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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아직은 말이다. 완전무결하게 거짓이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월화는 벌써 중혁에게 몇 번의 거짓말을 했다. 이는 중혁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무리했냐는 물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다고 답했으며 식사했냐는 말에 먹었다고 받아넘겼다. 다치면 다치지 않았다고 숨기기 급급했고 어렵사리 구해온 선물을 가다가 생각나서 사 왔다고 둘러댔다. 거짓말이라기엔 부끄러우리만큼 사소하나 신뢰를 약속한 둘에겐 이게 최선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월화와 중혁은 배신에 냉정하다. 이게 아닌 사람은 없겠지마는 그들에겐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영역이다. 둘은 많은 이에게 배신을 당했다. 믿었던 이의 배신으로 목숨을 위협받고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 감정은 깎이고 깎여서 날카롭게 변해 다가오는 이들에게 뾰족한 날을 내밀었다. 결국 아무도 그들의 곁에 다가가지 않게 됐다. 둘 역시도 믿을 수 없단 이유로 타인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둘은 한 가지 큰 약속을 했다. 이는 절대로 넘어선 안 될 신성불가침한 계약이다.

 

‘서로를 속이는 일은 없도록 하죠.’

 

이리 말하는 월화는 단호했다. 시종일관 방관자를 자처하는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던지라 중혁은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충동적으로 동행을 결정한 후회가 올라오기도 전에 그 한마디가 기폭제가 돼 둘의 관계성을 정립했다. 중혁은 끄덕이며 승낙했다. 너와 나 사이엔 거짓은 없노라고.

 

 

[1]

 

 

지구에 온 지 2년이 흘렀다. 즉, 김독자가 73번째 마계와 함께 사멸한 지 2년이 됐다는 말이다. 그간 그녀의 생활은 많이 변했다. 외적으로는 이리저리 방황하기만 했던 삶이 한자리에 정착했기 때문이고, 내적으로는 김독자의 희생에서 과거의 동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영원히 목적도 없이 무력하게 살아갈 필요는 없다. 스타스트림의 멸망이라는 확고한 목표에 더 칼을 휘두르고 수련을 해 천천히 격을 쌓았다. 더는 흔들려서는 안 된다.

 

지난날의 상처가 아물었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다. 여전히 악몽에 뒤척이고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살아갈 목표가 생겼다는 건, 그리고 함께할 사람들이 존재하게 됐다는 건, 큰 변화였다.

 

홀로 공단에서 수련하고 있던 월화의 손이 느려졌다. 허공을 가르던 칼날이 천천히 속도를 잃더니 이내 칼끝이 바닥에 닿았다.

 

월화와 유중혁은 연인이다.

 

믿기지 않는 문장이나 진실이다. 찔러도 피가 안 나올 것 같다는 패왕과 사귀는 사이가 되다니 아직도 얼떨떨하다. 지금껏 누군가를 연애의 대상으로서 사랑해본 적 없다. 동시에 자신이 누군가에게 성애나 연애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마음이라 여긴 그녀는 거창하게 분위기를 잡는 것 없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고백했다. 물 흐르듯이 말이다. 어떠한 정보도 의미도 없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 문장의 가치가 떨어져 감정 역시 그리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중혁은 예상을 깨고 그녀의 고백에 응했다. 

 

사귀게 되었다고 극적으로 바뀐 건 없었다. 둘 다 요란스럽게 구는 걸 싫어하는 성격도 있거니와 멸망하는 세계에서 정상적인 연애를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서 연인으로 된 것의 차이는 상당했다. 텅 빈 마음속이 유중혁이란 존재로 차올라 포만감마저 들었다.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새롭게 관계가 정의된 이후로 중혁은 은근 월화를 챙겨주었다. 쉬고 있는 그녀의 곁에 다가와 물을 건네거나 어깨가 아파서 두드리고 있으면 안마를 해주곤 하였다. 조용히 다가오는 다정함이 견디기 힘들 만큼 좋았다.

 

[성좌, ‘간교한 지배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갑작스러운 메시지다. 처음 보는 성좌. 도대체 뭐지? 월화는 실력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초월좌다. 왜냐고 묻는다면 첫 번째론 눈에 띄길 싫어하는 성정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운이 안 좋아 항상 평가절하 당했기 때문이다.

 

[성좌, ‘간교한 지배자’가 당신과의 대화를 바랍니다.]

 

동안의 일생이 말해주건대 자신에게 이유 없이 관심을 보인 성좌는 백 퍼센트의 확률로 저를 곤경에 빠트리려는 작자다.

 

고민하던 월화가 씨익 웃었다. 못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2]

 

 

중혁의 검은 눈이 한 여자를 쫓는다. 벤치에 앉은 그녀는 자신의 애검을 손질하던 중이었다. 시선을 눈치 채곤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러곤 살포시 미소를 짓곤 다시 검을 닦는 데 집중한다. 

 

이상할 것 없는 광경인데 어째서 이토록 불안한 것인가. 그의 동물적인 감각이 빨간불을 내며 위험신호를 보내는데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고민이 있다면 말해라.”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멈춘다. 월화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야, 갑자기 남자친구 행세라도 하려는 거야?”

“행세가 아니라 네 남자친구가 맞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며 월화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침에 먹은 음식이 잘못된 걸까.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어색해 죽을 것 같거든?”

“말 돌리지 마라.”

“없어.”

 

이번엔 중혁의 얼굴이 구겨졌다. 불만이 가득한 눈초리에 월화가 미소를 지으며 걱정할 것은 없다며 주장했다.

 

“질문의 이유를 모르겠지만 난 지금 즐거워.”

“무엇이 즐겁다는 건가.”

“정말 아침 잘못 먹었어?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즐겁다는 데에 원인이 필요하나? 이유가 없으면 즐거워해서는 안 돼?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점차 언성이 커지자 중혁은 묻는 걸 그만할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요령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분이 상하지 않는 방향으로 말을 돌려 물을 수 있을 터이지만 중혁은 대화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과묵한 편이며 꼭 알아야 할 정보가 있을 경우엔 고문과 협박을 적극 활용하는 행동파다. 그러니 언어로 상대를 달래서 속마음을 꺼내는 고급기술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특히나 월화는 속마음을 감추는데 익숙한 사람이니 사실상 불가능이다.

 

“화내서 미안해. 고민은 없으니 괜한 걱정하지 마.”

 

그의 입술은 꾹 닫힌 채이다.

 

“…왜 계속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목소리가 떨리자 중혁은 미안했다며 짧게 사과했다. 그녀는 자신을 캐묻는 물음을 싫어했고 특히나 본심을 알아가려는 질문은 극도로 꺼렸다. 이걸 알면서도 꼬치꼬치 캐물었다는 건 암묵적으로 약속했던 선을 넘긴 거다.

 

미안한 마음에 곁에 다가가 손을 쥐었다. 잿빛 동공이 미묘하게 떨린다. 최근에 안 사실인데 그녀는 손을 잡아주는 걸 좋아했다.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자 망설이곤 마주 잡아준다. 처음에는 힘없이 쥐고만 있더니 어느새 들어간 손의 힘은 월화 쪽이 더 커졌다.

 

힘을 과하게 주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떨림이 느껴진다.

 

 

[3]

 

 

불안은 양분을 야금야금 먹고 점차 자라났다. 홀로 벤치에 앉은 중혁은 빈 옆자리가 허전했다. 평소라면 월화가 앉아 묵묵히 어깨에 기대거나 재잘재잘 말을 했을 터이다. 빈자리를 태울 듯이 노려보던 그의 시야 한구석에 저의 손목이 보였다. 장신구라면 일절 착용하지 않는 유중혁이 유일하게 두른 팔찌는 거추장스럽기보다는 착용자의 취향에 맞게 수수하다. 파란색, 하얀색, 검은색의 실이 규칙적으로 엮인 그것은 조금만 힘을 줘도 뚝 끊길 듯하다. 다행히 여유 있게 묶어준 덕분에 활동하는데 불편하진 않다. 눈에 닿을 때마다 어색하다는 점을 빼곤 말이다.

 

소원팔찌라고 했나. 이지혜와 며칠 함께 다니고는 이상한 걸 배워왔다. 최근 서울에서 유행이라는데 그로선 어이없을 따름이었다. 고작 저런 실이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을 리가 없다. 나약한 생각이다.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일순 과거 그녀가 했던 말이 재생됐다. 자신이 이리 쉽게 속마음을 들키는 사람이었던가. 월화는 떨떠름한 중혁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곤.

 

‘네 생각이야 뻔하지. 하지만 유중혁, 때로는 이런 것에 의지하고 싶은 거야. 고작 이런 실 따위가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라고 속삭였다. 손목에 팔찌를 채워주려 했지만, 중혁은 내키지 않아 피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럼 이현성에게 주겠다며 등을 돌렸다. 등을 보이기 무섭게 그는 월화를 막아 세우고 손목을 내밀었다. 일련의 과정은 자동반사적이었던 지라 저의 손목에 팔찌가 채워지고 있는 와중에도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네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이번 회차에서 중혁이 연인으로 택한 월화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더니 아무도 모르게 친절을 베푼다. 강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안에 거대한 슬픔을 숨기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잡힐 듯 말 듯 어렴풋하다. 곁에 있음에도 존재가 희미하여 손에 꽉 쥐고만 있어야 그녀의 실체를 감지할 수 있었다.

 

도대체 월화는 무엇을 사고하는 것인가.

 

그날은 확실히 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무던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녀 아니었는가. 누가 자신을 조롱해도 무시하고 제 할 일하던 그녀다. 웃음도 분노도 슬픔도 즐거움도 필사적으로 숨기는 월화가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필히 대화의 주제가 불편했다는 증거이며, 그런 감정을 느낄만한 주제는 한 가지밖에 없다.

 

바로 자신의 과거에 관한 것. 정확히는 그녀의 고향이자 지금은 멸망한 행성을 떠올릴 때 견딜 수 없어 한다. 유일한 약점이자 역린이다. 

 

이토록 불안한 건 과거 중혁이 연인을 잃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신 잃고 싶진 않다. 회귀를 거치고 숱한 절망을 겪는다고 강해지는 건 아니다. 자신은 아직 괜찮다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세뇌하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해결되는 건 무엇 하나 없으며 절망이 차곡차곡 쌓여 터질 때를 기다리며 내부에 도사린다.

 

월화. 도대체 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진다.

 

“혼자 궁상떨고 뭐해.”

 

벤치에 앉은 중혁을 향해 월화가 다가왔다. 한쪽 팔엔 비에 젖은 레인코트가 걸려있다. 참고로 현재 서울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다.

 

“사색이라도 즐기시나?”

 

다섯 걸음 뒤에서 멈추곤 여유롭게 팔짱을 낀다. 기둥에 머리를 가볍게 댄 모습은 꽤 불량하게 보였다.

 

낯설었다. 지난 2년이란 시간 동안 매일 함께한 동료이자 연인인데도 오늘은 그녀가 낯설다. 자리에서 일어선 중혁은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호응하듯 월화가 뒤로 물러서자 그는 빠르게 손을 낚아챘다. 때아니게 부는 바람에 혈의 향이 실린다.

 

“어딜 다녀오는 건가.”

“가볍게 외출.”

“서울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서울만 비가 안 내렸지 전국이 맑았다는 건 아니잖아.”

“오늘은 전국적으로 맑았더군.”

 

손을 뿌리쳤다. 몸을 뒤로 빼자 레인코트에서 물방울이 튕겨 나와 중혁의 옷자락을 적신다.

 

“피 냄새가 난다.”

“근처에 괴수종이 있어서 처리하고 왔어.”

“인간의 피 냄새로군.”

 

고작 괴수종을 몇 마리 잡았다고 이리 독한 향이 나지 않는다. 숨긴다고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모양이지만 피의 향이라는 건 죽은 자의 한이 담긴 것이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집요해졌네. 확실히 말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

“허튼짓은 하지 마라.”

“말이 안 통하네.”

 

둘 사이에서 긴장감이 흘렀다.

 

“네가 내 행동을 통제할 권리는 없어.”

 

대답에 중혁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 말은 지금 허튼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겠군.”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뒷걸음친다. 살피듯 그의 얼굴을 훑고는 숨기기엔 이미 늦었다고 판단을 내렸다.

 

“너희에겐 피해가지 않을 거야. 신경 쓰지 마.”

 

차갑게 날이 서린 말과 함께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다시 홀로 남은 중혁은 빈자리를 멀거니 응시했다.

 

 

[4]

 

 

그의 옆자리는 오늘도 비어있다. 줄곧 혼자였는데 어느 새부턴가 홀로 있는 게 어색하다. 도대체 언제 이리도 나약해진 것인가. 어쩌면 그날 재앙이었던 그녀를 죽이지 않았던 것부터가 실책이었을 지도 모른다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부질없는 짓이라며 그만두었다. 

 

주변을 수소문하였지만 그녀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다. 월화는 이전부터 가끔 주변을 산책하고 다녔기에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여기고만 있다. 이상함을 느낀 건 유중혁 혼자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며 칼을 휘둘렀다. 정신적인 고통을 육체적인 고통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전신의 근육이 고통에 울부짖고 뼈 마디마디가 아리면 번잡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을까.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다급하게 부릅니다.]

 

올려본 하늘에 별 하나가 그를 향해 빛을 내고 있었다.

 

“뭐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월화가 위험하다고 전합니다.]

 

저 성좌와 월화가 은근 죽이 잘 맞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수영과 급속도로 친해진 월화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된 모양이지만. 중혁은 쥐고 있던 흑천마도를 치켜들었다.

 

“월화는 어디에 있지? 당장 말해라.”

 

 

[5]

 

 

월화의 인생은 죽음의 연속이었다. 이른 나이에 그녀가 죽음을 이해하게 된 건 고향이 내전이었기 때문이요, 동시에 어려서부터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자면 행성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검을 업으로 살아간 것도 한몫한다. 반복되는 생명의 사멸을 목도하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다 부질없지.”

 

부모를 잃고 전쟁터를 누볐던 시절 브라운관을 통해 본 어느 권세가 아이를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굶주림과 죽음을 알지 못하고 부모의 곁에서 살아가는 아이의 얼굴엔 웃음기가 만연했다. 나도 전쟁이 없는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부모님과 함께 유복하게 자랐을 텐데. 질투심에 괜히 고철 덩어리를 발로 찼다. 질투심이 사그라지기 무섭게 아이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그 어떤 감정보다 허무함이 앞섰다. 사실은 말하자면 그 아이는 어린 월화에게 희망이었다. 자신이 숱한 죽음을 겪으며 이리 불행한 이유는 내전 중인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며 발버둥 쳐서 더 나은 곳으로 간다면 더는 죽음을 겪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아이의 사망 소식과 함께 깨지고 말았다. 죽음이란 결국 전쟁터를 누비는 아이든 부유한 가정의 아이든 모두 평등하게 찾아오는구나. 월화는 이 목숨이 꺼질 때까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시선이 오른쪽 발밑에 깔린 존재에게 꽂힌다.

 

“멸망이 두려워서 도망친 네가 ‘재앙’이 되다니. 우스운 이야기야.”

 

휘영청 달을 닮은 금안에 적의가 차오른다. 몸을 비틀어 저항하지만 독 안에 든 쥐다. 포기하고 사납게 소리치나 월화의 귓가에 닿지 않는다.

 

“네가 성좌에게 정보를 넘기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고향은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몰라.”

 

발에 힘을 싣자 언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소음으로 변했다. 찢어질 듯한 비명이 퍼져나간다.

 

“그래봤자 몇 분 더 버티는 정도였겠지만.”

“다, 닥쳐!”

 

공중에서 시선이 부딪힌다. 회색의 눈동자와 금빛의 눈동자. 둘 다 눈동자에 달이 담겨있다고 줄곧 들어왔다. 그러나 둘이 걸었던 길은 상반되었다.

 

“그간 행복하셨나?”

 

안 행복했으면 됐고. 어차피 끝은 불행할 텐데. 행복하게 살다 불행하게 죽나 불행하게 살다 불행하게 죽나 똑같지 않아? 사람들은 항상 끝에 의미를 두지.

 

피를 토하고 입을 뻐금거린다. 여자는 수치심과 공포에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이 기꺼워 월화가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천천히 칼을 들어 올려 무방비하게 노출된 목덜미에 박아 넣는다. 힘이 실린 칼날에 댕강 목이 잘려 피가 분출된다. 바지가 핏물에 적셔진다. 생의 마지막 온도는 뜨겁다.

 

[성좌, ‘간교한 지배자’가 당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생기를 잃은 눈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입가에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비웃음이 걸린다. 월화를 이곳으로 부른 성좌는 정의를 운운하며 자신의 행성을 구해달라 요구했다. 평소 멸망에 임박한 행성을 구하러 다니는 월화를 영웅으로 여겼다나 뭐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건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이다. 그는 번지르르한 말만 내뱉으며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전투를 강요했고 조금만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면 실망이라며 불만을 터트렸다. 거기에 재앙이 그녀와 같은 행성의 출신이었단 걸 알자마자 연대책임을 운운하며 윽박질렀다.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월화가 이 시나리오에 참가한 이유는 연대책임이니 정의감이니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고향을 배신한 옛 동료와 이젠 고통이 된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허망하기 그지없지만. 

 

공허함에 길게 숨을 내쉰다. 육체가 텅 빈 깡통이다. 분노는 한순간의 원동력이 될 순 있지만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가지 않으면 동료의 희생이 헛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희망을 잃은 그녀에게 선택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행성의 멸망을 도운 재앙과 외신을 죽이면 지독한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불행히도 슬픔이란 감정은 쌓이기만 하였다.

 

겁이 났다. 목표하는 대로 스타스트림을 멸망시키면 지난날의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원동을 잃은 나는 결국 그대로 자멸하지 않을까. 그럼 이 일에 무슨 의미가 있지?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또렷한 살기. 지칠 대로 지쳐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돌린 월화가 슬픈 눈동자로 쏟아지는 불꽃을 응시한다.

 

 

[6]

 

 

폐허 사이로 한 남자가 질주한다. 얼마나 빠른지 주변이 어지럽게 휙휙 바뀐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주변을 분석했다. 월화의 흔적이 미세하지만 느껴진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번 회차엔 알 수 없는 일만 가득하다. 지금까지 유중혁에겐 심연의 흑염룡은 연결고리도 없고 굳이 신경을 쏟아야 할 존재는 아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손에 땀을 쥡니다.]

 

모퉁이를 돌자 저 멀리서 우뚝 선 인영이 들어왔다. 지구의 것보다 더 크고 밝은 달 아래에서 밤하늘을 담은 머리칼이 나부낀다. 월화다. 얼핏 봤을 때 심각한 부상은 없다. 가만히 서 있던 그녀가 애검을 휘두른다. 날은 정확히 누군가의 목덜미를 찔렀다. 망설임 없이 상대의 목을 자른 그녀는 잔인했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을 터이다.

 

중혁에겐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그녀가 이유도 없이 살인할 사람도 아니거니와 그렇다 할지라도 향후 시나리오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괜찮다. 설사 방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간 월화는 지구의 메인 시나리오에 여러 공헌을 해왔으니 한 번쯤의 탈선은 괜찮다. 잘 타일러 옳은 방향으로 가게 하면 된다.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상념을 떨쳐 냈다. 그때 월화의 등 뒤에서 누군가 공격을 퍼부었다. 불쌍하리만큼 약한 불꽃, 월화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음에도 멍하니 사체만을 응시하다 굼뜨게 육체를 움직인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눈동자에 덜컥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저딴 공격 피하는 건 쉬운 일인데 왜 피하지 않는 것인가. 중혁은 재빠르게 몸을 놀려 월화를 품에 끌어안았다.

 

“유중혁?”

 

네가 왜 이곳에 있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뜬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안도감이 점철되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월화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피한다. 안전한 곳에 그녀를 두고 눈빛으로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갑작스러운 중혁의 등장에 적은 다급해졌는지 무차별적으로 불꽃을 쏘아댔다. 어느 하나 그에게 닿지 못하였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땅을 박차 도약하며 흑천마도를 휘두른다. 아슬아슬하게 손목을 스쳐 지나간 불길에 실로 만든 팔찌가 뚝 끊어졌다. 동시에 칼날이 적의 몸통을 정확하게 두 동강 냈다.

 

주변을 정리하고 돌아온 중혁이 월화에게로 다가갔다. 시선이 맞닿은 둘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고를 수가 없다. 중혁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몸을 훑었다. 옷이 군데군데 찢어지고 피에 젖어있다. 다행히 벌어진 틈 사이로 보인 살결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다. 아마 그녀의 몸엔 자잘한 상처도 없을 것이다. 마치 월화란 사람이 단 한 번도 다친 적이 없는 것처럼. 처절하고 위태롭게 살아온 월화이것만 그녀가 지닌 스킬이 흔적이 남는 걸 거부하며 전투를 종용했다. 더 참혹하게 더 비참하게 싸워라. 문득 중혁은 그녀가 얼마나 다쳐왔을지 궁금해졌다. 스킬이 없었다면 몸은 흉터로 가득했을 게 분명하다.

 

숨소리마저 시끄러울 적막 속에서 월화가 선연하게 웃는다. 미소에 그는 섬뜩하단 느낌을 받았다.

 

둘은 닮았지만 궁극적인 부분에서 달랐다. 이상주의자인 중혁은 절망할지라도 ‘세계를 구한다’라는 목표를 추구할 수 있었다. 허나 극단적인 현실주의자인 월화는 체념이 빨랐다. 둘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으나 공감할 순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중혁이었다.

 

“왜 피하지 않은 거지?”

“글쎄….”

 

눈을 감고 고민한 그녀가 마침내 답을 내놓는다.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죽고 싶었던 건가?”

“그건… 아니야.”

 

분노에 찬 어조에 의아해한다. 중혁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월화는 그를 냉정하게 평가한다. 냉혈한.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연인이라고 특별히 예외를 두지 않을 것이다.

 

“네가 왜 그런 반응을 하는지 모르겠어.”

 

인생최대의 난제를 마주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난 네 연인이다.”

 

짧은 말 한 마디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뜻을 미루어 짐작하며 천천히 생각한다. 이 사람을 믿어도 되는 될까. 마침내 결심을 한 그녀는 처음으로 마음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것을 풀어놓았다.

 

“모든 게 다 덧없어.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무의미해서 미칠 것 같아. 이 길의 끝에 놓인 건 허무함뿐인 것 같아서 두려워.”

 

그리 말하는 월화는 평온해보였다. 학습된 무력함. 이미 몇 번이고 허무를 맛보았기에 앞으로도 그리될 것이라 확정지었다.

 

중혁이 월화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온도.

 

“의미 없는 행동은 없다. 설령 네 말대로 끝에 놓인 게 허무하다고 할지라도 그동안의 일이 의미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

 

손을 빼려고 하자 더 강하게 잡는다.

 

“만약 네가 살아갈 의미를 못 찾겠다면, 내가 네 의미가 되어주겠다.”

 

순간 월화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 남자는 부끄럽지 않나? 왜 당사자가 아닌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지? 낯 뜨거운 그의 발언에 애꿎은 땅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유중혁을 좋아하고 있는 건 이미 인정한 사실이나 그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 여기진 않았다. 이젠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이미 중혁은 월화의 일부가 되었던 걸 말이다.

 

“넌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야.”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자 한껏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중혁이 인상을 쓴다. 

 

“미안하지만 난 너에게 의지하지 않을 거야. 힘들더라도 내가 직접 헤쳐 나갈래. 그러니까 중혁아. 만약 내가 이번처럼 약한 소리를 한다면 정신 차리게 한 대 쳐줄래?”

 

중혁은 월화가 본디 내적으로도 강한 사람임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희망을 짓밟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구나. 아무리 심지가 곧다고 한들 부러지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돌아가자.”

“그래”

 

맞잡은 손을 놓는 이는 없었다.

 

 

[7]

 

 

나른한 오후다. 한 차례 시나리오를 넘기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월화는 중혁의 어깨에 기댔다. 졸음이 몰려온다. 눈을 느리게 끔뻑이다 고개가 앞으로 휙 떨어지는 찰나에 큼지막한 손이 이마를 받쳐준다. 충격에 잠에서 깬 월화가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몸이 붕 떠올랐다.

 

“뭐, 뭐야.”

 

당황스러웠는지 말을 더듬는다.

 

“자려면 방에서 자라.”

“내려줘. 안 잘 거야.”

 

무시하고 방으로 가려는 중혁을 간신히 말렸다. 걸음을 멈추고 다시 의자에 앉은 중혁의 품엔 여전히 월화가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공을 칭송합니다.]

“맞다. 염룡 씨께서 도와주셨다고 들었어요.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어깨를 으쓱입니다.]

 

15살의 조그만 사내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간접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왜 안 내려주지. 의자가 작은 것도 아니다. 안긴 채 눈동자만 도르르 굴리고 있던 그녀의 눈이 중혁의 팔목에 꽂힌다. 시선을 느낀 중혁이 아무 것도 없는 저의 빈 팔목과 월화를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미신인 줄 알았더니 효과가 있었군.”

“무슨 소리야?”

 

채근하지만 답하지 않는다. 별 거 아니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다. 기분이 나빠진 월화가 재빠르게 품에서 벗어났다.

 

“됐다. 말하기 싫음 하지 마.”

 

툴툴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넌 제대로 말해 준 적이 있나?”

 

정곡의 찌르는 한마디에 머쓱해졌는지 월화가 어설픈 미소를 짓는다.

 

계절이 넘어가려는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푸른 하늘과 두둥실 떠다니는 흰 구름은 청량함이 가득하다. 머리카락에 물결치며 휘날린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가을의 향기에 시간이 흐름을 느끼었다.

 

“다음부턴 거짓말하지 마라.”

“…그래.”

“대답이 늦는 군.”

“착각이야.”

 

몸을 일으킨 중혁이 옆에 섰다. 검은 눈동자에 폐허가 된 서울이 비쳤다. 그의 3회차는 이레귤러다. 과거의 회차와 다른 세계선에서 온 신유승이 준 정보가 여러 변수에 백짓장이 되었다. 원래 인생이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라곤 하나 중혁은 본디 정도에 벗어난 상황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새 부터인가 이것도 나쁘진 않다고 여기지기 시작됐다.

 

앞으로 지나갈 길에 무엇이 놓여 있을지 모른다. 중혁은 3회차가 시작된 순간부터 지금까지를 반추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전 회차에선 겪지 못한 시나리오와 조우하고 답지 않은 일을 벌이기도 했고 그리고 동료를 잃고 얻었다. 얼마나 더 잃어야 끝을 볼 수 있는 것인가. 그럼에도 그 끝은 월화가 생각하는 만큼 공허하진 않을 거란 확신한다.

 

함께 납득할 수 있는 결(結)을 맞이하기 위해 이젠 둘 사이에 거짓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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