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헤세드는 생각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라일라는 사실 천사가 아닐까. 밀짚모자를 눌러쓴 채로 환하게 웃더니 이내 등을 돌려 자신을 보고 손을 흔든다.
헤세드, 빨리 와! 그 목소리에 헤세드는 바다에 오길 잘했다면서 사진기로 라일라의 모습을 한 장 찍고 웃어 보였다. 그래, 라일라. 금방 갈게. 특유의 나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어쩐지 평소와 달리 더 의욕이 넘쳐 보였다.
좋아 보이네요, 헤세드 선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루시아가 그를 보고 있었다. 양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게부라와 루시아 자신의 몫을 사 온 모양이었다.
안 좋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게부라는 어디에 갔어? 그 말에 루시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저쪽에 돈을 뺏는 녀석들이 있어서 교화 좀 시키러 가셨어요. 그것보다 더블데이트라니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조금은 날이 선 그 목소리에도 헤세드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나도 둘이 오고 싶었지만 라일라가 같이 오고 싶다고 했으니까. 예상대로의 말에 루시아는 뭐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헤세드라면 라일라의 의견을 존중했고 라일라는 순수한 의도로 이 제안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루시아는 이 둘의 애정 행각을 보면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설마 숙소도 다 같이 자는 건 아니죠? 걱정 섞인 물음에 헤세드는 고개를 저었다. 따로 잡았으니 걱정하지 마. 나도 숙소에서만큼은 둘이서 있고 싶거든~ 그 말에 루시아는 ‘예, 그러시겠죠.’ 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역시 이 사람과는 영 맞지 않았다.
컵 안의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고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모래사장 위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헤세드! 라일라의 목소리에 헤세드는 루시아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럼 나는 라일라가 부르니까 가볼게. 환한 미소와 함께 제 연인 곁으로 가는 그 모습이 즐거워보여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라일라에게 다가간 헤세드가 그를 단번에 안아 들더니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티 하나 없이 밝은 라일라의 웃음소리와 함께 새하얀 치맛자락이 흔들리는 것이 영화 속의 커플과 같아 보였다. 그 바람에 밀짚모자가 날아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앉았다.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라일라가 모자를 주워들려고 하자 헤세드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첨벙이는 물소리와 함께 성큼성큼 다가간 그는 모자를 집어 들고 라일라에게 다시 돌아왔다. 고마워, 헤세드. 그렇지만 옷이……. 걱정스러운 라일라의 목소리에 헤세드는 웃으면서 들고 있던 모자로 자신과 라일라의 얼굴을 가렸다.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지자 라일라의 눈동자가 놀란 토끼처럼 커졌다. 이걸로 충분해, 라일라. 다정한 헤세드의 목소리에 라일라는 웃으면서 그의 품에 꼭 안겨 왔다. 저보다 작은 몸이 품에 안겨 오자 헤세드는 한쪽 팔로 라일라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연신 입을 맞추었다.
…공공장소에서 뭐 하는 짓이람. 여전히 모래사장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아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제 슬슬 게부라가 올 때가 됐는데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 커플을 내버려 두고 찾아보려던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선배님! 커피가 좀 미지근해졌는데 다시 사 올까요?”
“됐어. 이 정도면 못 마실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저 둘은 아까부터 저랬나 보지?”
게부라의 말에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나마 얼음이 덜 녹은 쪽을 내밀었다. 일상적인 말을 했을 뿐인데도 얼굴은 잔뜩 붉어지고 심장은 게부라의 귓가에 그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게부라는 얼음이 거의 녹아내린 커피를 마시면서 루시아를 내려다보았다. 높게 올려묶은 머리카락으로 인해 훤히 드러난 하얀 목덜미에 시선을 두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언가 꺼내었다. 얇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목걸이 줄에는 루시아의 눈동자 색을 닮은 보석이 박힌 작은 꽃장식이 달려 있었다.
게부라가 커피를 다 마시고 내려놓을 때까지 루시아는 제 몫의 커피를 마시면서 주체가 되지 않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목덜미에 와닿는 거칠고 따뜻한 손에 흠칫 놀라 뒤를 보니 게부라가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건 골라본 적이 없어서 카르멘의 도움을 받았는데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네.”
그 말에 자신의 목을 보니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목걸이가 보였다. 천천히 장식을 만져보던 루시아의 눈동자에는 이내 눈물이 맺히더니 게부라의 볼에 용기 내어 입을 맞추었다. 선배님이 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감동에 떨리는 목소리에 게부라는 괜히 쑥스러워져 헤세드에게 적당히 하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평생 가보로 간직할게요. 훌쩍이는 목소리에 게부라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이 연인을 어떻게 자제시켜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뭐, 그런 것도 귀엽기는 하지. 게부라 답지 않은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그는 가만히 제 연인의 어깨를 한쪽 팔로 감쌌다. 올해의 여름은 여전히 무더웠으나 조금은 특별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