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당신의 기억 속에는 분명 자신이 아닌 그 사람과 함께한 기록이 새겨져 있었고, 그 사실만큼은 어떻게 노력해도 바뀌지 않았다. 이안 해리스라는 사람은 본질이 기록 속 그 사람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거짓을 고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분명 그를 밀어내고, 속이려 했다. 이 감정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만 했지만, 사실은 두려웠다. 자신의 모습이 아니게 되는 것만 같아, 그녀의 감정에 동화된 채로 길을 헤매는 것 같아서.
인간은 자신의 자아와 직면해 성찰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에서 자신에게 의문이 생기는 건 아주 당연했다. 이곳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안 해리스는 엄밀히 따지자면 누군가의 편린에 불과하였으니까. 인류 최후의 마스터를 포함해, 스태프들의 의료 검진 차트를 확인하던 여자는 문득 의료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훤칠한 키에, 시원스러운 외모.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영령 쿠 훌린. 켈트 신화에서 나오는 대영웅이자 자신의 감정을 복잡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 되는 사람이었다. 원치 않게 그와 함께했던 누군가의 시간을 알고 있는 여자로서는 그의 태도가 언제나 문제였는데,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자꾸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와 자신과의 사이에는 거짓이 없었다. 있을 수가 없었다, 새겨진 기록과 경험으로 만들어진 이안 해리스라는 자아에 그의 영향이 없을 리가 만무했다. 그가 자신이 그녀의 편린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때부터, 이안 해리스는 영령 쿠 훌린에게 이끌렸다. 그렇기에, 사실 마음 한구석에서 그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걸 그렇게 원하지 않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아는 주제에, 그와 마주하면 먼저 굳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어색한 몸짓으로 차트를 무릎에 내려놓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부름에 네? 라며 답했다.
“뭔가, 고민이라도 있어? 안색이 내내 안 좋아 보여서.”
“아……. 아뇨, 별다른 일은 없었으니까요. 일이 좀 많아서, 피곤해서 그렇지.”
자연스럽게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어주는 것에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싫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와 닿을수록 스스로 정립시킨 자아와 기억 속의 그녀가 엉망으로 뒤엉켜 녹진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을 당장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상태를 바로 알아차리고 자신을 배려해주는 그의 태도였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답답함에 제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가씨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와 …를 헷갈려서 하는 행동이 아니니까.”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나 자신도 장담하지 못하는걸.”
“원한다면 맹세(Geis)도 해줄 수 있고?”
“아니, 무슨……. 최대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맹세를 그렇게 쉽게 말해요?”
“그만큼 진심이라는 이야기지! 어때, 이제 믿겠어?”
정말로 그의 저런 말에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색의 눈동자와 슬쩍 올라가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 자신의 기분을 재빠르게 알아차리고 분위기를 바꾸는 것까지. 무엇하나 흠잡을 것 없는 사내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랜서. 그런 말을 툭 던지고 여자는 애써 대영웅에게 눈을 돌리려 필사적으로 차트를 바라보았다.
이안 해리스라는 편린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였으니까.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에 대한 감정 역시 되돌릴 수 없기 전에 멈춰야만 했다. 애초에 자신이 그에게 티를 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관계가 어정쩡해질 일도 없었을 텐데. 전부 자신의 업보였지만……. 역시 마주하는 건 괴로웠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기분에 발목을 잡혀 감정의 진흙탕에 끌려갈 여유 같은 건 지금의 자신에게 너무나도 사치였고, 그렇게 무너지기엔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가 확실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리츠카는 지금 뭐 하고 있어요?”
“마스터? 아, 아까 마력 소모가 심해서 좀 자고 싶다는 걸 방패 아가씨가 데려다주는 걸 봤지. 이래저래 난전에 연전이었으니까. 마력 소모가 심한 것도 당연한 일이야.”
지독하게 난전이었고, 연전이기는 했다. 덕분에 사령관 대리로써 현장을 보조하고, 존재증명을 위해 뛰어다니던 자신의 상사는 그야말로 야근과 격무에 시달린 끝에 현재 그 역시 반강제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영령들이야, 이 정도 전투는 컨디션에 크게 지장이 오지 않겠지만 얼마 남지 않은 소수 인력으로 그들을 보조하는 평범한 인간의 입장은 죽을 맛이라는 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아 안경을 잠시 벗고 그를 보았다.
“아가씨.”
“네, 랜서.”
“정말로, 나한테 하고 싶은 말 같은 건 없어?”
“…….”
할 말이라, 하고 싶은 말이라면 많겠지만 여자는 이 감정에 대해서 입 밖으로 내뱉고 싶진 않았다. 말하는 순간 무너져서, 감정의 늪에 그대로 가라앉아버릴 것이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테이블 옆에 안경과 차트를 내려놓고 여자는 애매하게 웃었다.
“랜서. 당신은 나를 몰라요, 그렇죠?”
“불리하면 그런 말을 하네. 지금의 아가씨라면 알고 있지. 어디까지나 지금 이곳에 서서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건, 지금의 나와 아가씨인데 뭘 두려워하는 거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요. 랜서, 당신 말대로 이곳을 살아가는 건 …가 아니라, 이안 해리스이고 그 이안 해리스는 그때처럼 인류 최후의 마스터도 아닌 평범한, 그저 평범하게 타인의 생명을 짊어진 의사고요. 이곳에 와서, 지키고 싶은 것들이 많아진…. 정말로 그저 평범한 사람이니까.”
감정을 숨기려 모진 말이 튀어나온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야속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듣고 있던 그의 표정이 어땠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볼 면목도, 자격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와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던 자신의 비겁한 방어기제겠지. 그가 알겠어, 지금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 것 같네. 하며 의료실을 떠난 후에 여자는 마른 한숨을 내뱉으며 양손으로 다시금 제 얼굴을 가렸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느껴져서, 애써 닦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채로 만났다면, 이런 감정을 가질 일도 없었을 텐데. 그를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어서 자꾸만 모진 말을 내뱉고 그를 밀어내는 자신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가 속절없이 원망스러운 그런 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