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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그런 걸 쓰지 않아도 곧 이 이야기의 밖으로 밀려나 나는 너에게 아무 것도 아닌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고 말 테니까.

 

그러니 그런 걸 신경 쓰기보다는 눈앞에 주어진 일에 집중해주지 않겠어?

 

 

 

 

 

* * *

 

 

 

 

 

타카토라는 종종 P에 대해 생각했다. 헬헤임과의 조우 이후 가장 기묘한 형태의 만남이었으므로 기억에 남지 않을 리 없었다.

 

본인을 ‘P’라고 소개했던 여성은 본명을 밝히지 않은 채로 이그드라실의 사옥 내에 불쑥 나타나 개발되지 않은 종류의 록시드를 타카토라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보안 카드도 없이 어떻게 이 곳에 들어왔는지는 물론 중요한 문제였으나, 그녀가 손에 든 것은 앞으로의 개발 라인업에도 들어가 있지 않는 물건이라는 게(이것만으로도 료마는 눈에 띄게 거부감을 드러내 보였다.) 가장 큰 문제였다. 컨트롤할 수 없는 록시드가 존재한다는 것은 미래의 불안 요소. 그렇기에 타카토라는 P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게 계약을 제시한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는 P가,

 

“당신이, 쿠레시마 주임이지. 잘 부탁할게?”

 

자신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쿠레시마 타카토라는 어디서 정보가 샜는가를 먼저 생각했다.

 

이그드라실 코퍼레이션이 세간에 보이고 있는 이미지는 의료 분야를 메인으로 내세우고 있는 다국적 기업이었고, 그 본질은 비밀에 쌓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헬헤임에 관한 사항 및 그를 저지하기위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정보는 극비에 부쳐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인원만이 차등 적용된 록을 해제하고 접근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민간인이 함부로 다루거나 입에 올릴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애초에 록시드는 비트 라이더즈의 유흥을 위한 물건으로 배포되었을 텐데. 그렇기에 사고에 대비하여 더욱 종류를 선별하고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리스트의 관리 및 보관은 바로 자신에게 정보가 들어온다. 지금까지 이그드라실에서 만들어 낸 록시드는 전부 알고 있었다. 유통을 담당하는 시드의 카탈로그 등재 용 공개 록시드와, 아직 공개할 수 없는 것과, 폐기된 것과,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그 어디에도 등록되지 않은 록시드.

 

어떻게 이걸.

 

그 일전에, '쿠레시마 주임'이라고 자신을 부를 때에도 의문이 아닌 확신에 찬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았나.

 

“조금만 놀다가 알아서 갈 테니까. 정말로 조금만.”

 

그렇다면. P의 말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믿을 수 없는 이유의 수를 뛰어넘는다. 타카토라는 팔을 뻗어 정장의 재킷 소매가 조금 올라가게 만든 후 왼 손목에 매달린 시계를 확인한다. 두 개의 바늘은 일곱 시 반을 향해 가고 있다. 곧 P가 올 시간이었다. 오는 길은 알고 있으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약속의 시간도 장소도 정한 것도 P의 쪽이었으므로. 그 과정에서 타카토라의 의견은 들어가지 않았다.

 

꺼져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를 켠다. 계약 조건이 나열되어 있는 계약서가 타이핑 되어 있다. 오늘의 만남에서는 서명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전부 P가 제시한 조건이었다.

 

 

 

 

 

* * *

 

 

 

 

 

하나, 이하의 계약 조건은 타인에게 발설하지 않는다.

하나, 모든 실험은 진행하기 전 P에게 목적 및 내용을 설명한 이후, P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진행된다.

하나, P가 소유한 록시드의 사용 권한은 P에게 있으며 이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 P에게는 본인의 본명을 스스로 공개하고 싶을 때에 공개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이에 있어 타인이 P에게 본명의 공개를 강요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P가 제시한 계약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간단하고 명료했다. 실험을 할 거라면 나에게 뭔지 말 해줘. 그리고 록시드는 뺏어가지 말아주라? 마지막으로 이름을 궁금해 하진 말아 줘. 때가 되면 알려줄 테니까. 끼어들 틈도 없이 쏟아내고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타카토라는, 어쩐지 마음이 약해져(약해질 만한 무언가가 있었나? P는 다른 인간과 같으나 록시드를 가지고 있을 뿐인 사람이 아닌가. 이그드라실의 방법대로 록시드의 소유자를 바꾸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P가 제시한 조건을 계약서에 맞는 문장으로 구성할 뿐이었다. 늘 하는 일인데도 타자를 누르는 손이 어색했다. 태어나 처음 키보드라는 물건을 눌러보듯이, 평소라면 내지 않았을 오탈자를 고쳐가며, 그 동안 P는 타카토라의 손가락을 답지 않게 차분히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으로, ‘본 임상시험계약서는 이그드라실 코퍼레이션 산하 기관인 [XXX-XXXXX] (이하 “시험기관”이라 함)의 관리자 [쿠레시마 타카토라] (이하 “타카토라”라 함)과 [P] (이하 “의뢰자”라 함)에 의해 [XXXX년 XX월 XX일]에 작성되었다’ 하는 흔하디흔한 서문마저 없는 계약서는 그렇게 작성되었다.

 

집무실의 문이 열린 시각은 정확하게 약속으로부터 오 분 전의 시간이었다. 바닥재에 부딪혀 울리는 구두 굽의 소리가 P임의 증명이었다. 이 소리 싫어하던가? 싫어하면 다른 신발로 갈아 신고 올게. 일에 지장이 갈 만큼 거슬리는 존재는 아니었기에 타카토라는 신고 싶은 것을 신으라는 답을 했었다.

 

“기다렸지.”

“……일찍 왔군.”

 

그러면서 P는 자연스럽게 책상에 걸터앉았다. 가져다준다는 의자를 마다하고 선택한 자리였으므로 굳이 그 또한 지적하지 않았다.

 

자신이 말하지 않은 내용이 들어가 있는 건 아닌 지 확인한 이후에 P가 고개를 끄덕이자 약식으로 서명을 할 자리를 만든 타카토라는 짧게 숨을 내쉬고 활자를 흰 종이에 출력했다. 나는 쿠레시마 주임이 자필로 써 주는 것도 좋았을 건데 말이야. 그러면 서명할 때 곤란하겠군. 그렇구나, 그럼 됐어. 그들의 대화는 대체로 이런 모양새였다.

 

출력된 종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서명을 하기 위해 만년필을 잡아 펜촉을 그 위에 내려놓다가.

 

“잠시만, 쿠레시마 주임.”

 

빼앗기고 말았다. 길고 가는, 흰 손가락에 들린 검은 빛의 만년필은 영영 그녀의 소유가 된 것만 같아 타카토라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하나만 더 추가할게.”

 

답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방향으로 계약서를 돌린 P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던 문장인 듯 막힘없이 적어나간다. 어깨의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문장을 다 써내고서 점을 찍듯 톡톡 펜촉의 끝을 종이에 두드린 이후에 P가 고개를 들었다. 손에 들어 계약서를 건네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었다.

 

하나, P가 요구한다면 쿠레시마 주임은 어울려 줄 것.

 

제대로 된 계약서의 내용이라고 보기엔 맞지 앉는 서술의 문장이었다. 이런 문장을 쓰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P는 자신에게 항상 명확한 요구만을 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적힌 '요구'란 무엇을 말하며 ‘어울려 줄’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기 위해 고개를 들면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치고,

 

“호텔은 쿠레시마 주임이 잡아 줄 거지?”

 

타카토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후 짧게 걸린 숨을 내쉰다. 설마. 생각지도 못 하고 있던 일을.

 

P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일 중요한 거야. 아무 때나 요구하지는 않을게. 대신 시간이 비는 때면 조금은 부탁하게 해 줘.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거나 초조해 한다거나 들킬 것이 걱정된다는 표정은 하고 있지 않았다. 능청스럽게 해 보이는 손동작은 여느 때와 같이 자연스럽다. 길이가 다르게 잘려 어깨에 겨우 닿는 반대쪽과는 다르게 왼쪽 어깨를 타고 흐르는 머리카락마저 의도된 장치인 것만 같다.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타카토라는, 잠시 호흡이 멈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 장소에서 P는, 그녀는 왜 이렇게나 이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찰나의 침묵은 벽을 만들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져 안개와도 같이 사라진다.

 

숨을 들이쉬어 갈비뼈를 열고, 천천히 내쉬며 닫는다. 그 사이에 말은 내뱉어졌을 것이다.

 

“진심인가?”

 

물론 그녀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러나 단지……

 

요구한다면 거절하지 못 하리라. 그 사실만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 쿠레시마 주임에게 거짓말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짓은 하지 않아.”

 

그래서 차라리 선고와도 같이 내려진 P의 말이 안도가 되었다.

 

“네가 그런 걸 원한다면……, 고려해보도록 하지.”

 

양 손을 맞대고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며 행복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에 거짓이라는 불순물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 하나의 오점도 담겨있지 않는 완벽한 만족이 깎아지른 절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의 폭포처럼 퍼부어진다. ‘고려해본다’는 말은 확신의 발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P는 쿠레시마 타카토라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고 말 것이라고 웃음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그녀는 이미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았는가.

 

맞아, 쿠레시마 주임.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서명하게 될 거야, 당신은. 내가 필요하잖아. 어떻게든 손 안에 묶어둬야만 하잖아. 그러면서도 잊어버리고 말겠지. 잃어버리고 말거야. 알았던 만큼 앓지도 않을 거잖아. 결국 나는 당신에게 과거에 머물러 더 이상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사람으로 남게 돼. 그러니까. 쿠레시마 주임의 진심을 가질 수 없다면 난 몸이라도 가져야지. 안 그래?

 

서명 란에는 P라는 한 글자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 * *

 

 

 

 

 

잠자리가 바뀌어도 적응에 필요한 시간이 짧다는 것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축복과도 같았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나. 그럴 리는 없었다.

 

창밖으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에 문득 눈을 뜬 P는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쿠레시마 주임님, 내 이름 불러 줘. 그렇게 목소리를 웅얼거리면 타카토라는, 본명을 알려주지 않은 걸로 기억한다만. 이불을 좀 더 그녀의 몸에 둘러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차갑게 굴지 말고. 알려준 건 있잖아? 등을 타고 오르는 손가락의 감촉이 생생했다. 그렇군. P. 이거면 됐나? 완전히 품 안으로 얼굴을 감추었으므로 표정은 보이지 않고 볼 수 있는 것은 정수리뿐이었으나,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으므로 타카토라는 자신의 발언이 틀리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있잖아, 쿠레시마 주임님. 그 'P'가 뭐라고 생각해? P는 종종 예고도 없이 질문의 내용을 바꿔 왔다. 또 잠시간 생각하다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을 떠올려냈다. 네가 가진 록시드……, 그러니까 ‘potato’의 P라고 생각하고 있다만. 그러면 또 쿡쿡대는 웃음소리가 작게 흘렀다. 으응, 그렇구나. 그렇게 알고 있는 거구나. P가 몸을 뒤척인 탓에 조금의 틈이 생겼다. 그럼에도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혹시 다른 해석이 있는 건가. 으응, 그런 건 아닌데.

 

“내가 왜 당신을 ‘쿠레시마 주임’이라고 부르는 지에 대한 걸 먼저 생각해보겠어?”

“……관계에 따른 격식을 차리기 위해서?”

“아~, 역시 재미없는 사람이라니까.”

 

등을 기어오르던 손가락은 날개 뼈의 위치에서 멈춘다.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정답은 내가 아는 쿠레시마가 둘 이상이기 때문이야.”

 

P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것보다 자신이 발언하는 쪽이 빠르리라는 점을 이해했으므로 타카토라는 즉시 의문을 표했다.

 

“납득할 수 없군. 그렇다면 이름으로 부르는 쪽이 편할 텐데.”

 

그러니까 그게 중요한 거야.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날개 뼈에서 가느다란 열 개의 손가락이 천천히 미끄러진다. 몸을 감싸던 팔이 풀어지고 시선이 맞닿을 위치로 얼굴이 돌아간다.

 

“다른 쿠레시마를 알고 있대도, 나에게 있어 '쿠레시마' 라는 사람은 당신 하나라는 뜻이니까.”

“……그런가.”

 

웃고 있지 않은 게 아니었다.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도 눈만은 웃고 있었다. 빛을 받을 구석도 없는 방임에도 불구하고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P를, 당신이 ‘professor’로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P.”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틈 없이 속삭였다. 이유야 당신도 알고 있잖아. 당신의 프로페서는 한 명이 아니니까. 그녀의 존재의 근본부터를 불쾌해하던 연구원을 떠올린다.

 

“나, 그 사이로 끼어들고 싶으니까 말이지.”

 

그러니까 부탁할게, 쿠레시마 주임님?

 

그러나 쿠레시마 타카토라는 대답하지 못 할 것이다.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희미한 빗소리만이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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