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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있을 수가 없다.

조조 맹덕, 그는 본래 의심이 많은 사람인데다 거짓이라는 것에 누구보다도 능숙한 사람이기에 상대방이 진실을 말 하는지 거짓을 말 하는지는 금방 알아차린다. 특히나 10년도 더 넘게 봐왔던 사람이 거짓을 고할 때 어떤 손짓을 하는지 어떤 눈빛이 되는지 그 정도는 조조가 아닌 사람도 알아차릴 터.

진평 자 향, 그녀는 신뢰를 무기로 하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거짓말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나 자신을 이끌어주며 나아가는 그의 주군 조조 앞에서는 말이다. 물론 아주 옛날이지만 조조를 잘 알지 못하던 시절, 조조의 아래에서 일 하다 몇 번 사소한 거짓말을 시도했으나 눈치빠른 그 앞에서 소용 없다는 걸 몸소 겪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서로에 대해 자신을 낳아 기른 부모보다 더 자세히 알 정도로 말투부터 버릇까지 다 꿰뚫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조조는 당연히 진평에게 의심부터 가기 시작한다.

들킬 걸 알면서 뻔뻔하게 연차사유에 [ 집안 정기 모임 ] 이라고 거짓말을 적어놓다니. 집안 모임가는 거 싫어하면서...조조는 힐끗 진평을 쳐다보았다. 그렇게나 흔들리는 시선부터 가만히 두지 못하는 손 끝까지 티 나도록 꼭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애초에 내가 모를리가 없는 이유를 적어 놓은 저 뻔뻔함에 조조는 그의 속내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집안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잘 갔다 와. 어르신께 안부 전해 드리고."

 

서랍에 있던 도장을 꺼내 인주에 두 번 천천히 찍다 그대로 연차 신청서에도 똑같이 한 번 찍었다. 조조(曹操)의 이름이 결재칸에 선명히 새겨진 서류를 다시 돌려받자 진평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안도의 표정, 그 표정 속을 들여다보자 더 궁금해지기 시작한 조조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속은 줄 알았단 생각을 한 건지, 아니면 내게 들키기 싫은 일이 있는 건지, 둘 다 아니면 내가 일부러 거짓말 한 이유를 집요하게 물어보거나 뒤를 캐내어 알기를 원하는 건가? 자연스럽게 책략처럼 여러 경우의 수가 지나가지만 당장은 자신이 하던 일이 중요하기에 진평을 돌려 보낸 후 조조는 다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던 일이 어느정도 끝나니 어느 덧 저녁시간이 되었다. 오늘도 야근 확정이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의 처리되지 않은 서류가 한가득 쌓여있다. 연주땅에 그렇게 해야 할 일이 많나? 진궁, 순욱, 정욱, 진평 넷이서 맡은 분야의 서류를 우선적으로 처리를 해도 각 성에서 오는 군량, 예산, 법 등등 조조의 선에서 처리할 것들이 한 가득 넘친다. 그래 2시간 자고도 일 했는데.. 기지개를 쫙 펴고 다른 책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순욱이 문을 여는 조조를 보곤 표정이 밝아지며 펜을 놓은 후 기지개를 쫙 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씩 일어나며 오늘의 저녁메뉴를 주제로 대화를 여는 와중에 조조는 빈자리를 힐끔 쳐다보다 무심한 듯한 목소리를 낸 채 순욱에게 물어본다.

 

"진향은?"

"진선생님 먼저 퇴근하셨어요."

"보고도 안하고?"

"내일 연차라고 하시면서 바로 가셨어요."

"새끼...보고는 하고 가야지."

간다는 이야기조차 없는 것이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드는지 괜히 톡을 열어 진향의 대화를 확인한다. 업무관련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인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화가 난 마음에 뭔가를 쓰고 싶어 이것저것 자판으로 단어를 만들어보다 이내 다시 됐다며 마음을 가라앉혀 전부 지운 채 그대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어버렸다. 그런 반응을 아는 책사들은 놓칠세라 조조를 놀리듯 한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좋을 때지요~ 얼마나 놀고 싶겠어."

"조맹덕씨가 일로 괴롭히니 냅다 도망갔겠지."

 

한마디씩 잔소리를 얹는 책사들을 보며 조조는 다시 움찔했다. 생각해보면 그 것 보다 더 심한 말도 넘어갔는데, 욱 할 것도 아닌 것에 괜히 화나는 것이 더 약오르기 시작했다. 책사들 말 처럼 차라리 그런 단순한 이유라면 걱정이야 없을텐데, 한번 더 책상을 바라보다 그 생각 마저 그만뒀다.

 

저녁식사를 막 끝내려던 참에 우연히 주변에서 말하는 장안의 소식이 귀에 들어왔다. 여전히 난세였고, 장안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조조는 장안에 있던 시절의 진평이 생각나 간담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진평이 장안에 남아있었으면, 그때 진평이 자신의 부름을 거절했다면, 진평은 장담 못했을것이라고. 그 때의 망설임 없던 연락은 조조에겐 마지막 기회였고, 진평에겐 한 줄기 남은 빛이었다. 비록 엇갈린 부분이나 앙금이 남아있다해도 서로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문득 그 때의 날짜를 천천히 세다 마음에 걸려있던 문제의 힌트를 얻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지금이면 늦지 않을거라는 계산이 나왔고, 조조는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의자에 일어나 책사들 앞에서 말했다.

 

“오늘은 다들 퇴근합시다.”

 

*

 

초행길인지라 여기저리 둘러보며 천천히 올라갔다. 한적한 아침 산을 조금씩 천천히 둘러보며 길을 따라 올라가니 익숙한 뒷모습이 홀로 서 있는 걸 보았다. 햇빛에 비춰 은은하게 반짝이는 보랏빛의 뒷모습이 내가 찾던 것임을 확신시켜 더 빠르게 움직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반응한 듯 뒷모습은 고개를 돌렸고, 고개를 돌린 얼굴엔 역시 자신이 확신한 그 사람이 서 있었다. 놀란 기색보단 기다렸다는 말을 대신 하듯 특유의 고양이 입으로 살짝 미소지을 뿐이다.

 

"바쁜 거 아냐?"

"바빠."

"잘 찾아왔네."

"그렇게 티나는 걸 모르는 사람이 더 바보 아냐?"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보니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조조도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분명 진평의 첫째 오빠, 셋째 오빠의 이름이다. 이름을 보고선 허탈하게 미소지었다.

 

"집안 모임 맞네."

 

조조가 자연스럽게 묘 앞에 무릎을 꿇어 잔을 들어 올리니 진평이 자연스레 가지고 있던 잔에 소주를 채운다. 형님, 저 맹덕입니다. 오랜만에 뵙지요. 익숙한 자리인 듯 자연스레 대화하며 잔을 올린 후 절을 두 번 한 후 술잔을 들어올려 묘 주변에 뿌렸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적당히 물어보고 왔지. 명문 진가 고향인데 사람들이 모를리 있나."

“일은 어쩌고?”

“순선생한테 말 전해달라 부탁했지. 그런 넌 보고도 안하고 가냐”

“오면 보고하려고 했지.”

“어휴 저걸 진짜”

 

진평이 웃으며 자리에 앉아 소주 잔을 내밀자 자연스럽게 잡아들었고 잔은 넘치기 직전까지 가득 채워졌다. 가득 채워진 잔을 자연스럽게 입안에 전부 털어넣은 후 진평을 바라보니 잔을 들고 조조가 따라주길 기다리는 듯 팔을 뻗은 채 바라보고 있다. 이내 병을 넘겨받더니 진평의 잔이 아닌 자신의 잔에 한번 더 채워 또 털어넣었다.

 

“안돼. 넌 나중에 운전해.”

“나 여기서 자고 갈건데? 토 일 쉬잖아.”

“망할”

 

한 대 쥐어박을까 했지만 피식 웃곤 포기해버렸다. 그래. 다음주에 죽지. 한 가득 진평의 잔을 채우니 망설임없이 쭉 들이킨다. 하고싶은 말은 많은데 막상 무슨 말을 해야할지 딱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너에게 해야할 이야기와 사과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한 번 꺼내게 되면 나도, 너도 같이 무너질 것 같았다. 누구 하나는 짊어지고 나아가야 한다면 그 것이 나인 게 낫다. 조조는 말 없이 잔만 채우고 마시는 걸 반복할 뿐이다. 먼저 기류를 느낀 건지 입을 여는 건 진평이었다.

 

“하지마.”

“뭘”

“지금 니가 생각하고 있는 거.”

“내가 무슨 생각 하는 줄 알고.”

“나약한 생각. 아니면 말고”

 

마지막 잔을 마시고선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분명 내 생각을 읽은 것이라 조조는 생각했다. 아니 애초부터 내가 도장을 찍을 때 부터 여기로 올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너를 꿰뚫어보듯 너도 나를 꿰뚫어보는구나. 조조는 자신이 첫 번째로 택한 진평의 계책에 괜히 뿌듯해졌다. 역시 너는 내 사구나. 마음에 항상 품고 있는 그 말만을 반복할 뿐이다.

 

“맹덕아 2차 가자.”

“대낮부터.”

“뭐 어때.”

 

여느날과 같이 함께 보내던 따뜻한 햇살이 비추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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