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 바이러스가 잠잠해진 지 삼 개월이었다. 그 말은 곧 엄채은이 연모시에서 종적을 감춘 지도 어느덧 삼 개월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세상은 언제 전대미문의 바이러스로 떠들썩했냐는 듯 다시 고요해졌다. 독감 사태가 지난 연모시는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개중에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꾀하며 배를 불리려는 자본가들도 있었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독감 사태로 피해를 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테니까. 또 시민들도 그런 자본을 환영했다. 때문에, 곳곳에서는 언제나 크고 작은 축제가 열렸다. 허묵은 그 수채화 같은 풍경 속에 섞이지 못한 유화 물감이었다. 애당초 섞여들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낯선 재질의 땅을 밟는 것 마냥, 아무도 나를 모르는 행성에 불시착한 것처럼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일 초는 한 시간 같고, 한 시간은 하루 같으며, 하루는 한 달 같고…. 그렇게 억겁 같던 시간들을 허묵은 이를 악물고 이겨냈다. 이겨냈다고, 하는 게 맞을까? 그냥 견뎌 냈다. 살아 있으니까, 죽을 수 없었으니 그냥 보냈다. 그러니 분명 이긴 건 아니었다. 어느 승자가 이런 몰골에 이따위 표정을 짓겠는가. 허묵은 그저 살아 있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이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가 그뿐이니 그게 맞겠다.
최고생명과학연구소의 연구원들은 허묵의 변화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그가 독감 신약 개발에 모든 힘을 쏟아붓고 힘에 부쳐 잠시 번아웃이 왔다고 여겼다. 겉으로는 그랬다. 속으로는 모두가 엄채은의 실종 탓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언어에는 보이지 않는 발 수준이 아니라 모터가 달려 있는 법이었다. 허묵의 귀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 모두가 현명한 선택지를 택한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집단에는 무릇 방관자만 존재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조금은 궂은 일일지라도, 어떻게든 그를 상대하는 사람은 필요했다. 이른바 말라가는 화초에 조금이나마 물을 주는 사람. 시들어가는 뿌리는 그조차도 원해 보이지 않았지만. 인간관계 내지는 사회생활은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허묵은 애써 관계를 형성하려 하는 그 안간힘을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기지도 않았다. 정말, 가만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관조 화초처럼.
“허 교수님, 식사하러 가시겠어요?”
“나는 괜찮아요. 나 신경 쓰지 말고, 가서들 먹고 와요.”
“하지만 그렇게 끼니를 거른 게 하루 이틀이 아닌걸요, 교수님. 연구원 분들이 모두 걱정하세요.”
“…그럼 하던 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 먼저 먹어요.”
‘하던 것’이 무엇인지, 언제부터 시작했던 것인지 물을 자신은 없었지만 두 가지는 확실했다. 첫째, 필시 엄채은의 실종과 연관된 조사일 것. 그리고 둘째, 그렇다면 저 ‘하던 것’에 끝은 감히 없으리라는 것. 아명은 짧게 한숨을 쉬었으나 입밖에 내뱉지는 못했다. 한숨 소리가 허묵의 귀에 닿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구소의 사람들 모두가 진심으로 허묵을 걱정했다. 하지만 허묵은 무언가에 미쳐 있는 것처럼 그 모든 걱정들을 한사코 밀어내고 오로지 한 가지 것에 집중했다. 엄채은을 찾는 일. 그녀를, 다시 제 품으로 되돌려놓는 일. 쉽지 않은,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문제는 허묵 자신도 그걸 알았다는 거다. 실마리를 잡은 지는 꽤 됐으나, 다음 진도로 향하는 진척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일. 과학자에게 이보다 더 큰 시련이 또 있을까. 문제는 제 애인이 그런 시련에 휘말렸다는 거다. 제가 가진 힘의 한계. 그걸 깨달을 때마다 허묵은 극심한 무력을 느꼈다. 지킬 수 없을 때 느꼈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무던히 버티고, 이겨내고, 지금에 이르렀는데.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지금 그녀 하나를 구할 수 없다는 게 엄청난 무력감이 되어 돌아왔다. 모든 걸 가졌지만 모든 걸 잃었다. 멍청하게도 그걸 뒤늦게 알았다.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 함께 실종된 유연과 같은 자리에 있던 이택언을 채근하여 얻은 정보는 그뿐이었다. 유연의 필멸을 막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고, 그 과정에서 채은은 휘말렸다. 이택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내 관뒀다.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따라서 죗값을 물을 사람도 없었다.
―간 방법이 있으니 돌아오는 방법도 있겠지.
그 말에 이택언은 확언하지 않았다.
*
허 교수님 요즘 연구실에서 잘 안 나오세요. 정말 필요한 일이거나, 강의 시간 아니면 거의 연구실에 계시거나… 강의 없는 날에는 아예 출근 안 하시고요.
정말요? 왜요? 무슨 일이래, 천하의 허 교수님이.
난들 아나요. 메인 프로젝트에도 필요할 때 제외하곤 참여 잘 안 하신대서 연구원들도 그거 때문에 골치 아프다는데요, 지금.
연구소에 종종 출입하는 대학원생들이 나누는 대화가 엄채은의 귓가에 박혀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그저 행인의 대화였겠지만, ‘허묵’ 두 글자는 서늘한 칼날이 되어 그녀의 귓가를 짓이기듯 파고들었다. 그 칼날이 심장에까지 닿은 것인지, 돌연 심장이 욱신거렸다. 교수님. 엄채은이 낮게 중얼거렸다. 어서 그를, 만나러 가야만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는지. 그를 만나면 전부 이야기해 줄 생각이다. 그녀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한들 그는 물어볼 것이다. 당신에 대한 거라면, 뭐든 알고 싶고 뭐든 궁금해요. 입버릇처럼 허묵이 엄채은의 귓가에 되뇌던 말이었다. 이제는 그녀가 먼저 실천할 차례였다. 그곳에서, 나는 당신을 그렸어요. 새하얀 천장에 당신의 눈빛을 담고, 상상 속의 당신을 한참을 마주 보다가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일도 많았어요. 그런데 그건 그냥 눈이 건조해서였겠죠? 실없는 핑곗거리를 생각하다 웃음이 흘렀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연인을 마주하러 가는 길, 그를 안아주고 그의 널따랗고 따스한 품에 안기는 일. 당연한 것들이 그리워지며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그 모든 찰나의 순간들이 소중하고 애틋했다.
그랬기에, 망가진 애인을 마주하는 것은 가슴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시렸고, 애달팠다.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쁨이 들었던 것도 같으나, 그건 애써 무시했다. 드러내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리고 지금은 눈앞에 널브러진 약통과 실험 기구들, 보고서들을 주워 정돈하는 게 우선이었다. 허묵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나를, 환각이라 여기고 있는 걸까. 살갗이 닿아 스치면 사라질 신기루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상했다. 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교수님.”
굳게 닫혀 있던 엄채은의 입술이 열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았던 건지, 버석한 입안이 이를 증명했다. 말라붙은 입술을 살짝 혀로 쓸고는 또박또박 그의 이름을 올렸다. 허묵. 허묵 교수님. 그토록이나 부르고 싶었던 이름. 진심을 담아, 애정을 담아, 영원을 담아 당신에게 닿고자 했던 그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필시,
“저… 돌아왔어요.”
남자의 잔잔하고 조용하던 잿빛 세상을 일순 다시 맑은 하늘로 바꾸어 버리는, 호수와도 같던 그의 세상에 작지만 깊게 요동치는. 작지만 단단한 조약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토록 수없이 마주했던 그녀의 환영들과는 달리 느껴지는 목소리의 무게에 허묵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윽고 목각 인형처럼 굳어 있던 그가 조금씩 몸을 틀었다. 그리고 허묵은 고개를 들어 간신히 채은을 바라봤다. 그녀 또한 허묵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엄채은의 눈꼬리가 씁쓸하다는 듯 쳐졌다. 그의 눈가에 자리 잡은 다크서클과 눈에 띄게 지쳐 있는 모습을 목도한 직후였다. 내 존재가 부재할 동안, 당신은…. 당장이고 달려가 끌어안아 주고 싶다. 내가, 그래도 될까. 감히, 그럴 수 있을까.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 현상에 익숙해지며 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최소한의 휴식이 서로에게는 필요했다.
하지만 맞닿은 시선은 정직하게도, 짧지만 깊은 울림을 새겼다. 엄채은의 입꼬리에 웃음이 맺히고, 허묵의 눈빛이 깊어진다. 두 사람의 걸음은 조금 전보다 한 걸음도 가까워지지 않았음에도 이미 서로를 끌어안은 듯 다정했다. 이대로 질식해도 좋을 만큼 기꺼웠다. 비로소, 영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