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그렇게 믿고 있던 야마자키 소스케를 비웃기라도 하듯, 신은 그에게 <1일 여자친구 속마음 듣기권>을 하사했다. 로마풍의 펄럭거리는 흰옷을 걸친 아줌마가 나와서 여자친구의 거짓말을 파헤쳐보자느니 하는 꿈에서 깨었을 때만 해도 소스케는 별 생각이 없었다. 3류 로맨스소설에나 나올 법한 꿈이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약속장소로 향했다. 눈에 띄는 시계탑 아래에 익숙한 분홍색 인영이 보였다. 사사키 마데유키, 오늘 하루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그의 여자친구였다. 마데, 하고 이름을 부르자 환하게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소스케는 그녀가 무언가 고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었다. 연분홍색 머리카락이 샴푸광고의 한 장면처럼 풍성하게 찰랑거렸다.
“소스케!”
“기다렸어?”
“방금 왔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미소는 세계 제일의 도박꾼을 데려와도 위화감을 못 느낄 정도의 포커페이스여서 소스케는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언제나 구분할 수 없었다.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뭐. 소스케가 팔짱끼기 편하도록 팔을 들었다. 매번 하는 일인데도 그녀는 행복한 기색으로 팔을 엮는다. 플레어 원피스에 얇은 가디건은 보기만 해도 봄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소스케도 겨울이 끝나면서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맨살이 닿는 순간 망할 신이 내린 저주가 발현되었다.
‘30분 정도 기다렸나?’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소스케가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떨려서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소스케가 딱 시간에 맞추어 왔으니 그녀는 약속시간 30분 전부터 도착했다는 말이었다.
이게 뭐지? 정말로 거짓말 한 건가, 매번? 귀로 듣는 것과 달리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뇌 안에서 재생되었다. 소스케는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녀의 속내를 도청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마데유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그녀가 의아한 기색으로 올려다본다. 다람쥐처럼 동그랗게 뜬 눈을 제외하고 그녀는 지극히 차분하고 어른스러워 보였지만, 지금 소스케의 머릿속은 경보가 울리고 있었다.
‘경계, 경계! 이성 꼭 붙들자, 지금 너무 귀엽다고 외치면 그동안 해온 이미지 관리 전부 망하는 거야. 왜 저렇게 어쩔 줄을 모르고 바라보는 걸까? 키가 186이 넘으면서 그렇게 귀여운 거 반칙이야…….’
이게 뭐야! 소스케는 경악했다. 자신의 뇌에 흘러나오는 이 소름끼치는 문구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한테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 게다가 끊임없이 떠들고 있는 목소리는 분명 마데유키의 것이었다.
“자, 잠깐만.”
소스케가 그녀의 팔을 잡고 떼어냈다. ‘소스케가 팔 잡아줬어!’를 마지막으로 호러라디오는 끝났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정상적인 상태였다. 소스케가 다시 느릿하게 그녀의 손가락을 건들였다. 다시 들린다. 소스케가 재빠르게 손을 떼었다. 도대체 왜 귀엽다면서 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마데의 속마음이라고? 전부 다?’
소스케는 황당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데유키는 여전히 사슴 같은 눈을 깜빡이며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소스케, 괜찮아?”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목소리는 방금까지의 흥분한 톤이 나올 수 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잔하다.
“마데, 잠깐만. 잠깐만…….”
소스케는 머리를 짚었다. 고민한다. 이 위기를 어떻게 해쳐나갈 것인가. 여자친구의 본심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다소’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들의 관계가 변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냥……, 그냥 엄청나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게다가 소스케는 소란스러운 타입 옆에 있기만 해도 지치는 사람이었다.
“잠깐 실례할게.”
소스케는 다시 마데유키의 손을 잡는다. 새하얀 손은 그대로 자신의 손바닥 안에 들어온다.
“으응, 괜찮아…….”하고 현실에서는 뺨을 옅게 붉힐 뿐이지만,
‘아! 손잡았어! 소스케 귀여워! 이제 여한 없습니다!’ 속으로는 강강강강으로 소란 떨고 있다.
소스케는 그 괴리감이 느껴지는 소음을 듣다가 말했다.
“……됐어, 이제 가자!”
그는 생각을 포기했다.
점심은 몇 정거장 거리의 뷔페에서 먹었다. 식탁에서 일어날 때만 해도 이제 식사하느라 살이 닿을 일이 없을 거라고 안심한 소스케는 10분 후에 정정당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듣기권을 사용하게 된다.
“마데, 무슨 일 있어?”
음료를 챙긴 소스케가 자리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어딘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계탑 아래에서 무언가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콜라 두 잔을 보고 “둘 다 소스케 꺼 아니야?”하고 웃으며 말을 돌렸다. 소스케는 “들켰나…….” 짐짓 진지하게 농담하면서 생각했다. 말해주지 않는군.
“벌써 디저트를 가져왔어?”
“소스케 모르는 구나? 케이크는 원래 수프 다음에 먹는 거야.”
“어느 나라 법이야, 그거.”
“그러는 소스케는 고기뿐이잖아.”
“……맛있잖아.”
시시덕거리며 식사를 했다. 마데유키는 유난히 식사 속도가 더디어서 소스케가 접시를 비웠을 때도 반 정도 남아있었다.
“아, 먼저 다녀와.”
“됐어.”
소스케는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슬쩍 손을 뻗었다. 모르고 들어버렸을 때와는 다르다. 이번에는 <듣기권>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뻔히 알고 시도하고 있다. 비밀을 멋대로 캐버리면 안 된다는 점이야 알았지만, 그녀는 유난히 자신의 고민을 말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만났는데 괜찮은 척 연기하게 만든다면 핑계를 대서라도 일찍 헤어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물론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돕고. 소스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 순간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건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어디가 아프거나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건 계획이었다. 소스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소스케?”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왜 그래? 소스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콜라 가져올게.”
“응? 내 거 마셔. 소스케? 천천히 가!”
소스케가 달려가버리자 마데유키는 눈을 꿈뻑거렸다. 갑자기 왜 저러지? 오늘 소스케는 영문 모를 짓을 많이 하네. 그것도 귀엽지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냥 가져온 체리를 한 입 먹었다. 맛있다!
‘……사귄 지 몇 달이 지났는데 소스케는 손만 잡고…….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오늘은…… 꼭 키스한다! ’
영화관으로 향하는 길에도 어김없이 팔짱을 꼈고 소스케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원대한 계획을 전부 들어버렸다. 마데유키의 치밀한 계획은 이랬다. 사실 전에도 몇 번 키스하려고 한 적이 있지만, 소스케의 키가 너무 커서 닿지 않았다. (전혀 몰랐다.) 그러니 이번에는 소스케가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타이밍을 노려야했다. 그건 뻔했다. 영화!
어쩐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하더니……. 영화가 아니라 잿물에 관심이 있었다. 그녀가 예매한 영화는 요즘 흥행하는 로맨스코미디였다. 그녀는 심지어 영화 전개도 모두 꾀고 있었다. 소스케는 주인공들 설정부터 위기, 반전, 화해 방법까지 전부 스포 당해 버렸다. 그러니까 시작하고 1시간 20분쯤 되는 타이밍에 어깨를 툭툭 쳐서 돌아보게 하고 키스하는 작전이라 그거지……. 소스케는 몇 분 새에 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거 잘 어울리겠다.”
의류 매장을 구경하자고 한 그녀가 들고 나온 것은 캡 모자였다. 본인의 것이 아니라 소스케가 쓸 물건을 구경한 모양이었다. “소스케, 숙여줘…….” 옷자락을 잡고 당기려 하는 그녀의 손을 저도 모르게 피해버렸다.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고 계속 생각하다보니……. 소스케가 당황하며 모자를 가져갔다.
“내가 직접 쓸게. 아, 괜찮네. 좋다.”
그는 거울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래? 아니면 흰색. 여름이니까 시원한 색이 좋을 것 같아.”
다행히 그녀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같은 디자인의 다른 색상을 모두 가져오는 것을 보고 소스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걸 다 써보기는 귀찮지만, 이번에는 어울려주어야겠다.
“콜라 또 마셔?”
“팝콘도 먹을 거야.”
“그래…….”
가장 큰 사이즈의 콜라를 주문하자 마데유키가 질린 듯이 바라보았다. 팝콘캐리어를 받고 영화관으로 들어가며 소스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예 몰랐으면 괜찮았을 텐데, 앞으로 약 1시간 20분 뒤에 벌어질 일 때문에 진정이 안 된다.
자리에 앉고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미국 배경에 코미디언 주인공과 간호사 남주인공이 등장했다. 더욱 재밌는 상황극을 찾다가 다친 주인공이 남주인공의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했다. 주인공은 잠시도 침착하지 못하고 익살스러운 행동을 계속한다. 남주인공은 그런 모습이 가볍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자다운 모습에 점차 의지하게 된다. 이야기가 흘러흘러……. 두 사람이 키스할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팝콘을 계속 먹어서 계획을 저지한다는 플랜은 이미 소스케 본인이 전부 먹어치웠기 때문에 실행할 수 없었다. 분명 팝콘도둑요정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여기다…….’
소스케는 마데유키를 힐끔거렸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이상했다. 분명 평소와 같이 옅게 웃는 낯으로 어깨를 툭툭 치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영화를 보지도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데?”
소스케가 괜찮냐는 듯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더니 힘없이 웃어보였다. 화면의 빛이 반사되는 옆얼굴이 유난히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싫어할 거야…….’ 처음 듣는 우울한 목소리였다. ‘모자를 골라줄 때도 그렇게 싫어했는데……. 혼자 무슨 생각을 한 거지, 한심하다.’
“괜찮아. 조금 피곤해서 그래. 영화 봐.”
그녀가 겨우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말했다. 두 번째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항상 이렇게 조근조근 말하곤 했다. 그때마다 혼자 슬퍼하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습관적 거짓말쟁이였다. 소스케는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옅은 녹빛의 눈이 영화 때문에 노란색으로 반짝였다. 소스케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잡았다.
“싫지 않아. 싫어한 게 아니야.”
소스케는 쑥쓰러워 하면서도 끝까지 말해주었다.
“마데를 좋아해.”
마침 영화에서도 키스신이 나왔다. 소스케는 얼굴을 비스듬히 꺾으며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뺨을 감쌌던 손으로 눈을 가린다. 괘씸죄였다. 마데유키가 목을 움츠렸다. 키스해서인지 눈을 가려서인지 알 수 없었다. 소스케가 귀엽다는 듯이 목울대를 울리며 낮게 웃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신호를 알아들은 모양인지 마데유키는 천천히 그를 받아들였다. 힉, 흐우……. 어깨에 매달린 손이 애처롭게 떨렸다. 잔뜩 즐긴 다음에 소스케가 만족한 얼굴로 떨어졌다. 새빨간 얼굴로 숨을 헐떡이던 그녀가 용기내서 말했다.
“나도 소스케를 좋, 히끅.”
마데유키가 당황해서 입을 가렸다. 딸꾹질? 그렇게 놀랐어? 소스케가 킥킥대며 놀려대었다. 흐릿한 반사광으로도 빨개진 귀가 보였다. 아니야, 바보야. 그녀가 왼쪽 어깨를 때렸다. 그러니까 그녀가 오늘 계획한 일은 결과적으로 모두 이루어진 셈이었다. 로맨스영화, 톡톡 치기, 키스하기.
영화가 끝났다. 상영관을 나오면서 소스케가 먼저 손을 잡았다. 설마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할 줄이야. 마데유키는 그제야 비로서 아침에 만났을 때처럼 활짝 웃었다.
“그런데 오늘 소스케는 꼭 내 생각이 전부 들리는 것 같아.”
“……착각이겠지.”
“영화 보라는 데 싫지 않다니 무슨 대답이야?”
“…….”
“그리고 원래 반응은 ‘착각이겠지.’가 아니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랍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올려다보았다. 소스케는 모르는 척하다가, 무슨 꾀를 떠올린 것인지 갑자기 당당하게 말했다.
“억울하면 마데도 엉터리 신한테 빌어봐. 남자친구의 거짓말을 파헤치게 해달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소스케랑 나 사이에 웬 거짓말?”
소스케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피식 웃었다. 그 부분에 딴지를 걸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우문현답이었다. 확실히,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