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거짓말을 하겠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백의 무가치한 말이 아닌 하나의 유가치한 침묵을. 거짓된 맹세보다는 진실한 배반을. 타낫세 란테 요아마키스라면 이를 지켜주겠지. 성도 무엇도 없는, 있는 것이라곤 신이 내려주신 징표뿐인 자신과 한 이 약속을.
그러니까……
* * *
“니히트 너, 타낫세랑 무슨 관계가 되고 싶은 거야?”
바일의 입에선 예고도 없이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바쁜 와중이면서도 단비 같이 내려 온 티타임 자리의 의미를 깨달았다. 정말이지, 급한 일도 없는데 부른다 싶었어. 투덜대고 싶은 마음을 참고 불평이라곤 품지 않은 듯 웃으며 시선을 낮췄다.
“……이대로가 좋아.”
아니 사실, 이런 말이 나올 것이라곤 예상하고 있었다.
니히트가 그게 좋다고 한다면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은 없지만 말야. 녹여 바른 겉면의 설탕이 꾸덕하게 굳다 못해 단단해진 비스킷의 끄트머리를 물며 바일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바일이 이해해줘서 기뻐. 고개를 살짝 기울여 웃어보이곤 니히트는 가운데에 잼이 발린 쿠키를 집어 들었다. 응, 지금 이대로가, 가장 좋아. 따뜻한 김이 남아있어 녹녹하고 살짝 씁쓸한 향이 올라오는 홍차를 홀짝인다. 당연하다 못해 명제와도 같은 말이다. 자신에게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는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으니까. 그 잠깐 동안 마주한 바일의 얼굴은 이해는 하겠지만 납득은 하지 못 하겠다는 표정의 전형을 하고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연두색의 눈은 어린 아이였을 때와 같은 빛인데도 다른 색을 비추고 있다. ……슬슬 서기관이 접견을 요청한 시간이니까 가 볼게. 다음엔 얇게 저민 아몬드가 들어간 쿠키를 두어 개 집고서 일어나는 바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결국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렸다.
언제부터 자신은 성의 인간이 되어버린 걸까.
어머니의 사망, 선정인의 발견, 자신을 모시러 왔던 록차와 토록, 낯선 존댓말, 정비되지 않은 길을 달리느라 덜컹대던 록차의 안, 입궁, 낯선 풍경, 쏟아지는 시선, 불안, 의심, 시기, 주제를 알아야지, 돌아갈 수 없는 길, 어차피 마지막 날엔 보란 듯이 버려지고 말텐데, 다른 누구도 너의 도착을 기뻐하지 않겠지만 나만은 널 환영해 주지, 차라리 발견되지 않는 편이 편한데, 건널 수 없는 호수, 뭐라도 노리고 나타난 게 분명해, 어디서 죽어 준다면 편하겠는데도, 범람하는 말과, 폭언과, 그리고―그 이후 정신없이 이어진 다섯 달이었다. 고작 다섯 달일 뿐인데 이전의 자신과는 박리되어 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느새 꼬리를 내린 사람들 앞에 서 있다 보면 장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주제에 이마의 표식만으로 성에 들어오게 된 촌뜨기 취급을 받던 나날이 벌써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지곤 했으니까.
돌이켜 보면 자포자기해 모든 걸 놓아버린 채로 성에 들어온 사람이었던 것 치고 잘도 버텼구나 싶다. 성 안을 지나다닐 때마다 수군거리던 귀족들, 속내와 의도가 빤히 보이는 채로 접근하던 사람들, 로니카가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이다 못해 차라리 상냥하게 보일 지경이던 악의와 조롱, 종종 느껴지던 목숨에 대한 위협들. 그 적의의 달걀 꾸러미 같은 틈바구니에서 질리지도, 도망치지도 않은 채로.
바일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모를 수가 없는 위치이지 않나. 마지막까지 도망치지 않고 결국엔 성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일개 촌뜨기에서 당당하게 상급 귀족이 된 소녀. 스스로의 능력을 인정받아 그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이마의 선정인은 힘을 잃었고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왕실과의 연줄 뿐. 조금만 어긋난다면 역사에는 기록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멸시한다면 왕과의 연줄이 걸리고, 지나친 접근은 반역의 의심을 사게 만드는 존재. 혼담으로 묶어두는 것도 할 수 없으며, 그 거절의 의심엔 타낫세가 있다. 그러니까 소문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건 니히트 그 본인이 가장 잘 느끼고 있었다. 왕이 되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써먹기도 다루기도 어려운 패. 생긴 후손에게 선정인이 있다면 또 몰라도 반려를 만들지 않은 지금에 있어서는 나중의 이야기.
―그렇다면 단지 흥밋거리가 될 뿐이다.
의심의 중심이 누군지는 선명했기 때문에 소문의 대상도 명확했다. 성 내에 도는 소문으론 타낫세와 자신은 공식 석상에 오르지만 않았을 뿐 이미 그런 사이라 말해지고 있었다. 방을 드나드는 모습을 보면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정을 통했다든지, 이후 벽을 넘어 영영 도망칠 생각이 보인다든지, 총애자가 영지를 하사받을 예정인 건 숨기고 싶은 아이가 생겨서라든지, 그런 내용 없는 쭉정이 같은 말들이 어느새 반쯤은 공공연히 복도를 돌아다녔다. 체에 걸러다가 호수에 담근다면 그 말들만 둥둥 떠 있을지도 모르겠어. 자신뿐만 아니라 바일과 타낫세를 위해서 소문을 신경 쓰고 부러 피해 다니면 드디어 속내를 드러내려는 건가 하는 말이 또 돌았다.
이상하게 귀만 밝다니까. 맞지도 않는 소문을 기묘하게 퍼트리기나 하고. 생각의 끝엔 한숨만이 길게 달라붙었다.
* * *
집어서 말하자면 애초에 타낫세와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정식으로 교제를 신청하거나 약혼을 한 사이는 당연히 아니었고, 수도 안에서 흐르는 소문의 내용마저도 전부 거짓 밖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영지의 일은 언제까지고 성에 머물 수도 없으니 리리아노 폐하와 바일에게 요청했던 것뿐이며, 타낫세의 방에 드나들었던 건 앞으로의 이야기를 했던 것뿐이다. 거기에……, 벽을 넘어 도망친다니. 반박할 가치도 없는 말이 아닌가. 가능성을 제외하고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귀족이 된 자신에게는 바일을 도울 의무가 있는데. 바일을 생각하면 더더욱 바다로 향한다는 말은 할 수도 없었다. 돌아올 득실을 떠나 애초에 소문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이니 그런 수를 사용할 수도 없다.
생각이 이쯤에 닿자 니히트는 미간을 짚었다. 바로 태도를 바꿔 타낫세와 처음 만났던 날처럼 군다면 또 이번엔 ‘사촌에서 총애자로 뒤도 없이 갈아탄 주제에 다시 버림받은 불쌍하고 멍청한 왕자’ 같은 말이 타낫세에게 붙겠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부끄럽지도 않은 행색으로 그런 말을 할 치들이 바로 귀족이니까. 타낫세가 했던 말 그대로 ‘아는 어휘는 많지만 말이 되게 엮어내지는 못 하는’ 존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고작 다섯 달만을 성에서 지내, 그러니 그 전의 시간 모두는 시골의 아이로 자라왔던 자신에게 이런 일은 상당한 자극(이런 단순한 말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굳이 머리를 짜내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지도 않을 만큼 지쳐 있으니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이었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길게 숨을 내쉰다. 내일은 또 무슨 말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칩거는 이미 끝나고 푸른 아이라고 불릴 시기도 지나 새로운 왕에게 시선이 집중될 때가 된 것 같은데도 왜 아직도 이런 일에 시달려야 하는지. 아니 애초에, 귀족이란 작자들은 남의 일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거람……. 길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어쨌든 본인의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사유는 간단하다. 타낫세 란테 요아마키스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일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니히트라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자들은 이미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본인만은 환영해주겠다며 깔보던 사람에게 매달려가며 결국은 친구―라고 부르기엔 넘치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 무엇이든 정확한 것은 없다.―라고 할 만 한 존재가 되었으니.
인을 내려 받지 못 한 왕자로서 인이 새겨진 외부인에게 말하는 ‘환영’의 의미는 벽지 출신의 어린애라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태생부터 지니지 못 한 것을 원하지도 않던 멍청이가 가지고 있음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은 말로 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겠지. 하지만,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내딛는 어린아이에게는 차라리 그런 말이 반가웠다. 겉으로는 잘 대해주는 척 하며 뒤로 말을 꺼내는 것보단 차라리 겉으로도 속으로도 나를 증오하고 있는 쪽이 나아. 그게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본다면 아마 그 순간에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처음 마주하는 상류계급의 인간, 자신과는 다른 우아한 행동거지, 가시가 돋쳐 있으나 정갈한 말씨, 늘 정돈되어 있는 옷자락,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내려오는 고급스러운 천 자락, 성문의 너머를 바라보던 눈빛, 태생부터 절대 같을 수 없는 사람임을 알려주는 모든 것들이 말하고 있었다. 낯선 곳으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그는 절대로 거짓된 호감을 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랬다. 그래서 그 뒤를 따라다녔다. 혹시라도 더 뛰어난 사람이 된다면 조금은 인정해 줄지도 몰라. 성에 어울리는 인간이 된다면 받아들여 줄지도 몰라. 당신만은 나를 환영해준다고 했잖아. 증오의 형태로 내려진 그 얄팍한 희망에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어머니의 사망 이후 도망칠 곳도 사라져버린 자신이 유일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인 성 안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누그러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함께 있는 자리를 노골적으로 거절하지 않았을 때의, 찰나의 순간에 웃어주었을 때의, 당신이 전부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사랑이었다고 일찍 깨달았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으리라.
전부 자신의 욕심이었다. 눈을 돌리고 도망칠 수도 없는 사실을 전부 이해하고 있었다. 성인이 되기 전의 마지막 날, 떠나려던 타낫세를 붙잡아 성에 남게 만들어버린 장본인이 바로 니히트 본인이었다. 그저 자신의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그 단순한 욕망으로 지금까지 그가 품어 왔던 계획의 결실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타낫세 란테 요아마키스는 그 부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당신을 바라 마지않는 어린아이의 눈과 시선을 마주치며 어떤 간절함을 대면했을까. 그 보석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을 붙잡아 찰나는 상흔처럼 남겨져 있었다.
솔직하게 심경을 표현하자면, 기뻤다. 행복한 나머지 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의 말 한마디로 계획을 접고 성에 남아주겠다고 하는 타낫세를 사랑해서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품어 왔던 마음을 고백해버리고 싶었다.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이미 그를 붙잡아 곁에 둔 것만으로도 심할 만큼의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니 그런 감정을 품는 일조차 죄에 가깝지 않은가. 전부 알고 있다. 사랑의 고백도, 상대에게 같은 감정을 바라는 마음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이기심. 게다가 자신은 현재 영지 없이 기반도 탄탄하지 않은, 그야말로 이름뿐인 귀족이다. 그런 자신과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게 타낫세에게 좋은 일일 리 없다. 왕이 되지 못 한 쪽에라도 빌붙어 권력을 얻고 싶어 한다는 말이 나오리라는 건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보이는 미래였다. 모르는 척을 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그런 정론을 늘어놓는 가운데에서 알아차린다. 이렇게 말해도 늘어놓은 것들은 전부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 * *
눈 깜빡할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조금만 요령을 피운다면 종종 숨을 돌릴 틈 정도는 만들 수 있었다. 비슷할 정도로 바쁜 바일이나 무슨 대화라도 가볍고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유리리에와의 티타임이라든지, 안뜰의 비밀 장소(바일이 알려준 곳이었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든지 하는 등의. 그러다 흰 꽃잎이 떨어지듯 상냥하게 내리쬐던 햇빛이 보다 짙어지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면 보통은 지하 호수나 실내에서 다른 휴식거리를 찾곤 했다. 타려면 허가가 필요하려나, 정박되어 물결을 따라 위아래로 조금씩 흔들리는 조각배들을 보고 있는 건 사소하지만 큰 평안을 주는 풍경이었다.
필요한 용무 이외에는 외출을 내켜하지 않아(사실 그런 것 치고, 성인이 되 전 그를 가장 많이 마주친 장소는 성문과 안뜰이었다.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지만 호수를 바라보는 게 좋았겠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면 웃음이 나온다.) 타낫세는 주로 실내에 있었는데, 일정이 맞는다면 그의 방으로 가 평소의 이야기를 했다. 여러모로 바쁜 일정을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는 아슬아슬한 선에서 소화하고 있는 두 사람이라 쌓인 이야기는 많았다.
예를 들어
“디레마트이가 너무 오랫동안 신간을 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많던데.”
같은 말을 꺼내면 타낫세는
“그런 멍청이들이 시시덕대며 읽으라고 쓰고 있는 게 아니니까.”
라는 퉁명스러운, 그러나 그 가시 돋친 발언이 절대 건너편의 상대방에게 향하지는 않는 답을 하곤 했다. 하지만 야니에 백작의 답신을 받으면 지금까지 썼던 걸 새로이 묶어 봐도 좋겠지. 그런 말까지 덧붙여가면서. 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의 책을 읽거나 시를 쓰고 있는 타낫세의 모습을 보면 어쩐지 그 하나만으로도 여가를 즐기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대로 얼굴만 보다 돌아가도 좋겠지만, 그게 이곳으로 향한 목적은 아니었기에 니히트는 자연스럽게 타낫세의 책장으로 향해 시간상의 문제로 읽다 말았던 갈색 표지의 소설을 꺼내들었다. 잃어버리거나 훼손(던진다거나, 더욱이 사람을 향해 던진다거나. 타낫세는 이 부분을 세 번이나 강조했다.)시키지만 않는다면 마음대로 꺼내 읽어도 좋다는 말에 바로 골라들었던 책 중 하나였다. 읽었던 부분까지는 팔랑팔랑 넘기고 읽어야 하는 쪽에 도착해 시선을 고정시킨다. 장이 빠르게 넘어가며 풍기는 옅은 고서의 향만큼 이 자리에 어울리는 냄새는 없겠지. 깃펜의 끝이 종이를 가볍게 긁는 소리만이 울리는 장소라 집중을 방해할 것도 없다. 저 정도의 소리라면 오히려 도와주는 역할인 걸. 타낫세의 한정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타낫세는 역시 영웅담 쪽을 더 좋아하는 것 같지만 나는 연애 소설 쪽이 조금 더 취향이란 말이지…….
그렇게 마지막 장을 넘기고 표지를 덮으면 저녁 시간이었다. 책을 향해 고정해두었던 고개를 들면 피곤한 듯 미간을 누르고 있는 타낫세가 보였다. 밖이 어두워지고 있는 걸 보면 해의 광도가 상당히 떨어진 듯 했다.
“혹시 해서 묻는 건데, 호출은 없었지?”
“있었다면 책을 뺏어서라도 알려줬겠지.”
“없었다고 대답해도 되는 말을 꼭 그런 식으로 한다니까, 타낫세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몸을 일으켜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자 그 과정에서 타낫세의 시선이 옮겨 붙는다. 던지거나 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웃으면서 말하는 게 오히려 미심쩍은 듯이 바라보던 사람은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는 내가 그런 걸 걱정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야 나, 타낫세의 책을 던져 본 적이 있으니까?”
“그 때의 일을 지금까지도…… 아니다, 됐어. 신경 써 준다면 그 쪽이 좋지.”
‘디레마트이’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안뜰에서 벌어졌던 작은 소동을 떠올렸다는 듯이 타낫세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가 짧게 숨을 내뱉곤 평소의 얼굴(그러니까, 조금 불만을 품고 있는 그 표정을 말하는 것이다)로 돌아왔다. 만약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내 책에 그런 취급을 했다면 절대 참을 수 없었을 텐데. 아마 모르를 시켜 지하 호수에 빠지게 만들었을지도 몰라. 그 장면을 잠깐 상상해보다, 썩 유쾌하지는 않은 광경이었으므로 니히트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별다른 일은 하지 않고 타낫세를 바라보거나 책을 읽은 게 전부이기에 크게 뒷정리가 필요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게 있더라도 시종을 시키면 된다고 말했겠지만. 이 시간을 위해 필요한 일은 오전에 몰아서 해두었으니 서류 몇 개만 더 넘긴다면 할 일도 없을 것이다. 정말로 쉬어야겠네.
“그러면 이제 가 볼게. 오늘은 즐거웠어.”
“……아아.”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다, 타낫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면 꼭 붙잡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눈은 항상 많은 생각을 담고 있는데도 색을 금방 읽어낼 수 있었다. 지하 호수의 물결처럼 일렁인다. 완전하게 푸르지도, 그렇다고 완전하게 녹색이지도 않은 빛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면, 손을 끌어당겨 품에 안아 입을 맞추고 싶어 고개를 돌린다. 안 돼, 제발 그런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지 말아 줘.
나의, 하고 접두사를 붙여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차마 입에 올리지 못 한다. 차라리 완전히 착각하고 싶었다. 타낫세 란테 요아마키스가 니히트를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 멋대로 굴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표식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는 곳으로 도망치자고 해 버리고 싶었다. 단 둘만 남은 세계에서는 그 모든 걸 무시하고 사랑만이 전부인 듯 굴 수 있을 테니까.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으리라고 겨우 깨닫는다. 그래서는 안 되든, 겁을 먹었든,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더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서둘러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도망치듯 발걸음을 뒤로 옮긴다. 몸을 돌리는 쪽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음을 깨닫는 건 십수 초 후였다. 갑작스러운 생각이 밀려들어오면 사고의 정리가 매끄럽게 되지 않았다. 이렇게 버벅거리고 일이 아닌데. 애초에 몇 번이나 드나들었던 방이니 이런 걸 생각하고 있다는 게 가장 부자연스럽다. 그냥 그 누가 와도 그러하듯 돌아서 걸어 나가기만 하면 되잖아. 그런데, 자연스러운 걸음은 어떻게 하는 거더라. 드레스의 자락이 발목을 스친다. 우선은 몸을 돌리는 게 먼저겠지. 그때까지도 뒷걸음질을 하고 있던 몸을 돌리기 위해 급하게 허리를 돌린다. 스텝을 따라가지 못 한 다리가 꼬이고, 발목이 교차해 꺾이면서, 당황하고 있는 타낫세와 시선이 마주치다, 흔들리고 있는 그 보석 같은 눈동자, 왜 이럴 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을까.
자신이 넘어지고 있음을 깨달은 건 그쯤의 일이다.
“니히트!!”
그리고, 건너편에서 뻗은 손이 허리를 감싸기 전에 시야가 뒤집힌다. 깨닫고 자시고 할 부분도 없다. 중심을 잃어 바닥과 몸이 충돌했다. 바깥쪽을 향해 꺾였던 듯 오른쪽 발목마저 욱신욱신하다. 이거, 걸을 수는 있으려나. 귀족의 지위를 받은 후에도 무용 훈련을 소홀히 했던 적은 없는데 이런 사소한 대처도 못 하다니, 나 헛된 시간을 보냈던 걸지도……
“너……, 뭘 생각하고 있던 거야. 다친 데는 없나?”
……라는 건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겠지만.
눈을 느리게 두어 번 깜빡이면 순식간에 시야가 타낫세로 가득 찼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은 불안과 당황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런 표정을 이런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건 어쩐지 특권 같았다. 참 읽기 쉬운 사람이란 말이야, 타낫세는.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던 조급함은 어느새 쓸려나가 신경 쓰고 있던 자신이 바보였던 것만 같다.
“……타낫세 지금, 엄청 바보 같은 얼굴 하고 있어.”
“그런 걸 말할 때인가, 너는…….”
하지만 내가 엄청 걱정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걸. 쿡쿡대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뻗은 손을 잡고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접질린 발목이 비명을 질러댄다. 아픈 티를 숨기기도 전에 표정으로 드러나 보였는지 눈앞의 사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걸을 수도 없는 모양이로군.”
“아하하, 들켰어?”
가볍게 발목을 돌려보이자 무리가 가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며 제지당한다. 시선을 내려 발목을 보자 이렇게 넘어졌는데 큰 소리 하나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붓기가 올라 있었다. 시종장이 본다면 며칠은 방에 묶어둘 게 분명하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서 고개를 툭 타낫세의 어깨에 기대 얹었다.
“이래서는 방까지 돌아가기도 힘들 것 같은데, 타낫세가 옮겨 줄래?”
그리고, 침묵. 슬쩍 눈동자를 올려 바라보면 그 시선을 눈치 챈 건지 짧은 숨을 뱉어냈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이 쪽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묻고 싶다. 옅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흐트러진다.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공간엔 심장소리만이 들어찼다.
아. 꼭 이랬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미리 대본이라도 준비해 둔 듯 바로 선을 그었을 타낫세는 자신에게만 약했다. 그런 틈을 파고들어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특권을 누리고 있는 주제에 또 뭘 바라고 있는 건지. 하지만, 그래도, 그런 말들이 붙어서는 안 되는데. 욕심이 생기게 만들지 말아 줘. 여지조차 없길 바라지만,
아마 그래도 자신은 타낫세를 사랑하고 말았을 것이다.
눈꺼풀을 내린다. 잠시 실례하지, 그런 짧은 말과 함께 무릎 아래로 손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등을 안전하게 안았음을 확인하고 타낫세가 허리를 일으켰다. 분화도 끝난 몸이라 가볍진 않을 텐데, 보기와는 다르게 가볍게 드네. 농담조로 꺼낸 말에는 짧은 한숨이 돌아온다. 나랑 있으면 자꾸 한숨만 쉰다니까. 쓸데없는 말은 그 쯤 해두도록 해. 분부대로 따르며 얌전히 목을 끌어안는다. 품은 따뜻해 표정이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방까지 데려다 줄 거야?”
“설마.”
타낫세는 몇 걸음 움직이지 않았다. 애초에 목적지가 방 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몸을 내려놓은 곳은 갓 빨아 아직 사람이 들어온 적 없는 듯 푹신한 침구의 위였다. 몸을 반쯤 굴려 조금 더 안 쪽으로 들어가며 묻자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이 이후로 용무가 있나?”
“으응, 호출이 없었으니까 없단 거겠지.”
“내일은.”
“바쁘기야 하겠지만 아침부터 불려나가진 않을 걸.”
“그럼, 됐어.”
그리고 그 옆에 걸터앉으며 상체를 조금 뒤로 넘겨 눈을 마주쳐왔다. 머리카락이 조금 흘러내리는 정도는 아랑곳 않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발목이 괜찮아 질 때까지 조금 있도록 해.”
“그러다 잠들면?”
“……그러지 않게 말상대라도 해주도록 하지.”
“상냥하네, 타낫세.”
나에게만. 덧붙이지 않고서 거리를 재 본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무방비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타낫세를 바라본다. 꼭 이렇게 있을 때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으니까. 저 멀리 떠나버리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럼 무슨 얘기를 하는 게 좋을까. 옷이 구겨지는 건 신경 쓰지 않고 타낫세의 쪽으로 돌아눕는다. 마주친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 채로 서로를 응시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네가 저 멀리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릴 것만 같으니까, 나는.
“나, 타낫세의 눈을 예쁘다고 생각했었어.”
“갑자기 이상한 소릴 하는 군.”
“뭐야, 난 진심인데. 처음 성에 왔을 때 ‘어서 와라, 두 번째 총애자여.’ 운운하면서 나를 반겨 줄 때도 정말 예쁜 눈동자라고 생각했단 말야.”
“어, 언제 적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가, 너는. 애초에 그건 반긴 것도 아니라……”
아마 그 때 한 눈에 반해 버렸다고나 할까. 어릴 땐 ‘왕자님’이란 막연하게 멋진 사람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웃는 얼굴을 가만 바라보던 타낫세가 자세를 편하게 고쳐 앉았다. 부끄러운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 왔다는 듯이 귓가가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동요를 숨기려는 듯이 시선을 돌리는 모습을 바라보다 웃으며 말을 자른다.
“들어 봐. 그래서 로니카가 아까 그 분이 바로 왕자님이라고 얘기해줄 땐, ‘아, 정말로 왕자님이란 멋지구나.’ 하고 밤새 그 눈동자를 생각했단 이야기라구.”
“무슨……, 스스로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첫 만남이 썩 좋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서 좋았던 거지, 타낫세가.”
이제는 타낫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구도가 된다. 그게 무슨 말이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왕자의 뺨에 손끝을 가져다 대며 웃었다.
“타낫세에게 인정받으려고 아등바등 성의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하면, 믿어 줄래?”
“성의 인간인가…….”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어. 허탈한 목소리로 툭 답을 내뱉은 타낫세의 목소리가 어쩐지 기뻤다.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겠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면 했겠지. 너를 위해서, 그리고 솔직히, 바일을 위해서. 바일을 옆에서 지켜봐왔으니 아마 나에게도 연민의 감정을 조금 정도는 품지 않았을까. 이 성도, 이 장소도, 이 곳의 인간들도 모두 싫어하는 네가. 지금도 그런 거야?
숨소리들이 낮게 가라앉았다. 뺨에서 손을 미끄러트린다. 그러니, 제발, 그런 눈빛만을 남기고 사라지지 말아 줘.
타낫세 란테 요아마키스가 머무르는 방의 창을 덮는 천은 특별한 때가 아니면 열리지 않는다. 그가 도망쳐 향하는 장소는 성의 안뜰임을 알고 있다. 손을 뻗고 사흘을 내리 달려도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지는 않을 테지. 애초에 그런 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 목적지도 분명하니 노력한다면 만나러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만나지 못 해도 편지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고, 시집도 받아볼 수 있을 텐데. 다시 성으로 초대할 수도 있다. 영영 머무르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나, 언제부터 성의 일원이 되어버렸다고 느끼게 된 걸까.”
타낫세는 알겠어? 웃어 보이는 표정도 귀족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혔던 기술일 뿐이다.
네가 떠나버릴 것만 같다고 느끼는 건 내가 성에 묶여 있을 인간이기 때문이겠지. 따라가고 싶다고 말할 용기도 없어서. 그러니까 붙잡고 싶어 하는 것이다. 손을 잡고 있을 때만, 품에 안겨 있을 때만, 옆에서 시를 읽어줄 때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으니까. 깨달아도 늦었다. 바뀌는 것들은 없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물샘이 약해서 툭하면 울게 되는 게 자신의 나쁜 버릇이었다. 그렇지만.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지.”
“티가 나나 보네.”
“넌 전부터 나에게 거짓말은 못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상냥한 말을 들으면 괜히 더 울고 싶어진다. 그건 타낫세도 마찬가지면서 말이야. 괜히 이불을 끌어안았다. 얼굴을 묻으면 푹신한 냄새가 밀려들어온다. 얼굴을 가리면 조금은 울어도 티가 나진 않을 거라는 얄팍한 속셈으로 하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다. 어차피 자신의 버릇 정도는 알고 있을 타낫세의 앞에선 소용없을 일이었다.
“조만간 성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영지를 받게 될 것 같아.”
“이미 결정했다는 거군.”
심호흡을 한다. 의식해가며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천천히 내쉰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해야 했다. 선택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곧, 일 년이 지나가잖아.”
“…….”
“그러니까…… 타낫세는……, 그러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꼭 사랑을 고백하는 것 같았는데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떨리는 건 감정의 본증. 무슨 말을 해도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일 터였다.
애초에 이야기도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을 때 부축 받아 일어난 다음 그냥 시종을 불러달라고 고집을 부렸어야 했다.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이런 바보 같은 말을 꺼내버리고 말았는지. 멍청한 귀족들을 상대할 때도 이렇게나 크게 실수해본 적은 없는데. 뒤늦게야 온갖 생각들이 밀려왔다.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둔감함은 죄라고 하는데,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건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아서 숨겨 버리는 건. 사랑의 자격이란 건 뭘까요. 부탁이에요, 알려주세요, 사랑의 추적자 님……. 이 자리에 없을 누군가를 속으로 애타게 부르기만 하다가……
“바보 같은 말을 하는군.”
시야에 불쑥 빛이 번졌다.
품고 있던 이불이 타낫세의 손에 잡혀 품에서 빠져나간 탓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타낫세가 아까보다 조금 높은 고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기대고 있던 물건이 사라져 어쩐지 버둥거리는 모습이 된 자신이 한심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 빛이 번지고 있는 건 갑작스럽게 안구를 향해 빛이 침범해 와서만은 아니리라. 눈을 깜빡이면 고여 있던 것이 흘러내렸다. 바보 같은 말이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 걸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아마 디톤에 가서 야니에 백작의 밑으로 들어가던가, 이대로 계속 바일의 일을 도울 거라고 생각해 왔어.”
왕자의 전언이 선고처럼 내려왔다. 예상했던 대로의 내용이지만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 괜히 또 울고만 있는 모습이 무력하게 느껴져서 소매로 눈을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아마 다음날이면 붉게 부어올라 의상 담당의 시종이 놀란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건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타낫세의 손에 쥐인 이불이 잠깐 펼쳐지는가 싶더니 망토처럼 몸을 덮어왔다. 허리를 조금 숙이고 같은 높이까지 내려온 지하 호수를 닮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부드러운 손끝이 뺨을 닦아주고, 종내에는 눈물이 묻은 손을 마주 잡아온다. 바라왔던 광경일 텐데도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네가 곁에 있어주길 바란다면 그렇게 하겠다.”
믿을 수 없는 선고가 내려지고 있었으니까.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어 내린다. 눈물 탓에 뺨에 달라붙었던 몇 가닥의 연갈색 머리카락이 손끝에 걸려 제자리로 돌아간다. 매끄러운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타낫세 란테 요아마키스가 말하는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지 않게 걷어주는 손가락의 감촉만을 느끼고서……
“그 날처럼, 선택을 네게 떠넘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그러니 하나만은 먼저 말하지. 나는 널 두고 멀리 떠나버리지는 않을 거다. 누구의 협박도 부탁도 아냐. 타낫세 란테 요아마키스의 선택이다. 나 같은 게, 네 곁에 있겠다는 것부터 욕심이지만……, 그 남자처럼 도망치겠다고는 하지 않겠어.
어깨의 위로 걸쳐졌던 흰 색의 천이 흘러내리고, 잡은 것도 없이 꽉 쥐고 있던 손가락의 마디엔 힘이 풀린다. 해의 광도도 떨어져 어둠이 드리워지는 방 안에 단 둘만이 남아 하는 이야기는 과연 용서받을 수 있는 종류인가. 그 누구의 앞에서 말해도 결백한 외침인가. 애초에 ‘나 같은 것’이라는 말을 해야 하는 쪽은 자신이었다. 장점이라곤 하나도 없던 촌뜨기에서 아득바득 겨우 기어 올라온 두 번째 총애자의 길은 결코 안락한 게 아닐 테니까. 해내기는 본인 나름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예상이 갔다. 거기에 그 예전부터 출신을 빌미로 동정심을 유발해 타낫세를 꼬셔냈단 말이 돌았고, 무시해 온 건 자신이 아닌 타낫세였다. 리리아노 전 폐하가 은거에 들어간 지금, 그보다 더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사람들이 왕성에는 많지 않은가. 이런 곳에 붙잡아둔 나를 뒤늦게 용서하지 못 한다고 말한대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는데. 더는 욕심 부리지 말자고 계속해서 다짐했는데. 너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죄라고 생각했는데. 어리광은 전부 그만두자고 자기 자신과 거듭 약속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말해준다면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바란다면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너를 눈앞에 두고서.
“타낫세가 허락해준다면, 기꺼이.”
네가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