는 걸 차이나에게 어떻게 납득시켜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곤도 씨나 히지카타를 통해 느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저릿함이었다. 좀 더 간지러웠고 좀 더 날카로웠다. 확실한 건 도에스인 나에게는 너무 쥐약이라는 점이었다. 아마 차이나도 나랑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면 저렇게 얘기할 수 없을 거라고 단언해서 말할 수 있었다. 문제는 20대 후반의 아저씨와 붙어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를 어떻게 이해시키느냐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해시키지 않도록 하려는 것뿐이었다.

 

“사디, 너 마치…”

“…….”

“그런 알 수 없는 녀석 하나 없을 뿐인데 다른 사람 같다해. 어른 같다해.”

 

 차이나의 말을 듣고는 조금 웃었다. 품에서 지갑을 꺼내 오렌지 주스 값을 꺼낸 뒤 테이블에 올렸다. 천천히 엉덩이를 들어 일어서며 말했다. 어른이거든, 너보단. 그대로 가게를 나섰다. 차이나는 나를 따라 고개를 돌릴 뿐 나를 따라오진 않았다.

 

 반나절 내내 카부키쵸를 떠돌았다. 은행에서 돈을 얼마 뽑은 뒤 격투기를 보러 갔다. 경기 결과는 전부 내 예상과는 반대로 흘러갔던 터라 별 재미가 없었다. 서점이나 DVD샵을 구경하다가 라쿠고의 오디오파일이 담긴 CD를 몇 개 샀다.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며 그걸 듣고 있으니 어느새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히지카타는 바쁜지 여전히 전화 한 통 없었다. 벤치 옆에 비스듬히 세워 뒀던 목검을 허리춤에 도로 차곤 카부키쵸 구석탱이의 허름한 술집에 들어갔다. 둔영의 내 방을 두 개 정도 붙여놓은 조그만 크기의 술집에 아저씨들이 드문드문 들어차 있었다. 나는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젊은 청년, 맥주로 줄까? 주인장이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물었다. 사케로요. 나는 대답했다. 술을 사케로 배워서 그런지 맥주는 배가 부르고 텁텁하기만 했다. 안주는? 주인장이 재차 물었다. 알아서 주세요. 다시금 대답했다.

둔영이 아닌 곳에서 술을 마시는 건 간만이었다. 우선은 그럴 필요성을 좀처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둔영은 사람이 많은 만큼 하루걸러 술판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나는 대원들 사이에서 얼굴이 잘 팔려 있으니 돌아다니다보면 한 잔씩 술을 권해지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았다. 돌이켜 말하자면 내가 먹고 싶을 때 적당히 아무 데나 끼어서 먹으면 된다 이거였다. 밖에서 먹는다한들 히지카타나 곤도 씨, 가끔은 마츠다이라 선생님과 함께였다. 특히 마츠다이라 선생님은 우리를 지나치게 고급진 술집에 데려가곤 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손을 움직여 술을 따라 마실 필요가 전혀 없는 곳이었다. 그런 데서 찔끔찔끔 마시다보면 허름한 술집에서 술을 마실 필요가 또 느껴지지 않았다.

안주로 먼저 나온 벳다라즈께를 몇 개 주워 먹고 있으니 주인장이 다찌에 도쿠리 두 개를 올려주었다. 하나는 서비스. 청년 잘생겼으니까. 눈을 조금 찡긋하며 말했다. 나는 도쿠리를 받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읊조렸다. 확실히 제복을 입고 있을 때와는 사람이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제복을 입고 있으면 아무도 나를 청년이라고 부르지도, 넉살좋게 웃으며 서비스를 주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꺼림칙해하는 눈빛으로 내가 자기네 살림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기를 바라고만 있었다.

도쿠리를 기울여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덜컥 들이키자 가슴 부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술을 들이키면 들이킬수록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마치 가슴에 누군가가 불을 지핀 것만 같았다. 매캐하게 들어찬 연기는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내 손가락 마디 사이사이로, 무릎으로, 정강이로, 뇌 속으로. 술을 먹은 후에 나는 나와 나의 몸 두 개의 별개의 것으로 분리된 듯했다. 정신은 마구 꿈틀거렸지만 몸이 둔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마시다보면 내가 정신이라고 여기는 건 더욱 또렷해졌다. 어쩌면 술에 취한다는 건 내가 제정신이 아닌 나를 나라고 더욱 착각하게 되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주인장이 서비스로 준 도쿠리까지 비우고 나니 숨이 달아올라 인중에 땀이 맺힐 지경이었다. 돈을 다찌에 놓고 의자에서 내려와 섰다. 바닥이 마치 쿠션이 깔려 있는 것처럼 푹신하게 느껴졌다. 걸을 때마다 덕분에 몇 번씩 발을 헛디딘 듯 몸이 비틀거렸다. 간신히 가게 미닫이문을 열고 닫았다. 어느새 날은 완전히 깜깜해진 채였다. 하늘 아래 캬바레나 호스트의 네온사인이 거리를 가득 밝히고 있었다. 아직 날이 넘어가지 않아서 그런지 진탕 취한 건 나뿐인 것처럼 보였다. 아, 젠장. 짧게 읊조리며 발을 옮기려 할 때였다.

 

“… 뭐야.”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내 손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홱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아저씨가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덩치가 어림잡아 곤도 씨 만큼은 될 것처럼 보였다. 힘도 그만큼이라면 술에 취한 나는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 터였다. 비틀거리는 정신을 다잡으며 목검의 손잡이를 살짝 쥐었다.

 

“한 잔 할래? 형이 살게.”

 

 촌뜨기가 들어도 구닥다리인 작업 멘트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자꾸만 술김이 뱃속에서부터 푹푹 올라와 뭐라고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질세라 내 손목을 쥔 남자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나는 자꾸만 목검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지금 상황에서 칼을 뽑아들었다간 뒤도 안 돌아보고 이 남자를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 적당히 해… 애인 있다고…”

 

 칼로 남자의 가슴팍을 뚫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르면서 겨우 내뱉은 말이 그거였다. 남자는 그게 뭐 어떻냐면서 아예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대로 끌려가 그 새끼에게 거의 껴안긴 꼴이 되었다. 몸을 비틀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남자의 손이 내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왔다. 애인 있다고, 이 새끼야. 내가 말했다.

 

“애인이 있는데 이 시간에 혼자서 술을 마셔? 외로운 거 아니야?”

“…… 아니야…….”

“너 같이 귀여운 애인을 바람맞히다니… 이 참에 형이랑.”

“지금 당장 주둥이를 다물지 않으면 그 주둥이부터 베어버릴 거야.”

 

 나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 목검을 들어 허리춤에서 조금 뺐다. 남자는 그제야 검의 존재를 눈치 챈 건지 나에게서 손을 떼고 몇 걸음 냅다 뒷걸음질쳤다. 검을 아주 뺐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도록 빠르게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휘둘렀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너 같은 잔챙이는 말이야…”

“… 히익.”

“내 애인의 다리 사이에 달린 검으로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어… 알아?”

 

 남자가 주저앉았다. 몸을 가득 웅크리고는 히익이니 힉, 하는 이상한 숨소리를 내며 떨고 있었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되도록 그 모습을 마음껏 구경하다가 죽여버리고 싶었다. 칼을 든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수백 번도 더 해 본 행동이었다. 이대로 오른손을 내리꽂아 남자의 왼쪽 가슴을 후벼 판다면 비명도 안 지르고 즉사할 터였다. 그런 건 재미가 없었다. 먼저 왼팔을 자르고, 남은 발을 자르고, 몸을 배배 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구경해주는 게 좋았다. 남자는 그새 레퍼토리를 바꿨는지 이를 덜덜 갈면서 이따금 살려달라고 내뱉었다. 그런 건 소용이 없었다. 나에겐 살인을 부추길 뿐이었다. 마침내 오른손을 내리려고 했을 때였다.

 

“소고!”

 

 걸걸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히지카타였다. 어떻게 된 건지 신센구미 순찰차가 남자와 내 옆에 정확히 와서 섰다. 곧장 조수석에서 히지카타가 튀어나와 내 오른손을 붙잡았다. 운전석에서 히지카타를 따라 내린 건 테츠였다. 그 커다랗고 반짝거리는 눈을 잔뜩 찡그린 채 나와 히지카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껏 떨고 있던 남자는 경찰을 보는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아예 뻗어 있었다. 기절한 듯했다.

테츠, 구급차. 히지카타가 테츠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테츠는 재빨리 남자에게 다가가 몇 번 흔들어보더니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나는 히지카타에게 잡혀 있던 오른손을 힘껏 뿌리쳤다. 히지카타 씨는 손에서 힘을 풀어 나를 놓아주었다. 히지카타를 똑바로 바라보며 서 있고 싶었지만 술에 진탕 취한 탓인지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자꾸만 비틀거리자 히지카타는 내 어깨를 붙잡아 바로 세웠다.

 

“… 진짜 죽고 싶어? 히지카타… 히지카타 이 자식아.”

“소고, 진정해. 신고가 들어왔었다. 저 놈한테 시달렸다면서.”

“왜 이렇게 늦게 오고 난린데.”

“일단 둔영으로 가서 얘기해. 뒷좌석에 타라.”

 

 히지카타는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남자에게로 가는 듯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오른손을 도로 들어 앞으로 쭉 뻗었다. 히지카타를 향해서였다. 검끝이 등에 닿기 직전에 히지카타는 아슬아슬 몸을 옆으로 뺐다.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졌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였다. 동시에 팔꿈치와 무릎이 저려오는 게 느껴왔다. 땅바닥에 쓸린 탓에 까진 듯했다. 내 모습을 보고 히지카타는 약간 한숨을 쉬더니 테츠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먼저 둔영으로 갈테니 남자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하라는 말 같았다. 그러곤 나에게로 다가와 내 어깨와 무릎 밑에 손을 넣곤 번쩍 들었다. 거의 뒷좌석에 던지듯이 태우곤 운전석에 올라탔다. 조금 어지러움을 견디는 사이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고, 너 진짜 왜 이러냐. 요로즈야한테서 얘기 들었어.”

“그럼 죽어.”

“꿈이라도 꿨냐.”

“… 꿈 아니야.”

 

 강한 어조로 말했다. 동시에 와이퍼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앞유리에 비가 몇 방울 후둑둑 떨어진 탓이었다. 빗방울은 점점 거세지더니 이내 비가 되었다. 그 소리가 머릿속을 탁탁 울려댔다.

 

“소고, 너 말이야.”

“…….”

“누구 하나 없단 이유로 이렇게 어린애 같아질 놈이었냐.”

 

 히지카타가 말했다. 목소리만으론 감정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 보였다. 문득 하카마의 팔꿈치와 무릎 부근이 눈에 들어왔다. 붉게 젖은 채 피부 위에 약하게 눌러 붙어 있었다. 그 위로 상처의 윤곽이 옅게 엿보였다. 상처란 그런 것이었다. 남의 피부는 검으로 숭덩숭덩 잘 썰어내리면서도 정작 내 피부와 살이 벌어진 자리는 너무나 크게 느껴지곤 했다.

 

“진짜…”

 

 조그맣게 말했다. 왠지 빗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백미러에 비친 히지카타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다.

 

“좋아했으니까요…….”

“…….”

“분명히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거든요…”

“…….”

“꿈이었어도… 좋아했거든요, 진짜…….”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이젠 알 수가 없었다. 듣고 있는 상대가 히지카타였다. 누님과 서로 좋아했지만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고 끝내 사별한 그 히지카타였다. 누나가 사경을 헤매던 그 순간에 나를 지켜주겠답시고 홀로 칼 한 자루 들고 적진으로 쳐들어간 그 히지카타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랬다. 내가 지금 앓고 있는 감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놈이었다.

차는 달렸다. 때론 덜컹거리기도 조금 달달거리기도 했다. 와이퍼가 유리창을 쓸며 좌우로 움직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빗소리는 침묵을 밑으로 자꾸만 꾹꾹 누르고 있었다. 술이 깨어가는 건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아팠다. 양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 좋아했으면…….”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지카타의 목소리였다. 놈도 빗소리에 묻힐 거라고 생각한 건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어라 말하고 있는지는 분명히 들렸다.

 

“된 거잖냐…….”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못 들은 척을 했다. 아니, 차라리 듣지 못했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 들릴 듯 말 듯 읊조린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는 통증보다도 커다랗게 다가왔다. 히지카타가 어떤 기억을 더듬고 있길래 저런 말을 하는 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니, 끝까지 헤아리지 못했으면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이유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위에서 아래로 추락해 내려와 부서지는 빗방울처럼. 그 빗방울 사이를 걸으면 나도 모르는 새에 몸이 홀딱 젖어 나의 모든 끄트머리에서부터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곤 하는 것처럼. 그럴 때마다 나는 비의 일부인지 빗소리의 일부인지 멍하게 가늠해보곤 하는 일처럼. 차는 빗속에서 포장되지 않은 골목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

 

 병원에서 연락이 온 건 병원에 언젠가 갔다 왔었다는 사실을 잊을 즈음이었다. 야마자키가 양이지사의 대규모 테러 움직임의 꼬리를 잡아온 게 불과 이틀 전이었다. 히지카타는 언제나 그랬지만 이번엔 더 비장했다. 제대로 막지 못하면 막부에 모가지가 날아가기 전에 양이지사들에게 모가지가 날아갈 거라고 말했다. 나는 히지카타의 뒤통수에 너는 나에게 모가지가 날아갈 거라며 바주카를 한 포 쐈다. 바주카를 옆으로 뛰어 겨우 피한 히지카타가 나에게 성난 소리를 쏟아내는 게 느껴졌다. 예전이었으면 조금 웃으면서 보고 있었을 그 모습을 나는 차 안에서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고속도로 가의 먼 산을 바라보듯이 보고 있었다. 팔꿈치와 무릎의 상처는 점점 아물어갔지만 너의 빈자리 하나가 통 아물지 않았다.

모든 건 평온했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마치 너는 원래부터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처럼 그랬다. 너는 원래부터 없는 사람이었던 건가, 아니면 이제부터 없는 사람인 건가.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인 건가, 이제부터 없어도 될 사람인 건가. 갓 처음 장을 펼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슬쩍 들춰보듯이 생각했다. 아침에 있었던 간부 회의에서는 1번대가 작전의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그 말인즉슨 작전이 성공하게 된다면 그건 거의 내 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열 명 정도 되는 1번대를 이끌고 적으로 가득 찬 여관 건물을 1층부터 5층까지 모두 뚫어야 했다. 1번대의 실력은 나를 빼고는 다른 번대의 수재들과 다를 게 없으니 결국 나를 믿고 가는 작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전이 쓰인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한자들 위에 히라가나를 끄적이다가 곧 그만두었다. 한자를 읽지 못해 늘 종이와 눈씨름을 하던 놈은 더 이상 곁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납득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님도 훌쩍 나를 떠나버렸고 이젠 너도 마찬가지였다. 작전을 조금 익힌 뒤에는 대장간으로 향했다. 돌입 전에 날을 미리 갈아두기 위함이었다. 대장간에 들어가 무라타에게 검을 건넸다. 무라타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 한참 들여다보더니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대장간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대장간에서 문득 한 켠에 놓인 쿠사나기와 사아야가 눈에 띄었다. 한땐 팔딱팔딱 잘 살아 움직이더니 이젠 진짜 평범한 검과 검집처럼 미동도 없었다. 무라타가 내 검을 도로 들고 대장간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계속 그 녀석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검을 맡긴 뒤 예비용 검을 받아 둔영으로 돌아갈 때쯤 전화를 받았다. 병원에서 온 것이었다.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상담실에 들어가자 일전 내 진단을 도왔던 정신과 의사가 앉아 있었다. 그날 찍었던 내 뇌 사진도 벽에 똑같이 붙어 있었다. 의사의 맞은편의 회전의자에 앉았다. 잘 지내셨나요? 기분은 어떠세요? 의사가 물었다. 좋진 않은데요. 내가 말했다. 의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떤 부분을 이해하고 있는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책상 위에 올라와 있던 종이 서류를 의사는 몇 번 들춰서 들여다보다 말았다 했다. 한참 장황하게 뭔가를 설명했지만 정확히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일전에 검사했던 신체 부위들을 하나하나 집어가면서 별 이상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뇌에도 별 이상이 없고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도 멀쩡하며, 맥박이나 혈액 같은 뇌 아랫부위도 정상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가능성은 하나이리라. 나도 모르게 내가 주먹을 살짝 쥐었을 때 살짝 뜸을 들이던 의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꿈이에요.”

“… 네?”

“그건 꿈이에요, 오키타 씨.”

 

 의사의 말에 나는 반문할 수밖에 없다. 상담실은 조용했고 의사의 말은 잡음 없이 아주 깨끗하게 들려왔는데도 그랬다. 내 되물음을 비웃듯이 의사는 다시 한 번 같은 내용을 웃으면서 답했다. 암만 생각해도 의사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믿기 힘든 말이었다. 내가 아는 한 의사들은 뜬구름을 잘 잡지 않았다. 돌입 후 부상자가 과도하게 많아 둔영으로 의사를 부를 때마다 본 의사들은 예외 없이 전부 그랬다. 철제 가방을 들고 부상자 사이를 쭉 돌다가 제일 먼저 가장 부상이 심해보이는 병사 옆에 앉았다. 철제 가방을 열면 의료 도구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주사기의 바늘이나 메스, 핀셋 같은 것으로 상처가 난 곳을 쑤셔댔다. 특히 천인의 의학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드문 나이 든 의사들은 더욱 그렇게 했다.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아프다고 절규하면 아픈 게 당연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사람을 죽이거나 고민하는 신센구미 대원들의 입에서 나오는 걸 좀처럼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오히려 대원들은 뜬구름을 잡기 십상이었다. 말하지 않으면 더 아플 것이라고. 포기하지 않으면 더 피가 날 것이라고. 더는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때로는 여기서 말한다면 네 신변만은 보장해주겠다는 비교적 희망찬 뜬구름일 때도 있었다. 하나 확실한 건 꿈이라느니 뭐니 하는 터무니없는 뜬구름은 그 멍청한 놈들조차 잘 말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있는데요.”

 

 힘을 주어 한 번 더 말했다. 적어도 의사가 나를 보며 실실 웃고 있는 것만이라도 어떻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의사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오른 손바닥이 위로 가게 팔을 들어 내 옆쪽을 슬쩍 가리켰다.

 

“옆을 보십시오. 그럼 알게 될 거예요.”

 

 의사를 빤히 보다가 의사의 손끝을 향해 눈을 돌렸다. 느닷없는 헛소리에 반응할 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전원이 꺼지기 직전 휴대폰에서 깜빡이는 텅 빈 배터리 마크가 된 느낌이었다. 이젠 어떻게 되든 죽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뿐만이 최선인 것 같았다.

 

“그쵸? 그렇대요.”

 

눈동자를 아주 움직여 의사의 손끝이 향하는 곳에 눈이 다다른 순간 나는 퍼뜩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침묵이 갑작스레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그건 그곳에서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도 아니었고 내가 급하게 몸을 뒤로 뺐기 때문도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아무도 없던 그 빈자리에 스우가 앉아 있었다. 흑발의 긴 듯 짧은 듯한 머리에 한쪽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푸름과 붉음이 섞인 눈으로 나를 지긋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항상 녀석의 왼쪽 뺨을 차지하고 있던 검지만한 흉터도 마지막으로 봤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제일 중요한 건 녀석이 웃고 있었다는 점이다. 앉은키로도 나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시선을 아래로 슬쩍 내려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키타 대장님.”

 

다른 사람이 함께 있는 곳에선 나에게 꼬박꼬박 경어를 쓰던 버릇조차 그대로였다. 녀석이 입고 있는 검은색 신센구미 간부 제복까지, 나에겐 수백 번도 더 보았던 풍경이었다. 그 낯익은 모습을 나는 너무나도 낯설게 보고 있었다. 도로 천천히 눈을 움직여 의사를 도로 바라보았다. 의사는 여전히 웃는 얼굴인 채였다. 나갈까요? 내 몸이 느릿하게 떨려오는 걸 알았는지 스우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줄곧 보고 있었으면서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럴 뿐 내가 아무 대답도 없자 스우는 다시금 물었다. 둔영으로 돌아갈까요? 나는 그제야 숫자를 가리키는 시침처럼 시선을 움직여 녀석의 두 눈동자를 보았다. 미끄러운 시선이었다. 눈가가 간질거려서 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녀석도 마찬가지인지 먼저 슬쩍 눈을 피하는 게 보였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가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상담실을 나서며 말했다.

돈을 지불하고 거리를 걸어 카부키쵸로 들어온 내내 녀석은 줄곧 보이지 않았다. 그저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아주 규칙적이고 빠르게 나를 후다닥 따라오는 발소리가. 슬쩍 손을 뒤로 뻗었다. 그러자 그 위로 온기가 감겼다. 촉촉하고 말랑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가만히 발걸음을 멈췄다. 온기는 점점 커지더니 내 어깨부터 아래로 뻗어 온 등을 감쌌다. 숨소리가 들렸다. 스우의 체취가 약하게 섞여 있었다. 약간 상쾌하면서도 눅눅한 향기. 나는 곤도 씨의 도장에서 그 체취를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도장에서는 고개를 돌리면 늘 보이곤 했던 곤도 씨가 그날따라 통 보이지 않았다. 사범님께 물어보니 도장의 별채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는 답이 들려왔다. 한달음에 달려가 별채의 문을 열었고 제일 먼저 공기가 탁한 게 느껴졌다. 방 안에 지나치게 히터 바람이 가득했다. 가만 서 있기만 해도 턱턱 목이 말라올 정도였다. 곤도 씨는 그 가운데서 처음 보는 사람의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주다가 내가 문을 열자 바로 고개를 돌린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와 다를 것 없이 따듯한 눈빛이었다. 곤도 씨, 여기서 뭐 해요? 내가 천진한 목소리로 물으며 다가갔다.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어 앉아 곤도 씨는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두꺼운 솜이불 사이에 누워 있는 건 나보다 겨우 몇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남자애였다. 지나치게 창백한 피부와 아문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뺨의 붉은 흉터가 눈에 띄었다. 누구예요? 내가 다시 물었다. 곤도 씨는 모르겠지만 길에 쓰러져 있어서 데려왔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물을 갈아오겠다며 머리맡의 물통을 들고 방을 나선 터였다. 방이 조용해지자 이번엔 희미한 향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느낌의 향기였다. 조금 달달하기도 해 입에 침이 고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남자애의 옆에 검이 놓여 있다는 걸 눈치 챘다. 도장에 이따금 장식되어 있는 검들과 비교해서 한참 초라하고 낡아 보였다. 검에도 유행이라는 게 있었다. 어린 나이 또래의 사무라이들이 이런 철 지난 칼을 휘두르는 일은 흔치 않았다. 나도 모르게 검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하자마자 남자애가 미간을 약간 찡그리더니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색이 섞인 오묘한 빛깔의 커다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어린 나의 시선으로 너무 예뻐 눈을 뗄 수조차 없었다. 마치 그 눈동자가 길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거였다면 곧장 주워 누님이나 곤도 씨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혼자 꼭 갖고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그 눈동자를 보는 일이 괜히 좋았다. 별채에서 그 녀석과 함께 있을 때면 이 세상에서 온전한 내 것이라는 게 생긴 느낌이었다. 녀석의 존재는 히지카타의 손에도 닿지 않았고 누님의 손에도 닿지 않았다. 하물며 곤도 씨처럼 모두의 것도 아니었다. 내가 녀석을 자주 찾아간다는 걸 알자마자 곤도 씨는 나에게 녀석의 간호를 맡겼다. 길거리에서 떠돈 시간이 길어 충분히 먹고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오래 연명하기가 힘든 상태라고 했다. 옆에 앉아 이야기동무를 해 주고 시간이 되면 산책을 시켰다. 그러다 방에 돌아와 밥을 먹고 이따금은 함께 잤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녀석과 단둘이 함께 했던 그 순간이 이젠 처음 보았던 녀석의 눈동자 같은 게 되어 있었다. 나는 기꺼이 주워서 품에 안고 모든 걸 나만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스우의 목소리가 귀에 감겼다. 말이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처럼 귀 옆에서 꿈틀거렸다. 마치 그 말을 껴안으라면 껴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 않았다. 훨씬 따듯한 것이 옆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스우도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녀석의 팔이 서서히 내 허리에 감겼다. 한낮의 카부키쵸에 녀석의 향기가 자욱했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멈춰 있는 건 우리밖에 없었다. 이 거리에서 우리가 가장 눈에 띌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가장 띄지 않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녀석의 팔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나는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 사이에서 가장 느린 속도로 녀석에게로 느릿하게 끌려가고 있었다.

 

“나는 너의 꿈이야.”

 

 나는 천천히 몸에서 힘을 뺐다. 녀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스우의 얼굴이 마침내 보였다. 오른손을 들어 뺨에 난 흉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스우는 약간 몸을 떨더니 자신도 오른손을 들어 내 입술을 엄지로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약간 따끔했다. 나는 그제야 내 입술이 조금 까질락 말락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서 콱 죽어버리지 그랬냐. 내가 말했다. 웃지 않으려 했지만 조금 웃음이 배어나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널 두고 어디 가서 죽게. 또 스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면. 나는 한낮의 더위처럼 몽롱하게 생각했다. 너는 꿈이었다. 동시에 거짓말도 아니었다. 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입술이 맞닿았다. 모든 게 멈춰버리면 좋을 일이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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