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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이는 비유나 가정 따위가 아니라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는 사람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눈을 지녔고 나는 기민하여 눈치가 빨랐다. 손등에 새겨진 영주로 단단히 묶인 사이에 감정마저 얽혔으니 우리 사이는 지나치게 가까웠으며, 시도 때도 없이 목숨을 위협하는 곳을 드나드느라 거짓을 고할 여유도 없을 뿐더러 이유도 없었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화려한 색채의 어느 영령은 그랬다. 거짓 없는 사랑은 불안할 뿐이라고. 그러나 두 사람이 눈을 감고 서로를 보지 않는 한 둘의 관계에서 거짓이란 있을 수 없었으며 지금 상태에서 변화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뭐 어떨까. 상관없다. 둘뿐인 관계에 사랑뿐이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하지만..... 생각을 이어 나가다가, 끝내 침대 위로 엎어졌다. 애써 그 주제를 머릿속에서 밀어냈으나 끈끈하게 자리 잡은 생각은 떠날 기미가 없었다. 이런저런 것들이 뒤섞여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얀 방 내부에 정적이 흐른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서 멀미가 날 것만 같았다. 결국 눈을 감았다.

 


  "마스터?"

  나직한 부름이다. 유성은 눈을 떴다.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베개에 파묻었던 고개를 슬쩍 들었다. 단박에 눈이 마주칠 것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예의 그 검은 눈은 슬쩍 자신을 벗어나 있는 채였다.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의 배려임이 분명하여 낮은 소리로 웃었다. 나름은 유쾌한 웃음이라 생각했으나 듣는 이에겐 아니었는지, 단박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큼직한 손이 이마를 덮는다. 어디 아파?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아라쉬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여전히 시선은 유성에게서 벗어난 채였으나, 정곡이었다. 유성이 도로 배게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쯤되면 그냥 들여다보고 말해도 될텐데. 웅얼거리는 말에 아라쉬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넌지시 던졌다. 정말 그래도 돼? 아니. 칼같이 따라붙는 대답에 아라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찬찬히 웃었다. 유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두툼한 솜 배게에 묻혀 한숨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숨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별 거 아냐."

  "안 볼게. 알려주면 안돼?"

  "......"

  "진짜로 안 볼거야."

  그가 이렇게까지 얘기한다면 유성도 물러날 길이 없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제 한 몸 부서지도록 화살을 쏘았다던가. 퍽 무시무시한 전승이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직하고도 올곧은 그의 성정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시이기도 했다. 아마 지금 얼렁뚱땅 넘어간다면, 내색은 않겠으나 제가 말해줄 때까지 절 안 보려 할 것이 훤했다. 결국 유성이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은 아라쉬의 등에 기대어 앉았다. 천장을 쳐다보는 그의 손을 끌어다가 꽉 쥐었다.

  한차례 정적이 흘렀다. 아라쉬는 말이 없었고 그건 유성도 마찬가지였다. 문 밖으로 인기척 두어 개가 지나친다.

 

  "...그냥, 불안해서."

  한번 터진 말문은 도저히 닫힐 줄을 몰랐다. 불안해, 그래. 네가 내게 말하는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 네가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불안하고, 만약 네가 사라진다면 나는 널 찾지 못한다는 게 불안해. 그냥, 다. 그런거야. 겨우 입을 다문 유성이 손에 고개를 묻었다. 뱉었던 말들이 그대로 불안이 되어 허공을 떠도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등에 닿은 온기가 사라질 것만 같은, 그런.

  천유성은 기본적으로 겁이 많은 인물이다. 23년 평생 그렇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그 성정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랬다. 아라쉬는 절 들여다보지만 자신은 그저 유추할 뿐이다. 저는 아라쉬를 사랑하지만 아라쉬는, 그래. 솔직히 말해 모른다. 거짓을 고했을지, 마스터와 서번트 간의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맞추어 주고 있는 셈인지.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그런 불안과 걱정은 조용히 침잠하여 마음 깊은 곳에 켜켜이 쌓였다. 그게 이제야 터져 나온 것뿐이다.

  아라쉬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유성에게 등을 내준 채로 침묵을 지켰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느리게 입을 열었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모양새였다. 

  "....미안."

  꽤 오랜 고민이었으나, 결국 그 끝에 남은 건 짤막한 사과였다.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내놓은 답이었다. 가만 듣고 있던 유성이 앓는 소리를 내며 아라쉬의 등에 힘주어 기댔다.

“나빴어.”

“알아.”

  한 차례의 정적이 더 흘렀다. 아라쉬가 돌아앉았다. 저를 등지고 앉은 유성을 가볍게 들어다 품에 안는다. 몸에 힘을 푼 유성은 쉽게도 아라쉬에게로 파고들었다. 유성. 응. 아라쉬가 불렀고 유성은 대답했다. 아라쉬는 더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약속하지. 나는 절대로 네게 거짓을 고하지 않아. 그리고, 몇년이 흐르더라도. 설령 네가 내 곁에 없더라도. 난 너를 사랑할거야. 

  부드럽고 맹목적이기 그지없는 언어였다. 믿지 않을 수 없는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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