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빛바랜 노트의 첫 문장이었다. 오래되고 닳아서 없어질 법한 감정임에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의 글씨체가 다시금 마음을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한때는 평생을 함께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하게 된 지,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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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 괜찮아..?”
“..미도리야, 무..물론 괜찮지.! 결혼, 다시 한번 축하해.”
5년전, 미도리야는 조심스럽게 시오를 자신의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던 쇼토의 얼굴은 기억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놀랄 정도로 애정이 가득한 얼굴.
분명 누가 봐도, 서로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게 보였던 커플이었고, 가끔 다퉜을 땐, 자신은 연애에 서툴러서 시오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며, 업무가 끝난 뒤에는 술 한 잔씩 기울이며 조언까지 구할 정도로, 쇼토는 그녀에게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먼저 청첩장을 돌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 미도리야였다.
‘이렇게..재회하게 한게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어떤 식으로 헤어졌는지는 통 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이 아직까지도 서로를 사랑하는 건 알 수 있었다. 매번 서로의 술자리에 어울려 주게되면, 마지막엔 서로의 이름을 웅얼거리면서 쓰러져 버리는 그들이 그냥 긴 휴식과 싸움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에, 미도리야는 비장의 카드를 들이밀었었다.
그의 계획대로, 명색이 친구의 결혼식이라 두 사람 다 빼지 않고 참석은 해줬으니, 이제 나머지는 전적으로 그들의 몫이었다.
‘신혼에도 너희의 푸념을 들어주기엔 지치기도 하고 말이야, 하하.’
그렇게 생각한 미도리야는 웃으며, 자신을 기다리는 신부에게 가보겠다며, 당황해하는 두 사람을 홀에 덩그러니 놔두고 발길을 옮겼다.
“..잘 지냈어..?”
“응, 너는..?”
“...괜찮았어.”
“그래..?”
시오는 아무리 미도리야지만, 역시나 쇼토가 참석할 줄 알았다면, 오지 말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2년이나 지났다면 괜찮을 법할 텐데도,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그의 발소리조차 구별이 가버린다니, 아직도 그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생각에 착잡해졌다.
자신도 어서 당당하게 괜찮다고 말해야 할 텐데, 괜히 그가 괜찮았다는 말에 괜히 서러워졌다. 주먹을 꽉 쥐고서 눈물을 참는 잠깐의 찰나. 그와 자신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이건...이건 위험해.’
잠시의 정적도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는 사이.
그것이 지금 우리의 거리이고 선이니까. 손바닥에 찬 땀을 원피스에 슬쩍 문지르고 난 시오는 서둘러 “잘살아.”라는 인사를 남기고서 몸을 돌렸지만, 그 순간 자신의 앞길을 막으며, “이것만이라도…. 읽어줘.”라며 빛바랜 노트를 자신에게 들이미는 쇼토 때문에 얼떨결에 받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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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이 너무 궁금했었지만, 동시에 무슨 말을 적어 내려갔을지 모를 불안감에 사흘간은 그저, 책상 위에만 올려놓고 늦은 시간까지 잔업들을 일부러 도맡아 야근을 해왔지만, 주말까지 추가 근무를 하기엔, 기획팀에서 항의가 들어오기 시작했기에, 시오는 사흘이나 되는 휴가를 되려 받아버리고 만 것이다.
‘아이고...삭신이 쑤시네, 역시 야근은 미친짓이야..’
시오는 10시라는 늦은 시간까지 푹 자고 일어나서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선, 간단한 토스트를 굽고 우유를 내어 아침을 해결했다.
그러고 나서, 제법 먼지가 앉기 시작한 작은 원룸을 정리했다.
결코, 쇼토가 준 노트를 열어보기가 두려워서만은 아니라, 그간 일만 하느라 쌓인 먼지와 함께,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 화분들에 광합성을 시켜줘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이렇게 적는 것은..내가 말주변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네가 곧 돌아올 것만 같았어. 그래서 기다려왔던 순간들이 얼마나 바보같았는지를 깨달아서야.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첫장에는 붙어있는 쪽지의 글을 읽은 시오는 노트를 접어버렸다.
‘분명….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지…?’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쇼토의 일이 많아지고 시오가 분명 지쳐서 홀로 잠들며 울고불고했던 기억들이 많이 나던 날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히어로의 엔터테인먼트 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찍게 된 쇼토의 광고와 연이은 회식들이 끝나고서 돌아온 그의 셔츠 깃에 여자들의 붉은 루즈를 묻어있던 것.
그것으로 자신의 불안함과 서운함이 극에 달했었지.
결국, 그간 뭉쳐왔던 감정들이 터지면서, 그를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버릴 정도로 관계에 대한 자신이 없어졌다.
욱신,
지금 생각해도 미련하게 쇼토만을 바라보며 사랑을 하고, 주는 만큼 사랑받길 바랐던 말도 안 되는 꿈들을 꾼 지난날의 자신이 안타까웠다.
‘물론,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처음이라서 그랬던 것도 있겠지...’
그러나, 그는 어땠나? 결국, 그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때리며 울고 소리치며, 집을 나서는 시오를 잡지 않았다.
매일 써왔던 일기장들을 오래간만에 꺼내 보니 뜨거웠던 만큼, 바보스러운 생각들도 많이 했던 자신을.
펄럭,
보고싶어, 시오.
잘 지내고 있는 거야..? 미도리야는 네가...열심히 잘살고 있다고 했어.
작품들 잘 보고 있어.
당분간 휴가를 받았어.
이 집에, 홀로 있어 보니까, 내가 놓쳤던 것들이 보이는 것 같아.
내가 서툴러서 미안해.
.
.
.
벌써 2년째야.
길 가다가 네가 만든 것들이 보이면, 신기하기도 해.
나도, 제법 열심히 해서, 지금은 사이드킥들도 있고, 많은 사람을 구했어.
물론, 네가 싫어하는 광고들도 종종 찍고 있지만, 오해할만한 상황들은 절대 만들지 않고 있어.
처음엔, 네가 그렇게 힘들어 하는데, 나를 떠나는게 오히려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래서 난 널 잡을 수 없던 거였고, 하지만,..생각보다 내가 욕심이 컸나봐, 나는 네가 없는 하루가, 나의 일상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아.
그러니까, 조금 더 용기를 내볼게, 나를 아직 사랑한다면,
다시 내 손을 잡아줄래..?
한 장, 한 장,
결국, 노트를 끝까지 읽던 시오는 엉엉 울어서 엉망이 되고, 퉁퉁 부어오른 눈덩이에 얼음주머니를 가져와 대고 있어야 했다.
풋풋하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날부터 시작해서 “적어보자!”라고 함께 만들었던 커플 일기의 연장선이었다.
두 사람,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로를 상처 주며 끝낸 후로도, 계속 노트에 소리쳐왔던 본심들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좀 더 나도 감정에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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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도 결국, 쇼토에 대한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매번 일기장에만 간간이 적어왔던 보고 싶다는 말과, 너에게 더 솔직한 말을 많이 나누지 못해서 미안했다는 말을 쇼토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용기를 받아 자신도 용기 내고 싶어서, 무작정 그의 번호로 지금 가겠다고 오후 느지막이 문자를 보냈었다.
「 그럼, 저녁 같이 먹자. 미안하지만, 장 부탁해도 괜찮아? 시오가 먹고 싶은 거로 같이 먹고 싶어. 물론, 요리는 도울게. 」
그의 전화번호는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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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 시오. 뭐 사왔어?”
“....어, 그..냉소바랑, 새우튀김 할 거...”
“..너 먹고 싶은 거 사 오라니까, 이리 줘, 무겁잖아.”
살며시 웃으며, 문을 살짝 잡으며 들어오라는 쇼토의 모습에, 시오는 장바구니의 손잡이를 순순히 그에게 넘겼다. 마치, 우리가 헤어진 시간이 언제였냐는 듯한 태도였지만, 그의 얼굴은 조금 수척했다.
‘..괜찮았기는..바보’
결국, 그를 따라 들어선 집의 구조나 인테리어들, 전부 2년 전과 바뀐 것 하나 없었다. 자신이 머물렀던 작업실마저도 그대로인 모습에, 괜히 울컥해진 시오는 앞치마를 매며 매듭을 엉성하게 묶는 쇼토의 뒤로 가서 꽉꽉 매듭을 묶어줬다.
“..시오?”
“바보들이야..진짜”
“그럴지도, 조금 더 빨리 용기낼 걸. 많이 늦어서 미안해.”
“....나도”
“사랑해.”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어..”
“어리광쟁이.”
“익..! ..그래서 싫어..?”
“무척 좋아.”
“...우읏.! 그..나..나두!”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시오는 쇼토의 허리에 두 팔을 감아 꼬옥 끌어안았다. 2년분의 포옹을 한꺼번에 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시오의 팔힘에 살며시 웃으며 “시오, 힘 길렀어? 좋네, 이런 포옹.” 마주 포옹을 해주는 것은 쇼토의 몫이었다.
밤은 길었고, 함께 차린 저녁 식탁에는 2년 만에 연인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밥그릇이 비워진 후에도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