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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뒤의 이야기

 

 

written by. 나찰

뮤지컬 프랑켄슈타인(2018) 괴물x에스텔

 

 

+ 극의 내용, 결말과 관련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읽지 않으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글쎄, 특별히 의식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 말은 아니었다. 클레르발 부인, 에스텔은 오늘따라 마을에 내려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H를 생각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언제 봐도 스산한 풍경이었다. 지역 자체가 원래 이런지, 성 주변이 음산해서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

평범히 짐작해본다면 당연히, 마을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느라 늦어지는 것일 테다. 그러나 H는 마을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처럼. 그렇기에 그 추측은 가능성이 낮았다. 그렇다면 무언가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가짜라고는 해도 성주 부부 행세를 하고 있는 만큼 귀족처럼 행동하는 게 중요했다. 즉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도 전갈을 받지 않는 이상 안주인까지 나서 마을에 내려가 무슨 일인지 둘레둘레 알아보는 것은 좋지 못한 선택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언제 우리가 남들 눈을 신경 썼던가? 부인은 입이 무거운 집사를 한 명 데리고 나갈 채비를 했다. 우아하게 가라앉은 주름이 섬세한 남색 드레스, 너무 화려하지도 수수하지도 않은 목걸이와 귀걸이, 새끼손가락에 낀 약혼반지, 어깨에 두르는 술 달린 푸른 숄, 성 안에서는 뻗친 채로 풀어두고 다니는 머리칼을 잘 올려 묶은 다음 입술과 눈가에만 붉은 것을 살짝 바르고서 성을 나서는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귀부인이었다. 물론, 밖에 나가지 않을 때엔 바깥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스타일의 옷을 입고 마음껏 성 안을 활개치고 다니지만.

 

"근래 들어 마을에 무슨 소문이 돌지는 않나요?"

"특별히는... 본디 이런저런 뜬소문은 늘 있는 법이니까요."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그러고 보면, 지난번 식자재를 들여온 상인이, 화려한 차림새를 한 부부가 마을에 들어와 머물려고 한다는 이야길 해 주었습니다. 하도 행색이나 거동이 수상해 다들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이방인을 배척하는 것은 여전하네요."

"죄송합니다, 부인."

"당신이 사죄할 일은 아닌걸요. 괜찮아요. 저도 이 마을 사람들과는 깊게 엮이기 싫기도 하고."

 

집사는 숙였던 허리를 곧게 펴며 다시 부인의 한 걸음 앞에서 앞장섰다. 타고 온 마차는 마을 어귀에 댄 채였다. 그 집사도 이 마을 출신이고, 그녀와 H는 마을 사람들의 배척을 가장 심하게 받았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을은 마지막으로 내려와 보았을 때와 변함없이 여전히 살풍경했다. 사람들은 생기가 없었고 누구 하나 웃으며 지나가지 않았다. 날씨가 자주 궂은 곳이긴 해도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러니 누가 여길 자진해 오려고 할까. 그래서 더욱 그 소문의 주인공인 부부가 궁금하기는 했다. 우선은 H를 찾고 나서 알아볼 일이지만.

분명 약품을 구하러 간다고 했는데. 약재상이 어딘지 집사에게 물으려던 부인은 맞은편의 가게에서 실랑이를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 여자와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차림을 한 보라색 장발의 남자가 가게 주인과 무언가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 그러니까 우리가 어딜 봐서 수상하냐고!

- 댁 하고 있는 꼴을 봐, 안 수상하게 생겼어?

- 이건 수상한 게 아니라 미美야! 아름다운 것도 못 알아보는 안목으로 무슨 물건을 팔겠다고.

- 허, 참나! 그럼 딴 데 알아보쇼!

- 자크, 좀 꺼져봐. 이봐, 당신. 우린 돈이 있고, 저걸 좀 사겠다는 것뿐인데 왜 안 돼?

- 외지인한테는 안 팔아! 그게 우리 가게 방침이야!

- 아니 이 수염탱이가! 에바, 저 자식 아주 혼을 내 줘!

- 내가 입 닥치고 있으랬지, 자크.

- 뭐, 수염탱이? 어디서 이 얍삽하게 생긴 게! 댁들 부부요? 허이구, 부부가 아주 쌍으로 희한한 꼬라지네.

 

상인의 말에 눈을 희번덕하게 뜨던 여자가 순간, 상인의 어깨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뭐야, 괴물 새끼 아냐? 여자의 시선 끝에는 부인이 찾던 남자, H가 있었다. H는 부인보다 여자를 먼저 발견했는지 몹시 놀란 표정을 하고, 잠시 그 자리에 굳었다가, 자리를 피하려는 것처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여자는 그를 그냥 보내주지 않을 셈인 듯했다.

 

"야, 괴물!"

"..."

"자기야, 왜 그래? 헉, 저거 그 때 그 괴물 새끼네! 왜 여기 있담?"

"내가 어떻게 알아? 그 때 네가 확실하게 처리 안 했지? 이 화상, 너 진짜 집에 가면 맞는다."

"아, 아니, 난 자기가 갖다 버리라길래 버렸는데 그 다음에 격투장에 불나고 해서 정신이 없었지이..."

"변명은 집에 가서 해. 됐고, 괴물 너 이 새끼 뭘 했길래 아직 안 죽었어?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손해 봤는지 알아?"

"..."

 

H는 멈춰선 채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확 구겨진 미간은 그가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음을 뜻했다. 클레르발 부인은 굳이 자신이 와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서 그 광경을 구경하듯 바라보았다.

 

"왜 말을 안 해? 입이 붙었냐? 아, 하긴. 말 같은 거 모르셨지, 참. 그래서 이번엔 누굴 꼬드겨서 살고 계시나? 보아하니 입은 옷도 꽤 좋은 것 같은데. 우리가 너 때문에 좀 많이 어려워졌거든. 같이 좀 돕고 살자?"

"맞아맞아, 괴물 새끼 너 때문에 돈도 못 벌고 빚도 못 갚고 쫓기는 신세가 됐단 말이야!"

"자크, 너는 입 안 여는 게 도와주는 거야."

"자기 너무행."

"아! 그러고 보니 까뜨린느 고 계집애, 기억은 하니? 너랑 붙어먹었다가 들키니까 순식간에 널 버렸잖아?"

"그러게~ 어떻게 괴물이랑 정분이 나겠냐고 막 시끄럽게 울고불고 하더라구."

"걱정하지 마, 걘 내가 친절하고 상냥하게~ 자비를 베풀어서 말 먹이로 줬거든."

 

처음 듣는 이름이 대화에 등장했다. 까뜨린느, 그런 사람 얘긴 해주지 않았었는데. 잊은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H는 아주 화가 난 표정을 하고 당장이라도 여자를 찢어 죽일 것처럼 성큼성큼 다가갔다. 여자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고, 옆에 있던 남자는 제 부인을 데리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H가 가까이 오는 것이 더 빨랐다.

H는 핏줄이 도드라진 큰 손을 들어 올렸다가, 여자의 어깨 너머로 클레르발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 맺혔던 폭력이 단숨에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부인이 집사를 힐끗 바라보자 집사가 얼른 클레르발 남작에게 가 무어라고 귓속말을 전했다. H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면서 부인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인은 태연했고,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는 것처럼 집사에게 저 가게에 가 물건을 사 오라며 명을 이르는 것이었다.

 

"... 에시."

 

집사가 가게에 들어간 동안 외지인 부부는 뭐가 그렇게 놀랄 일인지 눈이 휘둥그레했고, H는 그의 부인에게 잘못이라도 한 듯 감히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서 애타게 이름만 겨우 부를 뿐이었다. 클레르발 부인은 생글 웃으며, 남작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돌아오는 게 늦어서 마중 나왔어요, 살 것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뭐 하느라 늦었어요?"

"그게... 책을, 고르는 게 길어져서."

"무슨 책?"

"접합, 에... 관련된, 것이었어."

"흥미로운 내용이었나 봐요. 나중에 저도 보여줘요."

"응."

"약품은 다 샀구요?"

"응,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알면 됐어요. 다음엔 꼭 연락 보내줘야 해요. 걱정했잖아요."

"미안..."

 

H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부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제법 태가 나는 동작이었다. 마치 정말로 귀족인 것 같은 몸짓, 이전의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부인은 붉은 옷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가 무언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한 번 웃어주고서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마침 집사가 물건을 들고 가게를 나와, 클레르발 남작 부부는 그들의 집사와 함께 그들의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로 향했다. 뒤에선 가게 주인이 여전히 외지인 부부에게 물건 안 파니까 돌아가라느니 하고 있었지만 남작 부부가 알 바는 아니었다.

 

"H."

"응?"

"저한테 그 사람 이야긴 안 해줬잖아요. 까뜨린느."

"아... 에시가, 싫어할, 것... 같아서."

"당신 이야긴데 제가 어떻게 싫어하겠어요? 우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기로 했는걸요."

"... 이런 날... 무섭지 않다고 해준, 첫 번째 사람이었어."

"좋은 사람이네요."

"... 그랬어."

 

H는 무언가 아득히 멀리 있는 것을 떠올리는 것처럼 마차 창밖을 바라보았다. 에스텔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살며시 기대며, 눈을 감았다.

 

"이따 성에 돌아가면 더 자세히 이야기해줘요."

"그럴게."

 

그녀는 그의 입술이 머리칼에 닿는 것을 느꼈다. 어느 새 창문으로 빗방울이 부서졌지만, 클레르발 성까지는 이제 곧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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