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말할 수 있는 내용도 한정되어있는... 진실조차도 다 내뱉어보지 못한 사이에 거짓이라는 사치를 부릴 수 없었다.
대화 없이 시선만을 맞춘 만남이 몇이던가. 내 감정을 온전히 담은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한 만남이 몇이던가. 내 안의 분란을 잠재우고자 그를 멀리했던 시간이 얼마던가.
그는 우리 사이에 무언가를 채워 넣을 생각이 없었고, 나는 적어도 그사이에 거짓을 넣고 싶지는 않았다.
사이의 구멍을 메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나데시코."
스즈가 음절을 씹어내듯 내 이름을 불렀다. 제 이야기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난 가끔, 아주 가끔, 스즈 몰래 외출을 할 때가 있다. 여태까지는 잘 넘겼지만, 하필 오늘 딱 걸려 긴 설교를 듣게 됐다. 나보다 훨씬 작은 스즈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꼬리가 불만 있는 모양새로 흔들렸다.
"대체 어딜 다녀온 거야? 떨어지지 말라고 했던 건 너 아니었던가?"
안전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 말을 변명이랍시고 입 밖으로 냈다간 더 큰 사달이 나겠지. 미안하다,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스즈는 잠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능력 탓이라 했지만, 태생적인 부분도 있는 것 같다. 타인의 정신에 간섭하는 능력. 스즈는 내게 능력을 빌려주고, 나는 능력의 리스크가 큰 스즈를 보호한다. 이게 우리의 계약이었다.
스즈는 한껏 화를 내더니, 피곤하다며 다시 자러 들어갔다. 나는 방문 앞에 앉아 칼날을 닦았다. 닦을 필요도 없는 깨끗한 칼을.
'안타깝네, 너는.'
조용한 밤에,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풀벌레가 울고, 밝은 달이 떠서 은은하게 땅이 빛나고 있을 때, 언젠가 들었던 말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
벽에 기댔다. 눈을 감았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졌다. 조용하고, 숨이 막혀서. 밤에 유독 이명이 들리는 일이 잦은 이유도 이런 고요 속에서는 누구든 사색에 잠기게 되어서가 아닐까. 번잡한 고요 속에
하루하루 업화 속을 걷는 것 같았다. 슬프고 아픈 나머지 기어가는 일도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일조차 원망할 정도로. 온몸이 불타고 있었으면서도 평안을 찾고자 종이학을 집어 들었다. 집어 든 종이학은 불길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는 몇 번째 종이학일까.
'안타깝네, 너는.'
다시 귀가 울렸다.
그는 아마 내 마음을 알고 있을 터였다. 경계가 심했던 그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누그러졌다. 나락이 죽으면 분신도 죽는다는 걸 알게 된 그때, 한 발자국 앞으로 가지 못했던 그때.
"나데시코!"
현기증이 일었다. 땅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독촉하듯 스즈가 재차 내 이름을 불렀다. 복수를 위해 칼을 갈던 나락에게 내 감정을 볼모로 잡혀 휘둘려지고 있었다. 누구도 나보다 비참하진 않을 것 같았다.
문득 그를 보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져내렸다. 그날, 스즈는 한쪽 눈을 잃었다.
'멍청한 것.'
귀가 울렸다.
'불쌍한 것.'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쌍한 나데시코. 인간에게 배척당해 가족을 잃고, 겨우 잡아낸 감정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네가 그의 뒤를 얼마나 쫓든, 그에게 너는 위협일 뿐이야.
어두웠던 하늘이 맑게 개었다. 흰 국화가 지는 아침이 밝았다. 숨 막히는 보라색 안개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비슷했을 거라 생각한다. 어둠에서 벗어났다는 안도, 해방감, 살아있다는 실감... 스즈 역시 기뻐했다. 기뻐 마땅한 일이었다.
너는 어떤데? 스즈가 물었다. 잔인한 물음이었다. 기쁘니, 슬프니? 안타까워? 스즈가 입 밖으로 내지도 않은 소리가 웅웅 귓가에 맴돌았다.
"...기쁘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사이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채워질 리가 없었다. 밑 빠진 독, 말라버린 강, 오지 않는 비. 가능할 리가 없었다. 언젠가는 틈을 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정말 바보 같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내리쬐는 햇빛에 칼날이 반짝였다.
흰 국화가 진 그날에 붉은 저승꽃이 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