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르와 캐릭터 특성상 욕설이 사용됩니다.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적어도 장훈은 그렇게 확신했다.
법복을 벗고 난 후 장훈은 누군가를 의심해야 할 일이 현저히 적어졌다. 변호사사무소에 들어오는 의뢰라 해도 특수부에서 수사하는 일들에 비하면 대체로 위험하지 않았으므로 누굴 극단적으로 의심하고 경계할 필요도 적어졌다. 성격은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누그러졌으며(방 계장이 알면 기함할 일이었다) 물건을 집어 던지는 일도 별로 없었다. 사화가 샐쭉 다가와서 장난질을 쳐도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는 게 아니라, 유들유들 웃으면서 ‘어쭈?’ 정도는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사화의 성격 탓에 가벼운 농담이야 몇 번 들은 적 있지만 사화는 우장훈이라는 이름 석 자만 들으면 껌벅 죽고 못 살았기 때문에 오래 장난을 끌지는 못했다. 밥 먹으러 간다고 전화하고, 시험공부 싫다고 전화하고, 배고프다고 전화하고, 심심하다고 전화하고. 이렇게까지 시답잖은 일로 전화하면 할 일은 언제 하느냐고 장훈이 잔소리를 해야 했을 정도로 사화는 시시콜콜 연락해댔다.
그런 놈이 갑자기 연락을 두절하고 어디로 숨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뜬금없이?
토요일부터 사화가 연락을 하지도, 받지도 않았으니 오늘로 딱 사흘째 되는 것이다.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봤으나 서프라이즈도 유분수지. 이렇게 질질 끌어서 얻을 건 또 뭔가. 연락을 아예 끊어가면서 이벤트를 준비해 봤자 장훈이 기뻐하긴커녕 혼을 낼 것이란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사화는 눈치가 제법 빨랐으니까. 긍정적인 상황을 제하고 나면 남는 선택지가 몇 개 없었다.
1. 잠수를 탔다.
2. 신변에 큰일이 났다.
장훈은 종이에 그렇게 휘갈겨 쓴 뒤 조용히 펜 뚜껑을 닫았다. 펜 끄트머리로 턱께를 박자 맞춰 두들기며 장훈은 침착하게, 천천히 생각했다. 첫 번째 항목, 달리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화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확률이 희박했다. 일방적으로 삐쳤을 수는 있다. 하지만 연락이 사흘 이상 두절되는 것을 사화 스스로가 견딜 리 없다. 제가 견디지 못해 ‘검사님, 진짜 이러기예요!’라고 씨근덕대면서 뛰어올 것이 틀림없었다. 장훈은 다시 펜 뚜껑을 열고 힘있게 1번 항목을 지워 버렸다. 그러고 나면 남는 건 2번뿐인데, 장훈으로서는 그다지 염두에 두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주변인이 위험에 처하는 일은 이미 예전에 질릴 만큼 겪어보지 않았던가. 펜 끄트머리로 입술을 몇 차례 계속 부딪히다가, 턱을 괴었다가, 펜대를 두들겼다가 반복하던 장훈은 한숨과 함께 숫자 3을 휘갈겨 썼다. 3번, 3번……. 3번, 그러나 그 뒤로 나오는 게 없었다.
“하, 씨발. 딱 돌겠네.”
내부자들 우장훈X윤사화
놀라운 월요일!
“난 모르는 일이여.”
상구는 사정을 듣자마자 선언하듯 그렇게 말했다. 장훈이 대답 없이 한쪽 눈썹을 밀어 올리자 그는 테이블 위에 널브러뜨렸던 다리를 접어 거두며 상체만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한 음절 한 음절에 방점을 콕콕 찍었다.
“난, 조또, 진짜, 한 개도, 몰러.”
“내는 한 번 물어봤는데 니는 왜 대답을 두 번 하지?”
“염병 안 떨어도 느 전직에 금사였다는 거 다 알고 있은게 취조허는 영감님인 척 고만허라고. ‘모른다’는 말 모르나?”
“한 개도?”
“집은 찾아가 봤어?”
상구의 표정에 웃음기가 가시자 장훈은 고개를 푹 꺼트리고 머리통을 감싸 쥐었다. 차라리 두 놈이서 작당을 하고 헛짓거리를 하는 거면 좀 나았을 텐데. 재떨이와 담배 끄트머리가 마찰할 때 나는 약한 소음이 귀를 긁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상구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잡으며 담배 연기를 내뱉고 있었다. 장훈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상구의 시선이 자연스레 뒤쫓아왔다.
“집에도 뭐, 진짜 읎어?”
“금연 구역이라고 내 오백 번 말했다.”
“말 돌리지 말고, 씨벌. 나 도와줄라고 이러는 거 아녀. 사람 찾는 거는 나가 전문인게.”
“집 갔다가, 읎으믄 그때.”
“아직도 집을 안 가 봤어? 그르믄 집도 안 가 보고 나부터 들춰본 거여? 이런 씨벌, 싸가지. 혀도 혀도 너무한 거 아닌가.”
싸가진지 네가진지 장훈은 귀담아들을 시간이 없었다. 상구가 하나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조금도 아는 게 없지 않은가. 우선 프라이버시는 둘째치고 무조건 사화네 집에 들러야 했다. 변고가 있든 없든 발견한다면 그걸로 됐다. 안에 없다면? 그게 무엇보다도 큰 문제였다. 안상구가 분명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구만큼 빠르고 즉각적이진 못하겠지만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효율은 발휘하리라.
장훈은 소파에 얹어 놓았던 겉옷을 낚아채 걸쳤다. 상구가 턱을 괴고 장훈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뭔 일 있다 싶으믄 씨게 전화허고.”
“니 휴대폰 잘 들고 있어라이.”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었다. 무엇도 확실한 게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의심해야 했다. 장훈은 사무실을 뒤로하고 안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들었다. 주차장으로 걸어 내려가는 도중,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화에게 한 번 더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불통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농담이랍시고 ‘우리가 뭐 내외하는 사인가?’ 같은 소리를 서로 지껄여댄 건 사실이었지만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내뱉은 농담은 아니었다. 장훈은 사화의 집 근처 골목길에 차를 대어 놓고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왔다. 조금 더 일찍 찾아볼 걸 그랬다는 생각도 울컥 들었으나 이미 늦은 문제였다. 한달음에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익숙한 현관문이 보였다. 장훈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초인종을 연달아 두 번 눌렀다.
“……윤사화. 사화야.”
관자놀이를 더듬어 누르며 장훈이 이름을 불렀다. 대답 대신 고요가 돌아왔다. 늘어지는 침묵 속에 장훈은 손끝을 멈추었다가 다시금 손등에 뻣뻣이 힘을 주었다. 상쾌한 초인종 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현관문을 쿵, 두들기자 순간 손목이 저릿했다. 문에 가까이 다가선 채 장훈이 고개를 바짝 붙였다. 몇 가지 최악, 혹은 차악일 수 있는 상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 씨발, 조심을 그렇게 하라고 해도. 아무튼 말 한 번 더럽게 안 듣는 놈이었다.
장훈이 다시 한 번 윤사화, 하고 부르는 그 순간, 절대 열릴 것 같지 않던 현관문이 저 혼자 덜컹거렸다. 장훈이 반사적으로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사화가 아닌 누군가 튀어나오면 그대로 머리를 후려칠 생각으로 주먹을 말아쥐는 순간,
“……?”
머리통이 가슴팍 근처에 닿을까 싶은 사내아이가 눈을 바로 뜨고 장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으며 왜인지 익숙한 생김새였다. 장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자 그 아이는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입술을 말아 다물고서 장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화에게 조카가 있었던가, 문득 의아해져 아이를 자세히 살펴보려 하는 순간 뒤편에서 달음박질쳐 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니나 다를까, 알아보지 못할 리 없는 제 애인이었다.
“……윤사화.”
어이가 없어서 목소리에 힘이 다 빠졌다. 이렇게 집에 멀쩡하게 있으면서 연락도 없이 잠적했단 말인가? 만나자마자 잔소리부터 튀어나올 줄 알았건만 정반대였다. 극도로 긴장한 탓에 피로감이 먼저 뒤통수를 짓눌렀다. 장훈은 팔꿈치로 현관문을 지탱한 채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정체 모를 아이는 장훈과 사화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사화더러,
“누나, 삼촌 온 거 아이가?”
했다. 그래, 씨발, 삼촌으로 보든 말든. 삼촌이냐고 묻는 걸 보아하니 생각보다 두 사람이 가까운 관계는 아닌 듯해 장훈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현관에서 얘기를 전부 끝내기에는 너무 많은 사정이 남아 있었다. 장훈은 손을 내저으며 안으로 들어가자는 듯 턱짓했다. 누구보다 어이없는 건 분명 장훈일진대 사화는 눈알이 굴러 나올 것처럼 휘둥그레 뜨고서 장훈과 아이를 수 번씩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요, 물었더니 사화가 더듬더듬 대꾸했다.
“……검사님.”
“예. 아, 뭐, 인자 내가 니 검사님으로도 안 보이나 보지?”
“진짜, 진짜, 진짜 검사님?”
“이 갑자기 뭔……, 사화야, 정신 차리라. 니. 또 장난치는 거믄 진짜 화낸다이. 장난을 칠 거믄 걱정을 안 할 만큼만 해야지, 사흘을 사람 걱정하게 만들어 놓고 여까지 와서 또.”
정신 차리라는 듯 위팔을 잡아 붙들자 사화가 대뜸 장훈의 두 뺨을 붙잡아 왔다. 하던 말을 멈추고 장훈이 시선을 떨어트렸다. 뭐 하는 거야? 눈빛으로 물으며 눈썹을 밀어 올리니 사화가 사뭇 진지하게, 침착하려고 노력하면서 한마디 한마디 떼어 물었다.
“내 생일이 몇 월이죠?”
“내랑 장난치나.”
“아, 빨리, 빨리!”
“뭐, 4월?”
“검사님이랑 나랑 처음 만난 곳!”
“니가 연락도 안 하고 사무실에 쳐들어왔잖아. 니 지금 내랑 스피드 퀴즈 하나, 뭐, 씨바, 뭐 하자는 거야?”
뺨이 짓눌린 채 어정쩡한 투로 대꾸하던 장훈이 그만하라는 듯 고개를 양쪽으로 파득 털었다. 사화가 얼결에 손을 물렸다. 안쪽으로 몸을 들이고 장훈은 그제야 문을 닫았다. 아까부터 현관에 서서 이해할 수 없는 소리나 듣고, 뭐하는 짓인지.
“벌레도 싫어하는 아가 현관문 열어놓고 뭐 하는 거야, 한여름에?”
“검사님, 진짜, 내가 진짜 진지해서 그러는데.”
“내도 졸라 진지한데. 누가 더 진지한지 함 볼래요. 됐고, 니 폰 어데 갔는데.”
“폰?”
“폰을 어데 뒷구멍에 처박아 놓고 안 꺼내 쓰는 게 아이믄 내가 전화를 몇 통이나 했는데, 몬 봤을 리가 읎고.”
사화는 말 그대로 탄식처럼 ‘아…….’ 내뱉더니 변명하듯 우물거렸다.
“검사님 아닌 줄 알았죠. 우리 오빠 맞네, 진짜…….”
“……사화야, 내가, ……하, 씨바, 오케이. 응? 오빠가 화 안 낼게요. 지금 니한테 뭔 일 난 줄 알고 놀래가 그른 거야. 내 진짜 화난 거 아이그든. 그니까 그짓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뭐 때매 읎는 척했는데?”
“응, 근데 나도 농담하는 게 아니라……, 진짜……, 검사님 아닌 줄 알고 그랬다니까. 우리 집에 벌써 검사님이 와 있단 말이에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맞장구라도 쳐줄 텐데. 화를 내지 않기로 했으니 언성을 높일 수도 없고, 뭐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기도 어렵고. 장훈이 한숨을 내쉬자 문을 열어 주었던 사내아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다시 사화의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내 드가 있나.”
“조카야, 친구 동생이야, 아이믄 뭐, 어데서 쭈워 온 애야?”
모르는 애를 덥석 주워 왔으리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윤사화야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르는 놈이니 또 확신할 수는 없었다. 모르는 아이라기엔 저 사내아이가 사화를 그럭저럭 신뢰하는 눈치고, 그렇다고 혈연이라기엔 호칭이 모호했다. 이 상황이 정신없는 건 사화도 마찬가지였다. 양옆에서 재촉하는 탓에 뭔가 해결되기는커녕 얘기를 거듭할수록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사화가 손을 휘 내젓더니 ‘잠시만, 잠시만!’ 하고 크게 외쳤다. 둘의 움직임이 잠깐 멈추었다. 사화가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히자 쉽게 아이와 눈높이가 맞았다.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우장훈입니다.”
“뭐?”
비딱하게 서서 듣고 있던 장훈이 역정을 내듯 되물었다. 사화가 손짓으로 그를 말렸다. 아이는 제법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러나 아주 예의 없지는 않게 야무진 투로 대꾸했다.
“소개 백 번 하라카믄 백 번 넘게도 할 수 있십니다.”
“하이고.”
“화곡국민학교 6학년 1반.”
“……?”
어린아이의 헛소리야 대충 흘려넘기면 된다 싶어 듣는 데에 별 성의도 없었던 장훈은 친숙한 학교명이 나오는 순간 꺼림칙함을 느꼈다. 이름이 우연하게 같은 일은, 확률이 희박하지만 어쩌면 있을 수 있다 치자. 거기다 출신 학교까지 같은 일은, 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좋게 봐 줘서 있을 수도 있다 치자. 하지만 이미 초등학교로 바뀐 지 오래인 학교더러 국민학교가 웬 말인가. 장난이라면 그다지 유쾌하기만 한 장난은 아니었다. 장훈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대로 사화를 돌아보자 사화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나 이런 걸로는 장난 안 친다, 진짜.”
“…….”
아이―우장훈의 어린 시절이라 추정되는―는 두 사람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이 애가 누군가의 사주로 그들을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라면 물론 이해 못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장훈은 다시금 아이의 외양을 천천히 뜯어 살펴보았다. 어쩐지 첫눈에 익숙하더라니만……, 그렇게 생각하니 또 말이 됐다. 하지만 그게 말이 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차라리 사화가 아이를 주워 왔다는 게 더 현실적으로 다가올 지경이었다. 장훈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니……, 어데 사는데.”
“골목 안쪽에 책방 아들입니다. 근데 길을 잘몬 들었는가, 쌩판 이상한 데로 들어와갖고. 아, 여는 시내 쪽도 아인데.”
“지금 몇 월 며칠이고.”
“9월 9일.”
“……. 몇 년?”
“1989년.”
심지어 앞자리가 바뀌었는데. 장훈이 사화를 돌아보자 사화는 ‘그렇다니까요.’라고 체념을 끝낸 담백한 투로 답했다. 사흘간 이 아이에게 모든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장훈은 한 손으로 뺨을 단단히 감싸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입술부터 입천장이 바짝 마르고 담배, 담배가 급히 당겼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월요일인데도 어쩐지 일이 평소보다 적더라니만 균형이 이딴 식으로 맞아 떨어졌다. 장훈이 넥타이를 잡아 풀었다. 좋다, 놀라운 월요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