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소리 외에는 고요해야 할 바다 근처는 온갖 사람들의 소리로 북적였다. 큰 마차와 함께 그곳에 도착한 시몬은 ■■와 함께 땅에 발을 딛었다. 배를 탈 준비를 하는 사람들, 그들을 배웅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사람들이 많구나. 까뜨, 마차에서 기다리렴. 작별 인사는 충분히 했지?”
“충분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괜찮아요. 아저씨가 영원히 안 올 것도 아니고. 그렇지? 다시 올 거지?”
“부담 주기는. 평소엔 누나처럼 굴더니, 웬 어리광이람?”
“괜찮아, 부담 아니야. 응, 까뜨린느 말대로 할게. 다시 올 거야, 걱정 하지마.”
“정말이야. 우리 약속한 거야.”
까뜨린느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는 가볍게 제 새끼손가락을 걸고 두어 번 흔들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약속. 그럼에도 여전히 섭섭해 보이는 낯의 까뜨린느를 뒤로 하고, 시몬과 ■■은 마차에서 짐을 꺼내들었다.
사람들이 가득한 부둣가 위로, 시몬과 ■■은 조용히 발을 옮겼다. 시몬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의 겉옷을 바로 여미어주고는 고개를 들었다.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었다.
“내가 돌아오면, 반겨줄 거지?”
“얘 봐라. 떠난다고 당차게 말할 때는 언제고? 까뜨린느랑 한 약속 때문에 마음이라도 약해진 건지.”
“그것도 그런데. 돌아올 곳이 없는 것과 있는 것은 많이 다르단 말이야.”
영국의 브라이턴. ■■이 떠날 곳이었다. 하필이면 왜 그곳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별 의미는 없었다. 조금 먼 곳으로, 하지만 편지는 닿을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었다. 바깥세상을 홀로 돌아보고 싶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처음 친절과 말을 가르쳐준 까뜨린느, 그리고 자신에게 처음 따스함과 안정을 알려준 시몬과 함께하는 삶. 아침에는 까뜨린느와 아침 식사를 나눴고, 낮에는 시몬과 여기저기를 다니며 많은 것을 배웠고, 밤에는 따스한 침대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시몬에게 그렇게 말할 때면 시몬은 항상, 네가 사람이 아니면 뭐겠니? 하고 웃어 보였다. ■■도 그 말에 함께 미소 짓곤 했지만, 무언가 빠져있음을 느꼈다. 한평생 가정에 남아있는 것. 그건 마치 한평생 어린아이로 남는 것만 같아서.
■■은 완성으로 향하고 싶었다. 미완성인 새벽에서, 어린아이인 아침까지 향해왔으니. 이제는 어른이 되어 한낮을 즐길 때가 되지 않았나. 그리하여 ■■은 사회로, 바깥으로 나가고자 했다. 바깥으로 나간다면 어디든 좋았다. 그렇지만, 돌아올 곳은 분명 필요했으므로. 어쩐지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의 ■■을 바라보며 시몬은 작게 웃었다.
“내 대답은 알고 있잖니? 나는 쭉 여기에 있단다. 돌아오고 싶어지면 언제든 돌아오렴. 팔 벌려 환영해줄 테니.”
시몬은 금방이라도 널 환영해줄 수 있다는 듯, 넓게 팔을 벌렸다. ■■은 제 안에서 울컥 차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이렇듯 차오르는 것을 언젠가 느꼈던 것 같은데, 많이 달랐다. ■■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아이고, 울기는. 시몬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눈물을 닦아주었다.
“떠나고 보면 많이 외로울 거야. 이렇게 눈물을 닦아줄 사람도 없고, 어쩌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가. 넌 혼자가 아니야, 알았지? 다시 말하지만, 나는 쭉 여기에 있단다. 아, 물론 까뜨린느도.”
그러니까 너무 울지 말렴. 마치 제가 울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다정하게, 침착하게 전해오는 목소리는 참 큰 위로가 되었다. ■■은 금방이라도 다시 시몬의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떠날 때가 머지않았다는 목소리가 저 배 위에서 들렸으니까.
“가야겠구나, 아가.”
“잠깐. 잠시만, 시몬. 떠나기 전에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뭐길래? 뭐든 들어주마.”
“내 이름. 역시, 시몬이 지어 줘.”
이번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시몬은 눈을 크게 떴다. 이름. 그것은 ■■에게 아직 없는 것이었다. ‘앙리’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괴물’이라는 존재로 불리어 본 적은 있었으나. 그것들 모두 자신의 이름은 아니었다. 심지어 까뜨린느가 부르는 ‘아저씨’라는 호칭마저도, 시몬이 부르는 ‘아가’라는 호칭마저도 이름은 아니었다. 시몬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감히 자신이 지어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몬은 자신이 구원하는 이들에게 항상 그랬다. 자신은 그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줄 뿐이지, 손을 잡고 한평생을 살아가진 않는다고, 나는 항상 그들이 자신의 삶을 도로 찾아 떠나가는 것을 환영한다고. 그렇게 말하곤 했으니까. 예외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과 까뜨린느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지어줘도 괜찮겠니?”
“당연하지. 시몬이 아니면 누가 지어줘? 원래 이름은 부모한테 받는 거라며.”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하는 말을 처음 들은 날, 시몬은 조용히 이 욕심을 접어두었다. 너도 떠나야겠지. 새로운 곳으로, 네 삶을 찾아서. 그렇게 찾은 새 삶 속에서, 새로운 이름을 네가 짓도록 하자. 잠시 간의 망설임 이후에 내뱉은 그 말은, ■■에게 ‘이름’을 생각해보도록 만들었다. 그날로부터 떠날 곳을 정하고, 떠날 배를 찾고, 짐을 싸서 여기에 오기까지 쭉. 그러나 ■■이 생각하기에 제 이름을 지어 줄 사람은 시몬보다 적당한 사람은 없었다.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 준, 지금의 삶을 만들어 준 사람. 평범한 인간들은 이런 대상을 ‘부모’라고 부르지 않던가. 평범한 인간들은 이름을 ‘부모’에게 받지 않던가. ■■이 생각하기에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는데, 시몬에게는 참 벅찬 일이었다. 부모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그럼에도 항상 생각하고 있던 이름이 있었다. 만약에 내가 너의 이름을 지어준다면, 이렇게 지어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던 이름. 그리하여 시몬은 ■■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말했다.
“다행히도, 예전부터 네게 주고 싶었던 이름이 있었단다. 앞으로 네 이름은……”
부우웅.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둘 모두 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름을 받고, 새로운 곳으로 떠날 시간이 왔다. 두 사람 모두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먹먹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두어 번 되뇌이던 이는, 발끝을 배 쪽으로 향했다.
“가야겠구나. 다녀오렴, 아가.”
“…응. 고마워, 시몬.”
다녀올게. 사랑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두 사람은 발길을 달리했다. 시몬은 떠나는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배에 탈 사람들은 사라졌으며, 배웅하는 이들은 점차 자리를 떠났다. 곧 고요해진 바닷가 위에서, 파도 소리와 새소리만이 시몬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 고요 속에 몸을 맡기고 잠시 눈을 감자면, 참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몬은 애써 고개를 들고 웃었다. 다시 돌아올 사람을 배웅했을 뿐인데, 왜 눈물은 멈추지 않는지. 이토록 우스운 일이 없었다.
잠시 뒤, 뒷 편에서 시몬의 이름을 부르는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몬 님! 너무 안 오시길래, 어… 잠깐, 우세요?!”
“아니… 하하. 민망하구나. 그래, 좀 울었다.”
“아저씨 앞에서는 눈물 한 번 안 보이시더니, 참…….”
“그러게나 말이다. 사실 끝까지 안 울려고 했는데, 바닷바람이 차서.”
변변찮은 변명을 하며 시몬은 눈물을 닦아냈다. 드디어 바다에서 등을 돌린 시몬을 보며, 까뜨린느는 어느새 차가워진 손을 꼭 잡았다. 그러게요. 바닷바람이 찬가 봐요. 조용히 대답하며 두 사람은 마차로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 까뜨린느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저씨도, 시몬 님도. 눈물이나 외로움은 이 바다에, 이 바닷바람에 던져두고 가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