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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 코타로 X 타치바나 아야

W. ILUV_ARS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보쿠토 코타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한 그의 연인이 그에게 무언가를 숨기려고 굴거나 거짓말을 했던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거짓은 없었다.” 그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책상에 앉아 부루퉁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과거형으로 뚝 끝나버린 문장이 최근 그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한동안 뭐라 뭐라 들릴 듯 말 듯 홀로 구시렁대던 보쿠토는 별안간 힘이 쭉 빠진 듯 책상에 쿵 하고 고개를 파묻었다. “없어야 한단 말이야.” 서운함이 뚝뚝 묻어나는 기운 빠진 목소리가 텅 비어있는 3학년 교실에 슬프게 울렸다.

 

 

*

 

보쿠토 코타로는 타인이 본인을 평가할 때「눈치가 별로 없는 편」이라고 정의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눈치가 없다고?” 하며 반문하곤 했지만 점차 본인이 가진 눈치의 총량이 스스로의 낙천적인 성격과 묘하게 결합되어 사람들이 말하는 ‘눈치 없음.’ 의 범주와 상당한 교집합을 이룬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며 그는 눈치 없는 사람이 가지는 ‘달콤한 면죄부’를 알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보쿠토는 원래 눈치가 좀 없어.” “뭐, 보쿠토니까.” 하며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건 물론이며 조금 멀뚱한 척 고개만 갸웃 하고 있으면 “아이 참, 진짜 눈치 없이... 나도, 좋아해.” 라는 여자 친구의 사랑스러운 고백을 이끌어내기도 쉬웠다.

 

그렇기에 보쿠토 코타로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졌다. 눈치 없는 사람인 본인이 여자 친구의 아주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챘다는 건 그가 그동안 쌓아 온 눈치 없음의 이미지를 포기해야 하는 일 이었다. 심지어 이런 문제는 아야가 ‘....무슨 소리야? 내가 변했어? 그렇다면 헤어져!’ 하며 상황이 더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타치바나 아야의 최근 태도를 그냥 모른 척 넘기기엔

너무나도 신경이 쓰였다. 그래, 신경이 쓰였다.

 

너무 너무 신경이 쓰여서 다른 일에 집중이 안 된다. 멍한 얼굴로 어떻게든 부실에 도착했고, 옷을 갈아입고, 준비운동도 했는데 이상했다. 배구도 오늘따라 안 풀린다. 얼굴에 티가 다 난다.

 

등 뒤에서 부원들이 ‘오늘은 또 왜 저런대?’ ‘내버려 둬.’ 하고 수군대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지만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누가 먼저 다가 와 다정하게 물어 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쿠토 코타로는 눈썹이 추욱 내려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서 있던 부원들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날 내버려 두지 마!’ ‘빨리 누군가 와서 왜 그러냐고 물어봐 줘!’ 하고 속으로 절규했지만 시선이 맞닿은 부원들은 은근슬쩍 그의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다.

 

후쿠로다니 학원 배구부원들 사이에서 빠르게 눈빛교환이 이루어졌다. 은밀한 시선이 오간 후 정해진 희생양은 이번에도 2학년인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너 말고는 없다.’ 라는 선배들의 눈빛공세에 못 이긴 그는 누가 봐도 흠칫 놀랄 정도로 깊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나 우울함!’ 오오라를 한껏 풍겨대는 보쿠토를 힐끗 본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귀찮다는 얼굴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체육관 구석에 주저앉아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는 보쿠토에게 가까이 다가가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나요.”

 

*

 

“아! 카아시! 들어 봐! 글쎄 아야가...!”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듯 글썽거리는 눈망울로 저를 올려다 본 보쿠토가 봇물 터지듯 입을 열었다. 아카아시는 나른한 눈으로 보쿠토의 하소연을 묵묵히 들었다.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을 멍하니 들어보니 대충 문제가 뭔지 알 것 같았다.

 

1. 요즘 문자메시지의 느낌이 이상하게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2. 복도에서 만나도 인사만 대충 하고 당황한 듯 후다닥 지나친다.

3. 말을 걸면 묘하게 시선을 피한다. 심지어 손도 잘 안 잡는다.

4.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슬슬 나한테서 떨어진다.

 

“권태기네요.”

아카아시가 무심하게 내뱉은 말에 보쿠토의 얼굴이 삽시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권..뭐?”

“권태기요.”

“.....권태기가 뭔데?”

흔들리는 보쿠토의 동공을 똑바로 바라보며 아카아시는 친절하게 부연설명을 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관계에 질린다는 거죠.”

“뭐? 왜?”

“이유는 다양하지 않을까요?”

“아카아시, 아야랑 같은 학년이잖아! 뭐 들은 거 없어?”

“음, 그러고 보니 전에 비슷한 이야기 했던 것 같긴 하네요.”

 

분명, 지난 번 복도에서 타치바나 아야와 권태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긴 했다. 다만 그 때의 이야기는 학교생활이 권태기라는 이야기었다. 하지만 아카아시 케이지는 지금 안절부절못하는 보쿠토를 보고 있는 이 상황이 꽤나 재미있었기에 기억을 살짝 조작해 뻔뻔한 얼굴로 내뱉었다. 저를 피곤하게 한 것에 대한 가벼운 벌이라고 생각하세요 보쿠토 선배.

 

“언제? 언제!”

예상대로. 경악에 물든 보쿠토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아카아시는 슬쩍 몸을 뒤로 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에 복도에서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잠깐 그런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자세히 말해 봐 아카아시!”

“일단.남자보다 여자들이 좀 더 자주 온다고는 하던데..”

아카아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시, 시로후쿠!!!!!”

 

멀찍이 앉아서 이쪽을 보고 키득대던 유키에를 향해 보쿠토가 달려갔기 때문이다. 다급하게 시로후쿠 유키에를 부르는 소리가 체육관을 둥 둥 울렸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보쿠토를 본 유키에의 윽. 하는 원망스러운 시선이 제게 잠시 박혔지만 아카아시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

 

“시로후쿠! 아야가! 권태기야?!”

“어? 무..무슨 소리야?”

 

두서없는 보쿠토의 질문에 유키에는 당황한 표정으로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 권태기? 무슨 소리인가 고개만 갸웃대던 유키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을쎄...? 권태기려나?”

흐음...벌써 권태기야? 눈을 도르륵 굴리며 어물쩍 답을 피하는 유키에를 본 보쿠토는 다급하게 유키에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저번에 나 몰래 아야랑 둘이 만나서 케이크 먹었잖아! 그 때 별 이야기 안 했어?”

“헤에?..어..어떻게 알고 있는..”

“지나가다 봤어! 빨리!”

“뭐?”

 

시로후쿠 유키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했다. 학교에서 꽤 멀리 떨어진 카페였는데 지나가다가 봤다고? 지금 보쿠토의 발언은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지금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중에 제대로 알아봐야지. 그건 그렇고 그 때 아야랑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권태기...? 별로 그런 기분은 못 느꼈는데. 유키에의 머리가 타치바나 아야와 함께 한 지난 주의 기억을 되감기 시작했다.

 

“일단...유명한 케이크 가게가 입점했다는 걸 듣고 같이 갔고...”

찬찬히 기억을 되살리는 유키에를 보는 보쿠토의 시선이 이글이글 타오르듯 뜨거웠다. 어디에서 났는지 귀여운 핑크색 볼펜과 수첩이 손에 있었다. 특종을 취재하는 열정 넘치는 신입 기자마냥 뭔가를 계속 적기까지 했다.

 

“응. 그리고? 그리고!?”

“아야가 저번에 나랑 같이 산 원피스 입고 나왔는데 귀여워서 둘이 셀카 찍었어.”

“와! 그 셀카 나도 공유해 줘!”

“응. 그리고 가게 가서..몽블랑 하나랑 후르츠산도랑..음..티라미수를 시켰어.”

“뭐? 멈블? 산도? 아무튼 그 다음엔?”

“아야가 자기는 몽블랑이 좋다고 했어. 나는 티라미수가 맛있더라.”

“.....뭐?”

“다시 생각해도 환상적인 맛! 다음에 또 가자고 해야지!”

이상하게 생각이 새어버린 유키에였다. 보쿠토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유키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기운이 빠진 듯 볼펜이 툭 손에서 떨어졌다. 떨어진 볼펜이 데구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적막이 찾아온 체육관을 채웠다.

 

“시로후쿠, 뭘 먹었는지가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가 중요한거야.”

옆에서 보고 있던 코노하가 답답했는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보쿠토를 달래는 역할은 사양이야. 하며 모르는 척 있었지만 듣다 보니 아무래도 궁금하다. 그리고 남의 연애 문제만큼 재미있는 일은 또 없지. 게다가 보쿠토의 연애 고민이라니.

 

“그래!! 아야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한 거 없어!?”

얼빠진 얼굴로 유키에를 멍 하니 바라보던 보쿠토도 코노하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아야가 말한 건 딱히 없는데? ......아!”

뭔가 기억났는지 유키에가 박수를 짝 하고 쳤다. 그리고 동시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 미안 보쿠토, 이건 아야와 나의 걸즈토크라서 말 못 해!”

유키에가 킬킬 웃으며 보쿠토의 등짝을 팡팡 쳤다. 무언가 기억해 낸 듯 포복절도하는 유키에를 보며 보쿠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뭔데! 말해줘!”

답답한 듯 손에 들고 있던 메모장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보쿠토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아야가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네?”

우후훗 하며 묘한 웃음을 흘리는 유키에를 본 보쿠토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입을 열었다. 분한 듯 꽉 문 잇새로 억눌린 음성이 새어나왔다.

 

“패밀리레스토랑 4인권”

“응?”

“이거 줄 테니까 말해줘.”

“으음....”

유키에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삭 사라졌다. 말해버릴까? 하는 표정으로 우정과 음식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녀의 머릿속이 너무도 선명하게 읽혔다.

 

“지금 안 말해주면 안 줄거야!”

“으....아야...미안.......”

유키에는 꾸물꾸물 팔을 내밀어 보쿠토 코타로가 내민 주먹에 제 주먹을 부딪혔다. 자리에서 일어 난 그녀는 보쿠토의 손에 있던 레스토랑 식사권을 빠르게 낚아챘다. 그리고 보쿠토를 질질 끌고 구석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그 날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

 

“아야는 보쿠토의 어디가 제일 좋아?”

부드러운 케이크를 포크로 야무지게 떠 먹고 부드러운 맛을 한껏 음미하던 유키에가 별안간 질문했다.

 

“네? 음...착하다?”

무슨 의미의 질문일까 고민하던 타치바나 아야는 잠깐의 침묵 후 평범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 그런 거 말고오!”

아냐,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냐. 시로후쿠 유키에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앞에 앉은 타치바나 아야를 탐색하듯 바라봤다.

 

“그런 거 말고요?”

영문을 모른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한 타치바나 아야는 어색함에 케이크를 잘라 입으로 가져갔다.

 

“뭐.. 그런 거 있잖아? 멀리서 봐도 떡 벌어진 어깨라거나, 탄탄한 허벅지라거나, 꼭 안기면 느껴지는 가슴근육이라거나?”

신난 듯 한 유키에의 말에 타치바나 아야는 부드럽기만 한 케이크가 목에 걸리기라도 한 듯 커흑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어찌어찌 케이크를 씹어 삼킨 그녀가 유키에의 뜨거운 시선을 슬쩍 피하며 입을 열었다.

“음... 그, 그런 건 모르겠는데요?” 애써 침착한 척 대답했지만 가볍게 음이탈이 있던 것 같기도 하다. 타치바나 아야는 완벽을 연기하지 못한 자신에게 속으로 작게 고함을 질렀다.

“응? 왜 모르지...? 보쿠토 정도면 피지컬 괜찮잖아! 다음에 한 번 봐봐!”

 

“아..으음....그, ...네....”

민망한 듯 뺨에 홍조가 올라온 채 대충 대답을 해 넘기기로 했다. 침착한 척 다시 케이크를 포크로 찌르는 타치바나 아야였다. 하지만 시로후쿠 유키에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엔 제대로 대답 해 줘야 해?”

“네..,네에?”

“숙제야 숙제~ 다음엔 남자친구의 쌔끈한 매력 포인트 TOP5 해서 발표하기!”

“자세히 보고 구체적으로 말하기!”

시로후쿠는 와하하 즐겁게 웃으며 앞에 있는 케이크를 한 입 크게 잘라 먹었다.

 

*

 

“그럼, 아야가 날 피하는 건...”

“평소엔 자각 안 하던 보쿠토의 남성적인 매력이 버거워서 아닐까?”

“...그런...그렇구나....!!”

 

시로후쿠와 은밀한 대화를 끝내고 온 보쿠토는 전에 없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카아시! 토스 올려 줘!”

 

녹아버린 버터처럼 흐느적대던 아까와는 180도 달라진 태도. 별안간 텐션이 급 상승한 그를 보며 후쿠로다니 배구부원들은 익숙한 듯 조용히 어깨만 으쓱거리며 시선을 교환했다. 아카아시 케이지 역시 평소대로의 무심한 얼굴로 “네” 하고 대답하고 보쿠토를 향해 가볍게 뛰어갔다.

 

뛰어가는 후배의 뒷모습을 보며 시로후쿠 유키에는 손에 쥔 패밀리 레스토랑 티켓을 가방 안에 소중하게 넣었다. 고마워 아야, 고마워 보쿠토! 유키에는 마음 속으로 진심어린 감사를 표했다. 이 커플은 양 쪽 모두 놀리는 재미가 쏠쏠해서 좋다니까! 하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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