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페이트/아포크리파 의 핵심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주 소란하네요.”
“최후의 전투인 탓이겠죠! 그야말로 하이라이트, 이 비극의 결말을 장식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상황, 아주 호조입니다!”
“네, 누구 탓에 말이죠.”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캐스터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그 말에 표정을 누그러트리며 웃어 보일 린네였으나, 썩 그럴 기분이 아니었던지라 웃음기 따위는 없는, 대놓고 빈정거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문 앞에 기대어 오묘한 푸른빛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맞은편의 책상 앞에 놓인 창을 통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만이 빛나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번쩍이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누군가의 비명 등이 들려온다. 듣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들이었나? 분명 그랬을 터지만, 그 무엇도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저 호문쿨루스가 결국 걸림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역겹다 못해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왜 저렇게 발버둥치는 거야. 이런 세상 같은 건 사라지면 좋을 텐데. 아니, 현상 유지 따위만 아니라면 없어지든 말든 그 마저도 상관없는데. 나는 왜 이렇게 초조할까.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 그 순간, 자신 안의 욕망을 린네는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은, 밖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어리고도 닳은 성인聖人이 밤하늘 아래에서 진심으로 웃는 얼굴이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담배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헛웃음이 터졌다. 모두가 구제받는 세상, 행복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강제로 취하게 될 구제, 그런 세상이 온다면 이 세상은 끝난다. 그러니, 오늘이 지나면 익숙하던 이 세상은 끝이 난다. 아마 바뀌어버린 세상도 얼마 가지 못해 사라질 것이다. 왜인지는 몰라도 뼈저리게 알고 있다. 갑작스럽게 내일이 오지 않게 된다면 난 무얼 해야 할까. 내 안의 모든 것이 정말 뿌리 뽑힌다면, 나는 만족스럽게 눈 감을 수 있는 걸까. 아니, 만족이라는 감정조차 느낄 수 없을 테지. 욕망도 뭣도 없는 세계란 그런 것이다. 조금 일그러진 지금 그대로의 세상이라면, 괴롭더라도 그런 것들은 양껏 느낄 수 있을 텐데. 린네는 눈을 찬찬히 깜빡였다.
“캐스터.”
“예, 무슨 일이신가요?”
“아무도 모를 어느 날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당신네 희곡에 비하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날이 밝으면 전부 소멸할 테니, 그 전에 좋은 소재라도 주도록 하죠. 비록 시로의 명이었어도, 저와 같이 다녀준 답례를 하게 해주세요.”
“이런! 마스터에 대한 비극을 쓰지 못하게 된 제게 너무도 가혹한 답례로군요. 그렇지만 좋습니다. 당신이 먼저 입을 여는 것은 아주 드물다 못해 처음 보는 일이니까요!”
조금 어린 저를 기억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대꾸하며 린네는 그제야 평소 같은 부드러운 낯으로 돌아왔다. 아아, 이러니 마치 독백이라도 늘어놓는 희극 속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네. 답지 않은 감상에 잠기며 그녀는 다시 밤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다시는 더듬을 수 없는 감정이 되기 전에, 추억할 수 없는 추억이 되기 전에 어딘가에 남겨두기로 했다. 기억은 공중정원이 떠오르기 전으로 돌아간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거늘, 그날의 평화와 정적, 그리고 설렘은 어쩐지 너무도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감정이 어쩐지 애틋하다고 느껴버렸다. 결국은 인간인지라.
모든 퍼즐 조각이 모였다. 대장정은 시작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가 이리도 설레게 다가오는 것은 실로 오랜만, 아니, 처음이었다. 호시노미야 린네는 성당 바깥의 외진 곳에 서 있었다. 바닷빛 눈동자에 검푸른 밤하늘을 수놓은 별이 총총히 담겼다. 누군가는 필시 그 모습을 보면 가히 영화의 한 장면, 곧 시작될 비극의 서막을 알리는 모습이라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겠지만, 그런 소리를 시끄럽게 외쳐댈 캐스터는 그의 공방에 들어갔으니 그야말로 고요하기 그지없는 침묵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린네는 이 시간에 한해 이곳에 나와 있는 것을 좋아했다. 선선한 바람이 몸을 스쳤고 눈동자와 같은 색의 긴 머리카락은 흩날리며 얼굴을 간지럽혔다. 입가에 만연한 미소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으나 볼에 띤 옅은 홍조는 그녀가 진심으로 즐겁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설레서 잠이 들 수 없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인간의 욕망이 뒤섞이는 가장 추악한 현장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을 빠짐없이 눈에 담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역겹다 못해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설레기도 했다. 단 한 번도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세상이지만, 그 사람이 스스로를 비틀어가면서까지 바꾸고 싶어 하던 세계, 구제하고 싶어 하던 인류다. 곧 이상향이 될 생각을 하면 좋게 봐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정적을 즐기고 있을 무렵, 반쯤 열려있던 문이 움직이는 소리가 침묵을 깼다. 그 소음에 조금 언짢은 기분이 되어 뒤를 돌아보고는 눈에 들어온 모습에 금방 표정을 푼 린네였다.
“이런. 미안해요, 린네. 혹시 방해했나요?”
“당신이 제게 방해였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시로?”
그 답변에 두 사람의 작은 웃음이 겹쳤다. 린네의 옆에 시로가 서고 그의 팔짱을 낀 채 살짝 기대는 린네까지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애증에서 애愛가 커진 그 순간부터 그때 품었던 감정을 단 한 번도 싫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만드는 이 사람이 미웠고 사랑스러웠다. 잠시 아무런 말 없이 서로의 온기만 나누고 있으면 곧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요.”
“그러네요. 꽤 설레서 잠도 오지 않던 참이었어요, 어린아이같이.”
“당신의 정처 없는 증오는, 조금 사그라들 것 같나요?”
“후후… 그럴 리가요. 살아 숨 쉬는 내내 너무도 명확하게 느껴져서 하루라도 빨리 도려내고 싶은 심정이랍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제 가슴께만 손가락 끝으로 꾹 누르며 대꾸한 린네였지만, 이어진 질문에 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후회, …할 것 같지는 않나요?”
“…무슨 의미죠?”
그 질문 하나에 린네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웃고는 있었지만, 차갑게 꽂히는 말이었다. 후회라니, 그런 걸 할 생각이었다면 그날 그의 목소리에도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아니, 그날이 오기 전에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감정에 휩쓸려 그대로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저 그렇게 자신이 끔찍하다고 여기는 방식대로 끝내버렸을 텐데, 그러지 않고 지금까지 끈질기게 버텼다. 그것은 분명 이런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이마저도 지금 와 돌이켜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그때까지 살도록 부채질한 것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욕망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아주 잘 아는 그녀이다. 그도, 그녀도 모순투성이의 인간이었다.
“후후,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당신의 각오는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조금 섭섭한 건 왜일까요.”
그 말과 함께 웃어 보이던 그의 얼굴은 늘 보이던 예의상의 웃음도 초연한 웃음도 아닌, 영락없는 소년의 것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뭐라고 쏘아붙이려던 생각은 이내 마음에서 깨끗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본 나이에 걸맞은 낯이었다. 린네는 자신도 모르게 그 얼굴에 넋을 놓고 말았다. 60년, 수육 된 뒤로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고 했던가. 그리 오래 살아온 사람도 이런 얼굴을 할 수 있구나, 그녀는 그때 어쩐지 이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모든 게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것 같다고, 어쩌면 이 얼굴을 봐버리는 바람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해버렸다.
“아하하, 이런 감정적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는 걸 보니 생각보다 여유로운 모양이네요. 물론 당신이 제일 잘 아시겠지만, 이런 이유로 흔들릴 목표는 아니니 안심을. 평화롭다고 착각해버린 머리가 떠올린 잡념에 불과할 테니까요. 뭣보다 목표를 항한 집념은 당신보다 강하면 강했지, 덜하지는 않다고 감히 자신할 수 있…… 린네?”
린네는 손을 뻗어 시로의 볼을 감쌌다. 그 미소가 없어진 것이 아쉬워 한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볼만 가볍게 문대었다. 자신은 이미 잃어버린, 아마 따라 할 수조차 없을 그 표정이 빛나서 또다시 속이 좋지 못했다.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자존감이 더한 밑바닥을 찾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미워진다. 그가 섭섭한 이유 따위를 알 리가 없는데도, 잡념이라면 도대체 왜 굳이 입 밖으로 꺼낸 건지. 그런 의미 모를 질문과 함께 시원스레 웃어 보인 그를 탓하게 된다. 이 애증이란 감정을 어떻게 돌려 설명할까, 도저히 말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아 그저 시로를 바라만 보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금 눈을 휘어 너무도 익숙한 그 웃음을 지어 보이며 거리를 좁혀 그녀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신경 쓰였다면 잊어주세요, 아무것도 아닌, 의미 없을 말이었으니까요.”
“…시로, 당신의 비원이 이루어지는 날에 저랑 같이 하늘이라도 보지 않을래요? 오늘처럼.”
“하늘을…?”
어쩐지 그렇게 하면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부 괜찮을 거라고 말하는 듯한 그 웃음을, 그리고 그것을 봤을 때의 감상을 제대로 새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아해하던 시로였으나 곧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침묵을 깨지 않고 조심스레 겹쳐졌다. 어쩌면 이 정도가 괜찮았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는 그런 감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호오.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마스터의 소중한 분, 지금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으신지요?”
“…글쎄, 조금은요. 믿기지는 않지만… 아.”
어느 새 창을 통해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치열한 전투로 인한 것이 아닌, 시간의 경과를 뜻하는 빛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던 소란도 잦아든 상태였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투를 지켜본 두 사람 역시 결과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대성배는 이미 기동하였다. 즉, 그의 비원은 이미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결착이 난 모양이군요. 이제 여운 긴 엔딩만이 남은 상태!”
“후후…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는데 날이 밝았네요. 어떻게 할까….”
“마스터에게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분이 약속을 하셨다고 했지요. 그 약속의 의미를 바래게 하지 마시길! 자, 어서 나가보시죠! 저도 빨리 이 이야기의 완결까지 집필해야만 하니까요!”
린네는 작은 웃음을 흘리며 문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뒤를 살짝 돌아본 그녀의 마지막 인사는 배려에 감사를, 미스터 셰익스피어. 성공적인 집필이 되길 바라요. 라는 말이었고 그 역시 당신의 이야기는 잘 간직해두겠습니다, 하는 말로 화답했다. 어쩐지 속이 시원해졌다. 지금 시로의 얼굴을 본다면 조금은 그때의 그와 닮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잠들지 못한 채로 바라봤던 두 번의 밤하늘, 그 끝에는 그의 처음 보는 웃음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은 정말로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모든 것을 끝마치고 편안히 잠이 드는 순간을 보기 위해 천천히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