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말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그 문장에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신뢰가 담겨있다. 6년의 우정. 4년의 동거.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만큼이나 익숙한 타이가의 존재.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습관이나 표정 같은 것들. 함께 공유한 시간. 우리의 체향은 닮아있었고 그것이 곧 두터운 신뢰의 증거였다.
나는 타이가를 믿는다기보다는 믿음 그 자체로 여겼다. 처음으로 눈을 뜬 아기가 눈앞에 낯선 사람을 부모로 믿는 것처럼 맹목적인 종류의 믿음이었다. 나에게 있어 타이가는 무해한 사람이었고 그 믿음은 대다수 사람이 지구가 둥글고 우주는 무한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상식에 가까웠다. 그런 감정은 흔하지 않았다. 흔하지 않았기에 소중하고 소중했기에 나는 언제까지고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 정도는 누릴만한 욕심이라고 믿었다. 이십 년 조금 넘게 살면서 개인에게 주어진 몫이 한정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과한 욕심은 길거리 한복판에서 터진 이삿짐 상자처럼 곤란했다. 선천적인 건지 뭔지 다행히도 나는 그릇이 작은 사람이고 나의 분수를 알았다. 나는 살면서 사소하지만 단단하고 확실한 것만 긁어모아 상자에 담았다. 혹시라도 상자가 터져버릴까 무서웠다. 쏟아버린 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될까 두려웠다. 상자 안의 것들은 나의 일부분이자 약점이다.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만 하나라도 잃게 된다면 나를 오래도록 괴롭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대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타이가도 있었다. 문장이 가진 고유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 타이가의 단순함이 있다. 타이가가 밥을 먹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상대방이 밥을 먹었는지 궁금하기에 묻는 말이었다. 타이가의 ‘안녕’은 ‘안녕’이고 ‘고마워’는 ’고마워‘다. 복잡할 것 없는 단순함이 편했고 말주변 없는 덤덤함에 안심이 됐다.
종종 미래를 생각할 때면 타이가는 항상 내 주변에서 지금과 별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존재했다. 언제나처럼 함께 스모어를 만들어 먹고 입술에 붙은 마시멜로를 보며 비웃다가 소파에 파묻혀 몇 년 전 영화를 보는 일상이 현실과 미래 사이에 끼어있다. 조금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언젠가 초대받게 될 타이가의 결혼식에서 입을 옷까지 생각해 두었다. 무엇이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나는 무슨 자신감으로 타이가에게 확신을 가졌을까.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그릴 타이가와의 미래가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로 끝나게 될 거라는 예감이 슬플 뿐이었고 그렇게 만든 당사자가 타이가라는 사실에 약간의 원망과 그보다는 큰 배신감을 느낄 뿐이었다. 일그러진 계획도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관계도 전부 타이가의 붉어진 얼굴로부터 시작된 혼란이었다. 나는 감이 꽤 좋은 편이지만 절대 추측을 진실로 확정 짓지 않았다. 오해는 관계를 망치지 딱 좋은 매개체이며 내게 확신이란 외국어로 이루어진 책처럼 어렵기만 한 것이다. 그런 내가 확신을 가진다. 고작 손가락이 얼굴에 닿은 것 정도로 내비쳐지는 명백한 감정이었다. 카가미 타이가는 나를 좋아한다. 6년의 우정. 4년의 동거. 집 안 가득 깔린 익숙한 믿음. 그 모든 것들을 배신하고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거짓말을 시작해버렸다. 태양과 마주한 타이가의 얼굴이 환했다. 낯선 타이가의 표정에 짜증이 났다. 불그스름한 뺨이 단지 더위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타이가의 어설픈 거짓말에 아무 생각 없이 속아주고 싶었다. 어린아이처럼 억지라도 부리고 싶었다. 힘껏 땅을 구르며 그딴 표정 짓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너 꼭 삶은 토마토 같다.”
하지만 이런 쿰쿰하고 그늘진 마음은 나만의 몫이다.
“어?”
“많이 덥나 보네. 빨리 집이나 가자.”
장난과 웃음이 우리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기류를 없애주었다. 스스로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미소를 지은 채 타이가에게 등을 돌렸다. 햇빛이 눈앞에 펼쳐졌다. 따듯하기보다는 따가웠고 애초에 이런 찬란함은 원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빛의 덩어리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표정을 굳히고 미간을 찌푸렸다. 눈이 부시다는 변명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야말로 괜찮냐. 표정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힘들어서 그래. 오늘 바빴거든. 집에 가자마자 에어컨 틀어야지.”
“가방 들어줄까?”
“뭐?”
“너 힘들다며. 줘, 가방.”
바람이 타이가의 머리칼을 스치고 마침내 나에게 도달했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눈동자에 타이가의 손가락이 맺혔다. 얽혀있는 두 쌍의 손을 상상해 본다. 서로의 목을 더듬거리며 키스를 한다. 호흡을 공유한다. 이마를 맞대고 천국과 닮은 웃음을 터트린다. 우리는 어쩌면 행복할 것이고 필시 끝을 맞이할 것이다. 타이가를 잃는다. 함께 했던 모든 날이 과거로 남는다. 나는 땅바닥에 이마를 처박고 후회한다. 타이가의 손을 잡았던 것을. 애초에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것을. 타이가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타이가는 곁에 없다. 비참해진다.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영원과도 같았다.
“아 됐어. 그런 건 나중에 나 말고 애인한테나 해줘.”
나 말고. 입술에 힘을 주고 강하게 내뱉었다. 날카로운 이빨에 이리저리 씹힌 문장이 타이가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덤덤한 척 타이가를 지나쳤다. 뒤에 남겨진 타이가의 표정이 어떤지는 이왕이면 평생 알고 싶지 않았다. 타이가는 변화를 원한다. 나를 보는 눈동자는 지긋지긋했던 캘리포니아의 무더위와 닮아있었다. 숨길 수 없는 커다란 열망. 자기 자신도 버거워 보이는 열기.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날 것의 애정.
나는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묵살한다.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다. 오갈 데 없는 감정은 공중을 부유하다 타이가의 목을 조일 것이고 숨이 막혀올 때 비로소 카가미 타이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필요했던 것은 이런 감정이 아니었음을. 적나라하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고개를 숙이며 기도하듯 되뇐다. 내가 타이가의 첫 번째 포기가 되기를. 몇 년이 걸리더라도 다시 돌아오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