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적어도 한유혜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유현은 적대심을 숨기지 않았고 한유혜도 가만히 당하고 있진 않았다. 다른 의미로 거짓 하나 없이 감정이 맞닿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은근하게 마지막을 고하는 그 순간까지 그녀는 부끄러운 것 하나 없었다. 아니, 이상하게 후련함까지 느꼈다. 한유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에 대해선 알 턱이 없었지만.
"한유혜."
"응?"
한유현은 돌아선 한유혜의 이름을 불렀다가 잠시 뜸을 들였다. 답지 않게. 그는 입 안에 굴러다니는 말을 조합하기보단, 자신다운 말을 하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귀에 좋은 말을 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도 컸다.
"...아니다. 나중에 얘기해."
"......."
마지막이라는 걸 눈치 못 채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걸까. 그녀가 생각하는 한유현이라면 차라리 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나중에. 한유혜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그 몸짓은 마치 저녁 약속이라도 하듯 자연스러웠고,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인사였다.
"한유혜 헌터가... 사망했습니다."
세성 길드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울 듯이 울먹이면서 한유혜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문현아가 충격 받은 얼굴을 한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 소식을 가지고 온 남자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문현아가 그의 멱살을 쥐고 들어올린 탓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걔가 어떻게 죽어. 얼른 말하라는 듯 소리치는 문현아의 말 끝이 약간 떨렸다. 한유혜는 S급 헌터였다. 불구덩이에 두손 두발 묶어서 던져도 오호호 웃으면서 걸어 나올 수 있는,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 그 중 최고 계층에 자리 잡은 사람. 그런 사람이 고작 A급 던전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던전 오류... 였어요. 듣도 보도 못한 몬스터가 마지막 층에서, 그래서, 한유혜 헌터가... 던전 브레이크는 막아야, 한다고..."
알 만한 얘기였다. 던전 근처엔 대학교가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면 사상자의 수는 뻔했다. 한유혜는 S급 헌터로, 그들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걸 위해 제 목숨을 바친 것이고. 던전이 리셋되면서 시체도 사라졌겠지. 성현제는 남자의 얘기를 끝까지 듣곤 가까운 곳에 앉아있던 한유현을 쳐다보았다. 대외적으로 양남매라는 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알 사람은 다 아는 관계였다. 하지만 한유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 예상 했다는 표정이었다.
"...회의는 이쯤하고 장례식을 준비하지. 비서실을 통해 가족에게 연락해."
시체는 볼 수 없겠지만. 모두가 회의실을 나갔다. 마침 노을이 산 너머로 몸을 숨겨 곳곳에 어둠이 스며들었다. 한유현은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있다가 한참 뒤에 일어났다. 그 모습이 언뜻 보면 미련 넘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유현은 한유혜를 싫어한다.
이렇게 간단하게 가정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석하게도 한유현은 그보다 더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저 흉흉하게 눈을 사로잡는 갈색빛을 불태워버리고 싶다가도 이내 굳이 힘 뺄 필요 없다며 그만두는 일이 태반이었다. 형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고. 그런데... 그래. 도움 될 만한 것이 없어져서 이러는 것이다. 어쨌든 S급 헌터가 죽었다는 건 안좋은 일이니까. 비록 세성 길드원이었지만. 한유현은 답답하게 제 목을 조르는 넥타이를 풀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검은색이었다. 비단 옷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낯빛도 그러했다.
그래서 그런가, 이렇게 답답한 건.
죽어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기 싫었다. 한유현은 제 손에 들고 있던 부고를 불태워버렸다. 잿더미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걸로 끝이다. 한유현에게 한유혜는 그저... 세성 길드의 S급 헌터로 남을 것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한유현은 일어나 장례식장을 나가려했다. 그러다가 문을 열기 전 잠깐 뒤를 돌아봤다.
"...얘기는 미루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이제 얘기할 수 없다. 얘기한다고 들을 수도 없다. 짧은 미련을 털어내듯 남겨둔 채로, 한유현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가장 어두운 자리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