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병은 아니었네요.”
직접 병문안까지 왔으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외라는 양 말하는 모순적인 모습이 제법 우스웠기 때문에 매켄지는 저도 모르게 실웃음을 흘렸다. 호텔 방 안으로 들어선 화빈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조금 기울였지만 이내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돌렸다. 손에 들려있던 쇼핑백을 가볍게 받아든 매켄지가 이게 다 뭐예요, 하고 물었고 화빈은 별거 아니라 답했다. 잡히는 대로 줄줄이 테이블 위에 늘어놓던 매켄지는 저도 모르게 내가 혹시 아프다고 말한 게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었나,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애틋함에 웃음이 났다. 화빈은 그런 모습을 머쓱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학교도 나오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는 말을 아침에 매켄지의 전화로 한 번, 지나가는 동료 선생들의 말들로 두 번 전해 들은 화빈은 업무가 끝나자마자 평소보다 빠르게 자리를 떴다(물론, 나가는 길에 미술부 몇 명에게 붙잡히기는 했다). 기실 화빈은 병이 났다는 그의 말을 반쯤은 믿지 않고 있었다. 사랑하는 애인에 대한 마음이 약한 이유라기보다 매켄지라는 한 인간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에서 나온 결과였다. 그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남을 놀리는 것에 특화된 편이었으며 동시에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기민하게 사람을 유혹할 줄 알았다. 그런 매켄지에게 보기 좋게 걸려든 사람 중 하나가 도화빈이었고. 절반은 꾀병이라 짐작하면서도 나머지 반쪽의 마음으로 먹기 쉬운 죽이나 해열제 따위를 사고 있는 화빈이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숨에도 자신에 대한 한탄 보다 상대에 대한 걱정이 더 많이 섞여 있지 싶었다.
“열은 안나요?”
“Um, I don't know. 모르겠어요.”
가까이 다가서서 안색을 살피는 화빈에게 매켄지가 능청스레 답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조금 불퉁하게 대꾸한 화빈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숨을 가늘게 뱉으며 한쪽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나머지 손은 제 이마에 대서 상대의 열을 가늠했다. 평소에도 두 사람의 체온은 차이가 나는 편이었지만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조금 뜨거운 편이었다. 약은 먹었는지 물어보려고 손을 떼어내는 찰나에 매켄지가 떨어지려는 손을 잡고 자신의 이마에 다시 붙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무어라 말하려던 화빈에게 매켄지가 느물거리며 웃어 보였다.
“시원해요.”
“…해봤자 얼마나 차갑다고요.”
“나는 좋아요.”
일부러 쏙쏙 골라 던지는 능글맞은 대답에 화빈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매켄지의 손에 덮여서 이마 위에 손을 얹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매켄지는 언 듯 보기에 무감해 보이는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아, 진부할 정도로 사랑스럽고 미숙한 나의 연인.
선생 일에 당연하리만치 직업의식이 없던 매켄지는 제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바로 결근을 결정했다. 어딘가의 보건 교사가 안다면 경을 칠 일이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늘어진 매켄지는 무얼 먼저 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화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용은 별것 없이, 오늘은 아파서 학교에서 만나지 못할 텐데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말라는 다소 싱거운 내용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니. 스스로 말해놓고도 제법 가증스러운 말이었다. 아픈 것을 티 내듯 먼저 전화를 건 쪽은 자신이다.
‘이따 학교 끝나고 갈게요.’
그에 답하는 화빈의 대응은 더욱더 가관이었다. 일부러 사람을 꾀어내는 말이라는 걸 모를만한 사람도 아니면서 덤덤하게 구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아슬함이 기껍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끔은, 그냥, 이상하리만치 술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화빈의 기저에는 불운이 깔려 있었고 자신 또한 그의 무수한 불행 중 하나여서 시작된 연이었을 터인데. 이제는 연인이라는 이름으로서 그에게 유일해지고서도 무언가 모자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한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복잡해지기만 해서, 그럴수록 도화빈이라는 사람밖에 맴돌지 않아서…
“이제 됐죠?”
아. 순간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매켄지는 미적지근해진 화빈의 손이 가볍게 떨어져 나가는 감각에 짧은 아쉬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화빈은 실낱같은 미소를 걸친 채로 매켄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순진하게까지 보이는 얼굴을 조금 더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적당히 갈무리하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에 감기가 옮을지도 몰랐다. 매켄지는 쾌활하게 웃어 보이며 아쉽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화빈은 다시 익숙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에 맞춰 넘실거리는 짧은 머리카락이 퍽 사랑스러웠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은 사라진 지 오래인데, 화빈은 보호막 같은 것도 없으면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무튼 여러모로 앞뒤가 맞지 않는 연인이었다. 매켄지는 그러나, 그래서, 눈앞의 사람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재앙에 익숙하고 유혹에 약하며 눈치가 빠르지만 신비로울 정도로 고요한. 그리하여 종국에는 기꺼이 거짓말쟁이를 사랑하게 된 미련한 사람. 부디 당신의 모순이 나에게만 적용되기를. 나의 영악한 사랑이 언제가 형용할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