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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이건 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존재 자체가 거짓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건 루아 살로메의 ‘나쁜 버릇’이다.
 루아 살로메는 소이겸이다. 루아 살로메는 차원 단위로 분리되어 ‘있었던’ 이방인이다. 소이겸은 루아 살로메로 두 번의 삶을 살았다. 한 번은 지구에서, 한 번은 지구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그리고 이름을 매개로 삶이 이어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소이겸은 ‘이름’의 무게를 절감했다. 모니크에게 루아, 라고 불릴 때마다 소이현의 루아, 하는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겹쳐졌다. 살로메, 라고 불릴 때에는 살로메 양-Miss. Salome-, 이라고 불렀던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이름으로 수렴해. 그러니까, 이름은 그 사람을 이루는 구성요소의 전부인 거야. 모니크와 소이현의 다정함이 같을 때마다 루아는 아주 예전에 들었던 말이 맴도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래서 루아 살로메는 요카난 샤펠리에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요카난을 볼 때마다 생에 대한 집착이 생길 것 같았다. 루아 살로메는 철저하게 유령으로만 존재해야 했고 그러려면 미련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시선이 얽히면 순식간에 원점이었다. 루아는 집요하게 쫓아오는 요카난의 눈동자 속에서 아득함을 마주했다. 기묘한 공포가 벽 안으로 자신을 자꾸 밀어 넣었다. 루아는 잠든 요카난의 속눈썹을 훑으며 생각한다. 눈꺼풀 아래 아주 거대한 공간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고양이처럼. 

 


 그날 밤 루아는 오랜만에 소이겸의 기억을 꿨다.
 소이현은 희곡집을 들고 있었다. 빌려온 책이었는데 표지에 적힌 <오스카 와일드>의 흰 글자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방안은 좁고 습했다. 책처럼 색이 바랜 선풍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소이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앓는 소리를 내다가, 턱, 하고 침대를 다리로 내려쳤다. 소이현의 다리에는 막 눌어붙은 딱지가 잔뜩이었다. 너덜너덜하다. 그 표현이 방 안에 있는 대부분의 것을 묘사하기에 적당했다. 멍은 수를 세는 것이 의미가 없다. 백지에 물이 들듯이, 그렇게, 드문드문, 그냥 퍼져 나가는 것이다. “조심해…….” “안 아파.” 소이현은 무던한 입 모양을 하다가 히죽 웃더니 몸을 휙 뒤집어 얼룩진 얼굴을 한 소이겸과 눈을 맞췄다. 

 

 “살로메는 뭘 하고 싶었던 것 같아?”
 “언니.”
 “나는 말이지, 처음 시작도 그렇고, 사실 살로메가 죽어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야. 주변은 온통 자신을 시체로 만들 뿐이잖아.” “…….”
 “그런데 요카난은……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아. 시체처럼 무덤 속에 있는데 왕이 무서워하면서도, 심지어는 고고하기까지 해. 추상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그런 절대적인 변수의 존재를 살로메가 사랑하는 건 불가항력이라구……. 그리고 감정은 사람을 살아 있게 만들지.”
 “…….”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자신을 살아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에게 거부당하는 거. 얼마나 두려웠겠어? 요카난을 죽인 게 거부로부터의 도피, 동시에 살아 있기 위한 발악이었다고 생각해 본다면, 살로메는 얼마나 처절했을지.”


 선풍기의 덜그럭거리는 소음이 정적을 메웠다. 소이겸은 소이현을 흘겨보다가 크게 호흡했다. 쿰쿰한 냄새가 났다. “결국 둘 다 죽었잖아.” “결국 둘 다 죽었지만.” 다 아물지 못한 상처에서 진물이 나오는 게 보였다. 소이겸은 숨을 삼켰다가 연고를 찾았다. 마찬가지로, 너덜너덜했다. 연고를 돌돌 말아 짜내며 살아있는 시체에 대해 곱씹었다. “언니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아프지 않고.” “나도 해피엔딩이 좋아. 이건 영 내 취향이 아니더라구.” 

 


 루아는 기억을 떠올린 이후 눈을 뜰 때마다 무덤에서 일어나는 듯한 감각을 수반해야만 했다. 벽의 반대편은 낭떠러지다. 루아는 모니크의 죽음으로 수렴했던 모든 감정과 기억이 뒤섞이는 걸 느끼며 끊임없이 분리를 상기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루아 살로메는 실존하지만 본질은 처음부터 유실되어 있다. 이건 그 습관의 심화 버전이었다. 요카난 샤펠리에라는 단어는 융합을 초래하기에 너무나 충분했으므로 해체 관성은 갈수록 거세졌다. 
 그러나 어느 날 요카난은 잠에서 막 깨 향을 갈고 있는 루아에게 대뜸 “나쁜 버릇입니다.” 말했다. 오래 참고 있었던 것만 같은, 억누른 목소리였다. 루아는 그 순간 요카난의 그림자에서 거대한 유실물 센터를 목도하고야 만다. 진실이었던 명제가 뒤집힌다. 잃어버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요카난이 부재 자체에 대한 반동을 알아챈 것은 예상하지 못한 지점이었다. 루아는 일전에 마주했던 아득함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존재 자체가 거짓이라면, 진실로 만들어버리는 변수의 존재. ……추상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그런 절대적인 변수의 존재를 살로메가 사랑하는 건 불가항력이라구……. 그리고 감정은 사람을 살아 있게 만들지. 이제 루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요카난은 기괴할 정도로 예민했다. 무력하다. 왜 너는 나를 계속 욕심내게 만드는지. 요카난의 눈가가 붉었다. 잔뜩 구겨진 옷은 말라붙은 피로 엉망이었다. 어제 들이지 말 걸, 후회감이 입안을 바싹 말렸다.


 “……나는 정말 망령으로 남아 있으려고 했어.”
 “당신이 지나칠 정도로 무감하다는 건 압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스스로를 단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그래요, 불쾌합니다.” 
 “…….”
 “이건 아주 간단한 일이에요.”


 실존에서 본질을 꺼내는, 이 말도 안 되는 행위는 찰나처럼 행해진다. 루아는 평생 경험하지 못했을 거리라 믿었던 것들이 모든 신체를 뒤덮고, 죄다가, 눅진하게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루아.”


 사랑하고 있어요. 루아는 맥이 풀렸다. 요카난의 행한 일련의 행위는, 그의 말처럼 정말 간단했으므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 루아가 요카난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요카난이 사르르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모양이다. 유칼립투스 향이 진하게 다가오는 순간, 루아는, 아무래도 좋다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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