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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토루 루트 일부 스포일러 주의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사토루는 눈을 감았다. 이곳에서 기억을 잃은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했다. 네가 아는 내 모습은 지금의 나였다. 그런 너와 나는 우리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니 거짓은 없었다. 하지만 너는 알까?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고, 네가 사랑에 빠진 것도 내가 아니라는 것을. 언젠가는 이 관계도 끝이 오리라는 것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대체품에 불과했으니까. 유즈하가 기억을 되찾는다면, 이런 소꿉놀이는 그만두어야지. 그것은 이곳에 끌려와 기억을 잃은 그녀를 발견했을 때부터 마음먹었던 것이니까. 아무런 후회는 없을 터였다.

정말 후회하지 않아? 마음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그날 밤 그는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유즈하, 나를 사랑해?"

만나자마자 대뜸 그리 물었다. 유즈하의 얼굴이 점점 붉게 변했다. 아무래도 창피한 거겠지. 사토루는 그런 유즈하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입에서 저를 사랑한다는 소리가 나오기를 바랐다. 그와 동시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어쩜 이리도 모순적일 수가 있는가. 사토루는 자신을 질책하는 한편 유즈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당연하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어떻게 사귀어."
"그런 거겠지? 괜한 걸 물었나."
"무슨 일 있어? 오늘 좀 이상해."

역시 그 감은 어디 가질 않는구나. 사토루는 그리 생각하며 얼버무릴 심산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 오늘도 열심히 자료 조사 해야지. 그의 의도대로 유즈하는 방금 전의 일은 잊고 당황하더니 그에게 이끌려 서재로 향했다. 아무리 많이 조사를 해도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큰 서재는 평소와 같았다. 오늘도 움직이는 책을 찾아야지. 유즈하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혹시라도 움직이는 책을 찾으면 만지지 말고 나를 불러줘. 책 속으로 들어가더라도 요괴를 쓰러트릴 수 있는 사람이 같이 들어가는 편이 좋잖아."
"…응."

사토루를 부르지 않고 실수로 유우와 둘이 책 속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린 것인지 유즈하가 조금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기운없는 모습에 사토루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그런 건 오랫동안 기억한다니까. 빨리 잊는 게 좋을텐데. 

"정신 차려."
"아야!"

가볍게 꿀밤을 먹이자 유즈하가 두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아픈 연기를 했다. 그 익살스러운 모습에 사토루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정말 변한 게 없구나. 그래, 예전부터 그렇게. 사토루는 유즈하의 모습에서 과거를 보았다. 그러나 유즈하는 자신에게서 과거를 볼 수 없겠지. 사고가 부정적인 쪽으로 향하자 사토루는 고개를 몇번 젓더니 다시 유즈하를 바라보았다.

"자, 꾀병 그만 부리고 이제 일해야지?"
"음…, 들켰어?"
"당연하지." 

사토루가 뒤돌아 자신의 구역으로 가려 하자, 유즈하가 그를 붙잡았다.

"유즈하, 점점 13시에 가까워지고 있어. 지금은 장난칠 때가…"
"장난치는 거 아니야. 사토루, 유우가 없어. 토모리 씨도."
"…정말이네. 유우야 그렇다 쳐도 토모리 씨가 없는 건 좀 이상한데."

그때 유우가 서재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어왔다. 유우는 급하게 뛰어온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사토루와 유즈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유우가 어느정도 숨을 고른 뒤 소리쳤다.

"큰일이야! 식당에… 엄청 커다란 아야카시가 나타났어!"
"…뭐?"

사토루가 물었다. 유우도 많이 당황한 듯, 허공에 이리저리 손짓을 했다. 뭔가 설명하려는 듯 했지만 두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우,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줄래?"
"……"

사토루가 다독이자 유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긔고 한층 진정된 듯한 모습으로 사토루와 유즈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식당에 갑자기 엄청 큰 아야카시가 나타났어. 에이지랑 렛카랑, 토모리가 싸우고 있는데… 다들 힘들어 보여.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방해될 것 같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 대피시키라고 토모리가……."
"그래서 이렇게 우리를 데리러 와 줬구나. 잘했어, 유우."

 

 

사토루는 유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우는 눈물을 참고 있는 듯했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을 몇번이고 꾹꾹 눌렀다.

"그럼 나는 식당으로 갈게. 너는? 유우랑 같이 갈래?"
"…나도 식당으로 갈래."

너 다치면 어떡해, 유즈하가 덧붙여 말했다. 사토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유즈하의 손을 잡았다.

"내가 많이 다치더라도 네가 위험할 상황이 온다면 날 버리고 도망가. 알았지?"
"……응."

싫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사토루에게서 멀어질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즈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유우는 아래층으로, 사토루와 유즈하는 위층으로 흩어졌다. 식당에 올라가니 과연 지금까지 보았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크기의 아야카시가 있었다. 토모리와 렛카, 에이치는 이미 지친 것 같았다. 사토루가 뛰어들어가 물었다.

"토모리 씨! 괜찮으세요? 도와드릴게요!"
"아, 사토루랑 유즈하구나. 다행이야. 마침 우리들도 힘이 부족하던 참이었거든."

사토루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자신의 육법전서를 펼치고는 읊기 시작했다. 지친 세 명이 공격했을 때보다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기세를 몰아 사토루는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야카시는 한동안 반항도 못한 채 피해를 입는 것 같았으나 이내 폭주하기 시작했다. 검은 오라가 이곳저곳으로 날아가고, 큰 아야카시의 몸체에서 작은 아야카시가 태어나기도 했다. 한 검은 오라가 사토루를 향해 날아갔다. 사토루는 몸을 틀려 했으나 그것의 속도를 이길수는 없었다.

툭.

가볍게 스친 것도 같았으나 그 상처는 꽤 깊었다. 사토루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듯했다. 저도 모르게 책을 떨어뜨리고 그 손으로 자신의 상처를 지혈하듯 눌렀다. 손가락 사이로 벌건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토루!!"

유즈하가 소리치며 사토루에게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아야카시의 시선을 자신들 쪽으로 끌어갔다. 그 사이 유즈하는 사토루에게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했다. 사토루는 면목없다는 듯 웃었지만 유즈하는 그것을 살펴볼 정신도 없었다. 손을 바들 떨며 처치에 집중했다. 치료를 마치고 사토루가 일어서려 했으나 유즈하가 그를 말렸다. 

"사토루, 많이 다쳤어."
"이 정도 상처 쯤이야… 별 것 아니야……."

그리 말하는 사토루는 힘이 없었다. 유즈하가 열심히 응급처치를 했지만 분명 상처가 악화되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

"여기서 무리했다간 상처가 또 벌어질거야."
"…괜찮아. 무리하는 게 내 특기잖아?"

사토루가 시원하게 웃었다. 유즈하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모습에 마음이 불편했으나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사토루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유즈하가 따라 일어서자 그는 약간 비틀거리며 유즈하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유즈하, 대답해줘."

사토루가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쳤다. 유즈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금방이라도 떨어질것만 같았다. 유즈하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토루가 급히 끌어안았다.

"나를…, 사랑해?"

네가 어떤 대답을 하던지 이 한몸 바쳐 너를 지킬 테지. 사토루는 유즈하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역시 네 대답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왕 이렇게 시작한 관계라면 거짓따위 없는 채로 끝내버리자. 사토루는 유즈하에게서 떨어져 자신의 육법전서를 다시 펼쳤다. 지겹게도 싸워온 것들과 작별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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