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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은 모바일 게임 '영원한 7일의 도시'의 일부 루트와 이벤트 스토리의 스포일러 내용, 그리고 그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나노입자만큼 들어가있긴 합니다. 근데 아예 없진 않습니다. 아마도.

*지휘사(오리주)의 성별 부분을 일부러 모호하게 작성했습니다. 어차피 성별은 플레이어 마음대로 고를 수 있으니까요.

*한국 서버 번역에 맞춰서 종한구가 반말을 사용합니다.

 

-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라고 믿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사실 따지고 보면 동방거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변함없이 유들유들한 모습으로 적당히 좋은 말과 필요한 협력을 제공해왔다. 정확히는, 그것'만' 제공했다. 다만 그가 보이는 특유의 뻔뻔함은 종종 지휘사가 착각하기에 충분한 성질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허물없이 티격태격하는 전우가 된 것 같은 기분이라거나, 혹은... 아니다. 이 이상은 말할 필요도, 가치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 종한구에게는.

그에게 있어 나와 그의 관계는 신기사와 지휘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아마 그는 모든 이들에게 나를 대하는 것과 같이 적당히, 피상적으로 대할 것이다. 가끔씩 거짓말도 섞어가면서.

그걸 알고 있음에도, 나는 무엇 때문에 내가 너를 속일지언정 네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걸까. 아니, 왜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 부조리하게.

 

"지휘사."

"......"

"우리 지휘사 나으리, 또 이상한 게 들러붙은 거야? 아이고, 이를 어째~ 이번에도 만장정 파격 서비스가로-"

"아니. 그거 아니야. 진정해. 안 사요."

 

...내가 저 작자를 앞에 두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게 실수라면 실수겠다. 어차피 말해봐야 듣지도 않을 상대에게는 이런 기력 소모 자체가 낭비에 불과하겠지.

 

"아니면?"

 

그러니까, 가끔 이런 식으로 정말 날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는 순간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너를 믿고 싶어했던 건.

 

"가만 보면 지휘사는 자기 얘기를 통 하지 않는단 말이지~"

 

이 종한구, 그 정도의 신뢰도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섭섭합니다- 라는 말을 덧붙이며 그는 자신의 병괴물을 안아든 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얄밉게 웃었다. 처음 몇 번은 어리버리하게 넘어갔겠지만 이번에는 안 넘어가. 저 태연한 모습에 몇 번 속았던 적이 있었지. 거기에 방심해 몇 가지 프라이버시를 줄줄 말했던 게 내 실수라면 실수겠지만. 예를 들면 내 기억상실증이라거나-

 

"너 같으면 얘기하겠냐? 다른 사람도 아닌 '종한구'한테?"

"지휘사, 그건 칭찬이지?"

"이게 칭찬일 확률은 웬시가 오늘부터 금주할 확률보다 낮다는 건 알지?"

"야박하네, 키스."

"......너 내가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랬지!"

 

지휘사 키스, 이건 이 접경도시의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다. 나는 기억을 잃은 뒤 이 곳에서 깨어났고, 그 당시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앙트와네트의 말에 따르면 '키스'는 내 것이라고 주워들은 전술 단말기에 남아있는 이름이라고 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게 정말로 '내' 물건인지는 확신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이름도 없는 채로 지내는 것보다는 어줍잖은 이름이라도 달고 지내는 것이 훨씬 낫기도 했기에 나는 그 때부터 '중앙청의 지휘사 키스'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름이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다. 아무리 봐도, 그, 특정한 행동이 떠오르기 딱 좋은 이름이잖아. 누가 지어준 이름인지는 몰라도 네이밍 센스가 영 아니다 싶었다. 심지어 내심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저 빌어먹을 신기사는 처음 만난 이후로 쭈-욱 나를 놀리고 싶을 때마다 '지휘사'가 아니라 '키스'라고만 부르곤 했다. 그것도 쓸데없이 다정하게. 아무리 봐도 악취미다. 남 놀리는 걸 좋아한다니 어린애냐고.

가장 최악인 건, 종종 그에게 불리는 내 이름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게 들린다는 거겠지. 나는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 키스, 진짜로 왜 그런 거야?"

"말해줄 거 같냐? 아니, 그러니까 그 이전에 일단 그 호칭부터 치우라니까."

"에이,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고~"

 

그의 얄미운 말투에 결국 다시 침착하게 이성을 되찾는 일에는 실패했다. 그래, 될 대로 되라고 해. 어차피 네가 들어봤자 바뀌는 건 하나도 없을 거 아냐. 우리는 그냥 지휘사와 신기사. 이건 그대로일 거 아냐.

 

"그냥, 여러 모로 내가 휘둘리는 거 같아서. 우리 사이."

"...?"

 

내 뜬금없는 말에, 그가 평소와는 달리 웃음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이 쪽을 보고 있다. 그래. 그래. 나도 이해해. 뜬금없는 말이긴 하지. 그치만 네가 물어봐놓고 그런 표정을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아, 아무리 봐도 저건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인데.

 

"왜, 있잖아. 가끔 종 사장이 툭툭 던지는 말을 내가 좀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거나- 그런 거. 종한구는 가볍게 말하는 건데 내가 너무 심각하게 듣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

"왜 그렇게 생각해?"

"...저기 말이야, 종한구. 사람이 기껏 설명까지 해주는데 꼭 그렇게 정색하고 물어봐야 할까? 우리 이런 사이 아니지 않아?"

"그러니까, '이런' 사이라는 게 어떤 사이인데?"

 

이상하다. 오늘의 종한구는 확실히 평소와 다르고, 음... 그러니까, 다시 강조하자면 역시 이상하다. 사실 원래도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이상한 건 사실이라, 나 또한 그를 따라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선을 긋자. 어차피 너와 내가 주고받는 감정의 총량은 서로 일치하지 않아. 그러니 나는 너에 대한 필요 이상의 신뢰와 기대를 버릴 거야. 이외의 다른, 말할 수 없는 복잡한 형태의 감정들 또한. 이건 내 몫에 불과했고, 네가 알 필요가 딱히 없었다. 알면, 보답해주기라도 할 건가. 아니면서.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그 또한 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지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키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이름 부르지 마."

"...키스?"

"그 입으로, 키스라고 친근하게 부르지 마."

 

기대하게 만들지 마, 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내가 말한 건 맞지만, 스스로 듣기에도 너무 어린애같은 발언이라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그 말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닌지, 그 또한 이 쪽을 보고 있는 눈이 조금 커진 것 같았다.

 

"키스, 그렇게 입을 막고 있으면 대화할 수가 없잖아. 일단 손부터 치우고-"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그가 뻗어손 손을 쳐내자 그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만해. 너는 그냥 이 상황을 적당히 넘기고 싶을 뿐이잖아. 이 이상 뭔가를 묻지 마. 그가 나한테서 듣고 싶은 말은 없을 것이다. 없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여태까지의 그럭저럭 최악은 아니었던 관계를 박살내고 싶지 않아.

내 쪽을 보는 그의 표정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미묘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도 같았고, 이 상황 자체를 성가시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고... 내 행동에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얼굴만 보면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너는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

"키스, 나랑 얘기하기 싫어?"

"......"

"...그럼 듣기라도 해줘."

 

아무리 나랑 얘기하기 싫어도 귀까지 막을 생각은 아니겠지, 라고 중얼거리듯 덧붙이는 그의 목소리가 어째 정말로, 정말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의 것 같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린 손을 거두고 물었다.

 

"말해, 종한구."

"너는, 내가 너를 어떻게 보고 있다고 생각해?"

 

그야 신선하고 진귀한 시체 콜렉션 후보 1이지, 라는 대답이 튀어나올 뻔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는 시체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고, 나에게도 종종 내가 죽고 난 뒤의 몸을 갖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그리고 그 말에는 네 진심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그는 이런 대답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 내가 내놓기에 적당할 대답은 내 견해일까, 아니면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는 쪽일까. 결국 나는 제 3의 선택지를 뽑아들었다. 두 가지 선택지의 중간 즈음에 놓인, 어떻게 보면 회피적인 답변.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섭하네~ 내가 우리 지휘사를 꽤 좋아한다는 것쯤은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예비 시체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잖아."

 

내 말을 듣고 나서야, 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음, 그치만 틀린 말은 아닌걸.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 와중에 부정은 안 하는구나... 그럼 그걸로 된 거지, 뭐. 다른 사족이 필요해?"

 

부러 딱딱하게 뱉은 질문에 그의 표정이 점점 더 미묘해졌다. 그래, 나도 한 번쯤은 이런 입장이 되어보고 싶었거든. 내가 종한구 당신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언제나 당신에게 휘둘려도 괜찮다는 건 아니잖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고 했던가. 그렇지만, 한 번쯤은 그걸 뒤집어도 되잖아. 어차피 나중에는 다시 이리저리 휘둘릴 거라면, 한 번쯤은. 감정적으로 상대방에게 휘둘리면 휘둘렸지 나 스스로는 휘두른 적이 없기에, 지금의 나는 기묘한 우월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치만, 나는 우리 지휘사님이 시체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까 말이지."

"허?"

"예비 시체로서의 너도 좋지만-"

 

여전히 복잡미묘한 거기까지 말하다가 먼저 입을 다물어버린 상대방은, 이내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지금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 자, 순찰 시간이지?"

 

그렇게 말하며 내게서 등을 돌리는 그의 모습은 묘하게 허둥대는 것 같기도 했다. 1주년 기념 행사 때 브라우니를 베어물고 돌아서던 그 때의 모습이 조금 겹쳐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오행진을 살피러 갈 때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역시, 다음 번에는 3단 케이크로 위협해서 뒷말을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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