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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카이노 오와리 - R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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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에이스

후루야 사토루 드림

첫걸음 행진곡.

 

다이에이 후루야 사토루 네임리스 드림

 

written by 눕(@noopinblue)

 

 

 

0

후루야가 도쿄로 간다고 한다. 어제, 아니 오늘, 어쩌면 내일.

 

 

 

1

장장 3년 동안 순정을 바친 결과가 고작 이별이라니. 그것보다 나를 더 화나게 하는 것은 후루야가 지금까지 나에게 단 한 번도 도쿄로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후루야는 내가 고등학교 진학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시선을 피하거나 못 들었다고 말하는 등 불편한 티를 냈다. 나는 그게 고등학생이 되는 게 싫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얘! 튀김 다 타겠다. 안 건지고 뭐 해?”
“예에”
“대답은 짧게”

 

 

타기 일보 직전의 튀김을 젓가락으로 건지면서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후루야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현실은 부엌에서 엄마를 도와 꼼짝없이 저녁 준비나 해야 하는 처지였다.

 

저녁은 된장국에 쌀밥, 광어와 아스파라거스 튀김으로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도 식욕이 일지 않았다. 아니, 도쿄는 너무 먼 거 아니냐고.

 

 

“무슨 일 있어? 자꾸만 한숨을 쉬고 그래. 복 날아가게”

“엄마 나 고등학교 도쿄로 갈까?”

“그래 가”

“진짜?”

“응. 네 돈으로”

“뭐야아….”

 

 

표값이야 어떻게 한다고 쳐도 경제 능력 없는 여자애가 도쿄의 비싼 물가를 자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도쿄에 신세 질 친척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집안 사람들은 전부 홋카이도 토박이들이다. 절망적인 현실에 나는 광어튀김을 젓가락으로 부수듯이 쪼갰다.

 

 

“도쿄는 왜?”

“그냥…. 아는 애가 고등학교를 도쿄로 간다고 해서”

“멀리도 가네. 왜 도쿄래?”

“하고 싶은 게 있대”

“대단하네. 벌써 진로가 확실하고”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나도 부모님이 도쿄로 보내주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나를 안다. 도쿄까지 가서 하고 싶은 건 없다. 굳이 말한다면 노래를 좀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봤자 취미 수준으로 노래를 좋아할 뿐 노래로 생계를 꾸려간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이런 내가 도쿄로 가봤자 부모님의 등골이나 알차게 빨아먹을 뿐이지. 그래서 후루야와의 이별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 후루야는 대체 언제부터 도쿄로 진학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걸까. 왜 나에게는 알려주지 않았을까. 진지한 대화를 하기에 난 너무 가볍고 부족한 애로 보였었나.

 

당연히 그러겠지. 입만 열면 학교 가기 싫다, 빨리 졸업하고 싶다 이런 말만 하는 애하고 무슨 미래에 관한 대화를 하겠어.

 

 

“어머, 너 우니?”

“아냐. 눈에 뭐가 들어간 거야”

 

 

밥알과 함께 섭섭함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꼭 모래를 삼킨 것처럼 깔깔했다.

2

나는 내가 사람의 겉모습보다는 내면을 중시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후루야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혹시 첫눈에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 있는가? 있다면 다들 조심하기를 바란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또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키가 큰 후루야는 입학식 날부터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른 남자애들은 아직 초등학생 티가 남아있고 어딘가 유치하고 바보 같아 보였는데 후루야한테는 그런 게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후루야의 자리는 늘 시끄러웠다.

 

 

“후루야군의 집은 여기서 가까워?”

“어느 초등학교 나왔어?”

“후루야군 정말 키 크다. 지금 몇cm야?”

“후루야군은 뭘 제일 좋아해?”

 

 

당연히 화제의 핵심인 후루야를 곱게 보지 않는 애들도 있었다. 대놓고 꼽을 주는 남자애들도 있었지만, 거기에 굳이 반응해주는 여자애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관심을 받고 싶어서 하는 행위가 고작 저거라니 수준이 낮아도 한참 낮았다.

 

정말 머리가 좋은 애들은 후루야와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간 척을 하다가 분위기를 봐서 미리 점찍어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후루야에게 말을 걸자니 용기가 없고 뒤늦게라도 섞여들자니 저 소용돌이 속에서 오가는 은근한 견제와 기 싸움을 견딜 자신도 없는 흔한 애들 중의 하나가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후루야 붐은 2주를 넘기지 못했다.

 

 

슬프게도 원인은 후루야한테 있었다. 후루야는 좀 많이 내성적이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맞춰보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았으나 나중에는 누가 자기한테 오는 것 같다 하면 바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보는 내가 다 안쓰러울 정도였다.

 

결국 후루야는 아예 사람이 올 것 같으면 바로 책상에 엎드려 자는 척을 했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복도로 나갔다가 수업이 시작하는 예비종이 울릴 때쯤 들어왔다. 우리는 모두 중학생이었지만 몸만 컸지, 마음들은 아직 다들 여려서 후루야의 행동에 상처를 받는 아이들이 많았다.

 

 

한 달이 더 지났을 때, 후루야의 곁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3

후루야하고 말을 안 한 지 꽤 됐다. 후루야는 나하고 대화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내 쪽에서 무시했다. 차라리 반이라도 달랐으면 신경이라도 덜 쓰는데 하필이면 같은 반이라서 온종일 신경이 예민했다.

 

이는 당연히 학교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거기. 음정 안 맞아”

“박자 느리다”

“이번엔 너무 쳐지잖아. 정신 안 차리지?”

 

 

결국 음악 선생님한테 호되게 혼이 났다. 졸업식 무대까지 앞으로 한 달 남았는데, 부장이 이렇게 못하면 어떡하냐는 선생님의 꾸지람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졸업식 앞두고 마음 다잡기 힘든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건 핑계가 안 돼. 알아?”

“네”

“더 말해봤자 시간만 낭비하고…. 이 부분은 건너뛰고 마지막 집중하고 가자. 알았어?”

“네”

 

 

부 활동이 끝났다. 실수가 너무 많아서 예정에 없던 빡센 하루가 됐다. 다음 시간까지 선생님이 지적한 부분을 고쳐야 하는데, 할 게 너무 많아서 막막하다.

 

 

“연습 끝났어?”

“....”

 

 

계속 밖에서 기다렸던걸까. 후루야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었지만 나는 깨끗이 후루야를 외면했다. 보통 이정도 무시하면 포기할 법도 한데 후루야는 오히려 더 끈질기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헤어진 것도 아닌데 왜 무시하는 거야?”

“헤어진 게 아니라고?”

 

 

아니잖아. 후루야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나는 더 열이 뻗쳤다.

 

 

“너 도쿄로 가잖아”

“응”

“그럼 헤어지게 되겠지!”

“장거리 연애라는 것도 있어”

“그리고 장거리 연애하는 커플 대부분은 깨지고”

“우리는 아닐….”

“우리는 다를 거라고 말하려고? 무슨 근거로?”

 

 

후루야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너도 장거리 연애가 어려운 건 아는구나. 나는 코웃음을 쳤다.

 

 

“후루야.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냐. 그리고, 도쿄로 간다는 말을 졸업식 한 달 남기고 말해준 시점부터 우리는 끝난 거고”

“왜?”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나는 헤어지자고 말한 적 없어. 그리고 그때 네가 아무 말 없이 돌아가서 제대로 된 대화도 못 했잖아”

 

 

나는 지금까지 후루야를 섬세하지만 의사소통은 서툰 아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말을 듣는 순간 이성의 실이 뚝 끊겼다. 더 이상 후루야가 후루야 사토루가 아니라 그냥 말하는 전신주로 보였다.

 

 

“그러면 그날 내가 거기서 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했는데? 내가 가을서부터 고등학교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을 때는 너, 제대로 대답해준 적 한 번도 없었잖아. 그러다가 이제 와서 졸업식까지 대뜸 야구하러 고등학교 도쿄로 간다고 하면, 내가 뭐 순순히 ‘그렇구나’ 하고 이해해줄 줄 알았어?”

“...미안. 그건 정말 내가 생각이 짧았어. 하지만,”

“미안하면 다야?”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누군가랑 연애하게 된다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말 1위.

 

‘미안하면 다야?’

 

이걸 현실에서 말하게 될 줄이야.

 

 

후루야가 여기에서 얼마나 외로운 야구를 하고 있는지 안다. 아무도 야구부에서 자기를 상대해 주지 않아서 맨날 벤치에만 앉아있다가 부 활동 같지도 않은 부 활동이 끝나면 자기의 비밀장소에 가서 손끝이 빨갛게 될 때까지 공을 던지는 걸 직접 봤다.

 

그래서 후루야에게 도쿄는 아주 매력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도쿄로 가는 건 좋다. 도쿄행을 결심하자마자 나한테 먼저 말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후루야는 그러지 않았다.

 

전에는 그래도 후루야한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애써 합리화를 했었다. 그런데 지금 후루야를 보면 사정 같은 건 없고 그냥 나만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됐어. 더 너하고 하고 싶은 말 없어”

“그 말은,”

“좋을 대로 생각해”

 

 

이제 나도 내 마음대로 굴 거야.

 

 

 

4.

후루야는 야구를 좋아한다. 재능도 있다.

 

야구의 축복을 받은 후루야지만 홋카이도의 땅이 너무 척박했던 탓일까. 후루야는 중학교 야구부에 들어가고 나서 단 한 번도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후루야의 공을 받을 수 있는 포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 화가 났다. 아니, 투수의 공을 받을 수 없으면 투수 탓을 하는 게 아니라 포수가 더 연습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야구부 애들 진짜 멍청한 거 아냐?”

 

 

후루야는 내가 이렇게 화를 낼 줄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상식적으로 자기가 수준이 딸리면 노력해야지 그걸 남의 탓을 한다는 게 말이 돼? 그러니까 빡통 소리나 듣지”

“목소리가 커. 누가 듣겠어.”

“알 바야? 다 업보인 거야. 포수가 뭐 벼슬인 줄 아나, 유치하게 사람 따돌리기나 하고….”

 

 

나는 필사적이었다. 후루야한테 모두가 다 너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남을 흉보면서 후루야를 칭찬해봤자 후루야가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나는 열심히 하는 사람이 보답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후루야의 앞에서 이건 부당하다고 입에서 불을 뿜었다.

 

 

“그래서 내 말은! ......그냥 그렇다고“

 

 

내 연설은 세상 찌질하게 끝났고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후루야한테 남의 뒷담만 까는 애로 보여도 할 말 없었지만 속은 후련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어…. 어어....”

“오늘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누가 들었으면 어떡하지….”

 

 

후루야는 변함없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때는 내가 네 편을 들어줄게”

 

 

때맞추어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후루야의 얼굴에 여운을 남겼다. 그 절묘함에 나는 또 후루야의 등 뒤로 번지기 시작하는 군청색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제발 그만 반하게 해달라고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5.

3학년은 가을을 마지막으로 동아리 활동에서 공식적으로 은퇴를 했기 때문에 졸업식 날까지 다들 여유롭다 못해 지루한 시간을 보내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속한 합창부는 오히려 졸업을 앞두고 더 바빠졌다. 왜냐하면 자랑스러운 우리 합창부가 이 망할 졸업식의 피날레를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3학년을 송별하는 자리에 3학년인 내가 무대에 오르는 게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건 우리 합창부가 처한 상황이 특수성 때문이다. 역대급으로 적은 신입 부원들에 이어 중간에 탈퇴한 학생도 유독 많아서, 1, 2학년을 다 끌어모으는 걸로도 부족해서 3학년을 모아야 그나마 무대에 섰을 때 덜 초라해 보였다. 거기에 나는 부장이라는 점도 있어서 꼼짝없이 무대의 정중앙에 서게 된 것이다.

 

 

“와…. 하기 싫다”

“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니 근데 진짜 하기 싫어”

 

 

안 그래도 오르기 싫은 졸업 무대인데 후루야와의 일도 겹치니 정말 의욕이 안 났다. 좋든 싫든 지난 3년간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합창부의 마지막 공연이니만큼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어쩐지 전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악보를 멀거니 바라봤다.

 

 

“그래도 이번 졸업식 노래는 작년이랑 완전 다르네.”

“그쵸? 제가 음악 선생님께 이거 하자고 졸랐어요.”

 

 

차기 부장을 맡게 된 2학년 애가 신이 나서 설명해준다. 선배, 짱구 아세요? 이거 짱구 극장판 엔딩곡인데 제가 진짜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께 졸업식 노래로 이거 하자고 졸랐어요.

 

 

“근데 선생님께 용케 허락을 받아냈네. 쌤 은근 보수적이라서 애니메이션 노래는 허락 안 해주실 줄 알았는데”

“당연히 그렇게 말씀하셨었죠. 그런데 제가 진짜 매일 찾아가서 말씀드렸어요. 선배도 들어봐서 아시잖아요. 이거 가사도 그렇고 멜로디도 진짜 좋은 거”

 

 

후배의 말이 맞았다. 노래를 들었을 때 멜로디도 밝고 가사도 어려운 표현이 없어서 외우기 쉬울 것 같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곡이 밝은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작년에는 앞줄 사람들이 전부 울고 있어서 노래를 부르는 나도 기운이 빠져서 후반에는 좀 힘들었었다.

 

후배하고 대화를 주고받는데도 자꾸 정신이 다른 데로 간다. 그렇지. 졸업식에 합창부 공연이 없으면 안 되지. 마지막 대단원을 장식하는데 이 얼마나 간지나냐. 입으로는 맞장구를 치면서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이런 상태로 무대에서 잘 할 수 있을까.

 

 

“선배. 제 말 듣고 계세요?”

“어? 미, 미안…. 뭐라고 말했지?”

“선배님 위치요. 당연히 센터에 서실 거죠?”

“글쎄”

“네? 선배가 가운데가 아니면 대체 누가 서요?”

“근데 나 요 며칠 연습에서 많이 혼났고…. 내가 센터에 가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닐 것 같은데”

“누구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있는 거죠. 그리고, 선배가 우리 중에서 제일 잘하시잖아요. 작년에 대회 나가서 최우수상 받은 것도 전부 선배가 열심히 이끌어주신 덕분이고.”

“그건 우리 다 같이 열심히 한 거지 특별히 내가 잘나서 탄 게 아닌걸.”

“에이~ 겸손 떠신다. 그나저나 이게 진짜 마지막 무대에요. 정말 센터 욕심 없으세요?”

“생각해볼게….”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이 흐릿하고 먹먹한 게 꼭 내 마음 같았다.

 

 

6.

초여름을 앞두고 가창 시험을 봤다. 지정곡은 교가였다. 자기 자랑을 조금 해보자면 나는 노래를 잘한다. 그래서 가창 시험이 크게 떨리지는 않았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앞에 서자 내 눈은 또 자연스럽게 후루야를 찾았다. 힘들일 것도 없다. 맨 뒤에 앉아 있는 애들 중 제일 키가 커서 혼자 툭 튀어나온 애가 후루야니까.

 

노래를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시선이 나에게 모인다. 다른 건 몰라도 노래로 주목받는 건 좋다. 중간쯤 불렀을 때 누가 ‘잘한다.’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신이 나서 더 목소리를 크게 냈다.

 

 

작은 칭찬에 우쭐해졌다고 신이 벌을 내린 걸까.

 

 

열어둔 창문을 통해 세찬 바람이 교실 안에 들이닥쳤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후루야가 놀라서 눈을 찡그렸는데 그 모습이 말도 안 되게 멋있었다. 미남은 뭘 해도 미남이라고, 후루야의 외모는 오늘도 굳건했다.

 

그러다가 후루야랑 눈이 마주쳤다. 고작 몇 초 짧게 시선이 얽힌 것뿐인데도 효과는 굉장했다. 심장이 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다. 다음 가사가 뭐였지? 지금 내가 박자를 지키고 있나? 음정은?

 

결국 마지막에 나는 시원하게 삑사리를 냈다. 교실이 떠나가라 웃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7.

“고등학교는 세이도로 가려고 해”

“세이도? 처음 듣네. 우리 동네에서 멀어?”

 

 

후루야가 눈을 피할 때부터 예감이 안 좋았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나는 코앞까지 다가온 감정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했으면서 한사코 그것을 부정했다. 나는 왜 이런 순간에만 촉이 좋은 걸까.

 

 

“세이도는,”

 

 

도쿄에 있는 고등학교야.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겨울밤이 깊어도 이건 너무 어둡지 않나 싶어 커튼을 젖히자 세상이 설국이다.

 

 

 

음악 선생님과 면담을 잡았다. 졸업식 무대에 오르고 싶지 않다고 말을 꺼내자 음악 선생님이 대번 표정을 굳히셨다.

 

 

“졸업식날 무대에 안 오르겠다고? 이유가 있어?”

 

 

‘사실은 무대에 서고 싶어요. 그런데 남자친구랑 싸워서 기분이 싱숭생숭해요. 그래서 노래 부르기 싫어요.’ 이렇게 말하면 그날로 내 사회적 체면은 매장되겠지. 미리 구실을 생각해두길 잘했다, 등교하면서 수십 번도 넘게 속으로 중얼거린 덕인지 대사가 아주 술술 흘러나왔다.

 

 

“이번 기수가 유독 인원이 적어서 그렇지 원래 졸업식 무대는 1, 2학년들만 올라오잖아요. 후배들이 앞으로 합창부를 이끌게 될 텐데, 경험을 쌓는다는 면에서 제가 빠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좀 억지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선생님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살펴보셨다. 날카로운 시선에 거짓말을 들킨 것 같아 조마조마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매끄러운 표정을 유지했다.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은 네가 무대에 나갔으면 좋겠는데”

 

싫어요.

 

 

“다른 3학년들이 고등학교 입시 때문에 탈퇴하겠다고 할 때도 끝까지 붙잡고 설득한 것도 너고”

 

 

그거야 부장이니까 한 번쯤은 붙잡아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1학년이랑 2학년 사이에서 다툼이 있을 때도 네가 중재했고”

 

 

그럼 부장이 돼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잖아요.

 

 

“선생님이 봤을 때 우리 합창부에서 제일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건 너야.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걸?”

“...그냥 하는 말이겠죠”

 

 

졸업식 노래는 작별의 아쉬움을 달래고 서로의 미래를 응원하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의 내 정신 상태는 도저히 누구를 축복해주고 그럴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연습하는 내내 선생님께 지적도 많이 받았다.

 

진심으로 후루야의 앞길을 축복해줄 수 있을까. 지난번에 심하게 말한 건 진심이 아니었다. 후루야한테는 좋을 대로 생각하라고 말했지만 사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후루야가 어디를 가나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이라도 후루야가 나에게 와서 도쿄행을 포기했다고 말해준다면 나는 뛸 듯이 기뻐할 것 같다. 겉으로는 안 됐다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좋아 죽겠다는 티를 줄줄 흘려서 후루야에게 크게 상처를 주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포기하고 말지. 후루야에 대한 일은 둘째치더라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무대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글러 먹은 거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함께 해준 합창부 부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나는 부장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글러 먹었다.

 

 

“일단 좀 더 생각해봐. 그러고 나서 결정해도 안 늦어. 선생님이 보기에는 지금 네가 이러는 거, 졸업 앞두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실수하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그럼…. 마음 정리되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래. 가 봐”

 

 

교무실 문을 나갔더니 후루야가 있었다. 너 왜 있어. 바보야? 나한테 그런 말 듣고도 내 얼굴이 보고 싶니? 나는 저번처럼 후루야를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후루야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우리 얘기 좀 해”

“싫어”

“그럼 이따가 하교할 때 같이 해”

“내가 왜? 싫어.”

 

 

나는 정말 쓰레기다.

8.

“후루야군 좋아해.”

 

발렌타인데이에 건넨 초콜릿은 흉기였다. 조리 과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대체 냉장고에서 굳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내가 초콜릿을 굳힌 게 아니라 무슨 티타늄 합금을 새로 만든 줄 알았다.

 

점심시간 후루야가 삼학년 선배 중에서 제일 예쁜 선배한테 불려 나가는 걸 봤을 때는 감사하기까지 했다. 이 흉물이 세상 빛을 볼 일은 없겠구나.

 

 

그런 내가 대체 무슨 용기가 났다고 후루야를 붙잡은 걸까.

 

 

나를 돌아보는 후루야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희게 질린 탓에 후루야는 흡사 좀비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좋아해. 너하고 사귀고 싶어”

 

 

저지르고 나서야 후회하는 건 내 나쁜 버릇 중의 하나다. 처절하게 차이고 나면 고쳐질 거라고 생각했던 이 버릇은,

 

 

“그래”

“응. 괜찮... 잠깐만, 뭐라고?”

“남자친구로서 부족한 점은 많겠지만”

“후루야군? 후루야? 지금 이게, 어?”

“앞으로도 새롭게 잘 부탁해”

 

 

이렇게 고칠 기회를 영영 놓쳤다.

 

 

 

9.

그 때 그냥 농담이었다고 얼버무릴 걸. 그랬으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텐데.

 

이미 늦었지만 나도 이제 정을 떼는 연습을 해야 한다. 후루야는 도쿄로 갈 것을 결정한 그 순간부터 오늘 같은 일을 아마 각오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열이 받았다. 하다못해 미리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나도 이렇게 비참한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됐잖아.

 

 

........근데 얘는 왜 따라오지?

 

 

“왜 뒤에서 따라와?”

“그냥 이 길로 가고 싶어서 가는 거야. 너 따라가는 거 아냐”

 

 

거짓말하지 마. 너네 집 나랑 완전 반대 방향이잖아. 가방끈을 꽉 쥐었다. 후루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렵지만 행동에서 다 티가 나서 꽤 알기 쉬운 애다. 투수가 이렇게 감정 숨기는 게 미숙해도 되나.

 

 

습관이 무섭다고, 생각 없이 걷다 보니 후루야가 혼자 야구를 연습하는 굴다리 밑에 와 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조심해. 등 뒤에서 후루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음만 먹으면 날 앞서갈 수 있으면서도 후루야는 묵묵히 내 뒤를 자처했다.

 

기둥 벽면에 후루야가 조잡하게 그려둔 9분할 존을 보고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났다. 여기서 후루야가 얼마나 피땀을 흘려가며 연습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한겨울에도 땀에 옷이 푹 젖을 때까지 공을 던지는 후루야. 손가락 끝이 빨갛게 얼어서 동상 직전까지 갔는데도 언제 공을 던질 수 있냐고 묻는 후루야. 이곳에는 계절도 낮도 밤도 없다. 순수하게 마운드에 올라가서 공을 던지고 싶은 야구소년만이 있을 뿐.

 

 

“하나만 물을게 후루야. 넌 야구가 그렇게 좋아?”

 

 

대체 야구란 뭘까. 그놈의 야구가 뭐길래 나는 너랑 헤어져야 하는 걸까. 후루야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감정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게 됐다. 후루야가 야구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건 안다. 나랑 야구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야구를 선택하는 게 맞다고 여긴다.

 

 

사랑하는 이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없을 때, 사랑은 서러움이 된다.

 

 

“왜 미리 말 안 해줬어?”

 

 

대체 지난 3년간 너와 나는 어떤 관계였을까.

 

왜 나는 너와 같은 마음으로 네가 사랑하는 걸 사랑할 수 없는 걸까. 왜 홋카이도에는 너의 공을 받아줄 정도로 뛰어난 포수가 없는 걸까.

 

 

“미안해”

“너는 할 줄 아는 말이 미안하다는 말뿐이야?”

 

 

나는 후루야를 노려보았다.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닦아냈다. 피부가 아렸지만 그보다 더 마음이 쓰렸다.

 

 

“나는 너의 그런 태도가 너무 싫어. 무엇 하나 네가 먼저 말해주는 법이 없어. 도쿄에 가서 야구하는 거, 그래 좋아. 멋져.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나한테도 공유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어?”

 

 

머리가 터질 것 같다. 후루야를 궁지에 몰고 있다는 걸 아는데, 나도 너무 지쳤다. 나는 갈 곳 없는 이 분노와 서러움을 토해낼 곳이 필요했다. 후루야의 마음 같은 건 모른다. 알고 싶지 않다. 바람이 차다 못해 이제는 뜨겁게 느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 같은 거 하지 말걸.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3년 동안 짝사랑이나 쭉 할걸. 이렇게 비참해질 줄 알았으면, 이렇게 속상한 일만 일어날 줄 알았으면 그냥 잘생긴 외모만 구경하다가 말걸…….

 

 

“이런 상황에서도 나만 말하고”

“......”

“그냥 싫다고 말하지, 그랬어? 야구부도 아니면서 나대지 말라고 말해줬으면 나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안 굴었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후루야가 지금까지 나한테 이렇게 세게 말했던 적이 있었나. 나는 순간 놀라서 숨을 삼켰다.

 

 

“일단 이 목도리는 네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추워 보여”

 

 

후루야는 나에게 목도리를 둘러줬다. 거절할 거면 깨끗하게 거절하던가. 이런 상황에도 후루야가 나를 신경 써준다는 사실에 조금 기뻐지는 내가 싫다.

 

 

“나는.”

 

 

소리 없이 내리기 시작하는 눈과 함께 후루야가 지난 3년간의 사랑에 대한 판결을 내린다.

 

 

“너한테 고백 받고 솔직히 놀랐어.”

 

 

자기는 말이 없고 서툴러서 나한테 고백 받았을 때 이상했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 너 거울 안 보고 살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말이 없는 면이 더 과묵해 보여서 좋다는 게 여자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너는 아마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고백은 왜 받아줬는데?”

“1학년 때 가창 시험 기억나?”

“.........몰라”

“그때 삑사리 냈잖아”

“좀 잊어. 그런 건”

 

 

음악 시간에도 너는 대충 립싱크하거나 창밖만 바라봤으면서 남의 흑역사를 어떻게 그리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지.

 

 

“그러다가 며칠 후에 네가 복도에서 다른 친구들이랑 말할 때 합창부에 지원한다는 걸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보통 그런 실수를 하면 노래를 싫어하게 되잖아”

“그건 음악 선생님이 오디션 볼 생각 없냐고 하도 물어보셔서 어쩔 수 없이 나간 거야. 진심으로 할 생각은 없었어.”

“그래도 들어갔잖아”

“그거야….”

 

 

왜 그랬더라. 합창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거랑 여름 방학 때도 연습 핑계로 학교에 나와서 합창부 애들이랑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일처럼 즐거운 일은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데 합창부에 들어간 계기가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났다.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한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

“억지로 마음에도 없는 말 쥐어짜내지 않아도 돼”

“억지로 쥐어짜내는 거 아니야. 왜 자꾸 아까부터 내가 하는 말이 왜 다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

 

 

후루야가 화내는 건 처음 본다. 진심으로 화난 후루야는 무서웠다.

 

나는 지금까지, 내 고민이 세상에서 제일 무겁고 내 아픔이 세상에서 제일 큰 아픔인 것처럼 엄살을 부렸다. 후루야의 마음은 어떨지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목도리를 두르고 있어도 파고드는 바람이 이렇게 아린데 후루야는 이 강바람을 그냥 견디고 있었다.

 

 

이 어리석음을 대체 어떻게 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까.

 

 

“도쿄로 가는 걸 숨길 생각은 없었어. 말하려고 했는데….”

 

 

후루야는 주먹을 꽉 쥐었다. 빨갛게 언 손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나는 가방 구석에 처박아둔 핫팩을 서둘러 꺼냈다. 핫팩을 건네는데 후루야가 받질 않아서 직접 후루야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주는데 후루야가 냉큼 내 손을 잡았다.

 

 

“너를 상처받지 않게 말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쳤어. 이렇게 될 걸 알았으면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바로 말했어야 했는데….”

“왜 바로 말 안 했어...”

 

 

그거야. 후루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간의 감정이 북받치는지 후루야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도쿄로 간다고 하면, 네가 헤어지자고 할까 봐..”

 

 

나는 멍청이다. 도쿄행을 결심한 순간부터 후루야의 머리에는 도쿄와 홋카이도 간 거리가 박혔을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관계에 대해 속앓이를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긴 시간을. 홀로, 혼자서, 후루야 너는. 어떻게.

 

 

“오늘이야말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날 보면 웃는 너를 보니까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 이렇게 미룰수록 더 상황이 나빠진다는 걸 아는데,”

“무섭지”

 

 

후루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움받고 싶지 않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그 마음을 어떻게 모를까. 나는 내 고통에만 몰입해서 후루야를 살피지 못했다. 내 고통만이 진짜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후루야가 애타게 보내는 신호를 철저히 묵살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자 온몸에서 피가 한꺼번에 확 빠지는 것 같았다.

 

 

“후루야.”

“응”

“그때 우리는 이미 끝났다고 말한 거”

“...응”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용서를 바라고 사과하는 거 아냐. 이제 와서 뒤늦게 사과해봤자…. 너무 늦었지”

 

 

말문이 이제 터진 아이처럼 나는 사과를 쏟아냈다. 너랑 할 말 없다고 말한 것도 거짓말이었어. 사실은 매일매일 너랑 이야기하고 싶었어. 그런데 꼴에 자존심 세운다고 싸가지없이 말해서 미안해. 끝에 가서 결국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 하나였다. 이거 말고는 없었다.

 

 

“후루야 너랑 헤어지기 싫어….”

 

 

엉엉 우는 나를 후루야는 조용히 안아주었다. 서투르게 내 등을 툭툭 두드려주는 후루야의 손길에 그렇게 마음이 놓일 수가 없었다.

 

 

 

10

그 일이 있고 난 뒤 거하게 감기에 걸렸다. 굴다리 밑에서 덥다 추웠다가 한 게 나는 내가 감정 소모가 너무 심해서 그런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감기에 걸려서 그런 거였다.

 

 

“학교 갈거야아….”

“무슨 소리야. 너 38도야. 학교에 어떻게 가?”

“가서 후루야 볼 거야...”

“얘가 정말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몸이 아픈 것보다 후루야를 보는 날이 줄어드는 게 더 속상했다.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라인을 보내자 다행히 후루야는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한다.

 

문제는 졸업식이었다. 침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목은 꽉 부었고 쩍쩍 갈라진 논바닥도 지금 내 목 상태보다는 촉촉할 것 같다. 졸업식까지는 이제 2주도 안 남았는데 그때까지 감기를 다 낫고 컨디션을 완벽히 회복해서 무대에 오를 수 있을까.

 

저지르고 나서야 후회하는 것 다음으로 내 나쁜 버릇 중 하나는 하나만 하지 않는다는 건데, 사랑이 해결되니 이제는 몸뚱이가 문제다.

 

 

무조건 3일 안에 낫고야 말리라. 나는 비장한 각오로 알약을 꿀꺽 삼켰다.

 

 

 

11

“그렇게 유난을 떨더니….”

“그때는 제가 미쳤었나 봐요 선생님”

 

낫자마자 나는 음악 선생님을 찾아가서 다짜고짜 무대에 오르겠다고, 센터에 서게 해달라고 생떼를 부렸다.

 

무대에 오를 수는 있었다. 문제는 내 목 상태였다.

 

 

“그나저나 괜찮겠어? 졸업식 전날까지 목 상태가 안 돌아오면 너는 하고 싶어도 무대에 설 수가 없어”

“그건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게 설마 기합으로 해결하겠다는 건 아니지?”

“......”

“.........따듯한 물 많이 마시고. 밥 든든히 챙겨 먹고. 잘 자고. 그래”

“넵”

 

 

일단 급한 일 하나는 마무리 지었다. 이제까지 도망치기만 하던 내가 지금은 이별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이 또한 사랑의 힘이었다.

 

후루야는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잔뜩 상한 내 목소리를 듣고 속상해했다. 그리고 남은 자습 시간 동안 핸드폰으로 뭔가 많이 검색한 모양인지 매점에 가서 따듯한 음료와 핫팩을 모조리 쓸어와서 나에게 바쳤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후루야가 사냥에 성공한 펭귄처럼 세상 뿌듯하게 서 있어서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후루야가 사 온 음료 중 하나를 따서 마셨더니 후루야는 더 기뻐했다.

 

 

음료에서는 홍삼 맛이 났다.

 

 

 

12

후루야가 보여준 야구 잡지에는 봄부터 후루야가 다니게 될 세이도 고교의 기사가 실려있었다.

 

 

“도쿄에 가면 이 포수가 네 공을 받아주는 거야?”

“응”

“잘생겼다”

“.......”

“후루야?”

“나보다 더?”

 

어, 이거 혹시.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후루야 질투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말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서운했는지 후루야는 잡지를 도로 뺏어갔다. 아니긴 뭐가 아냐. 그치만 여기서 삐졌냐고 추궁하면 진짜 삐질 것 같아서 나는 후루야의 팔에 달라붙어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고 애교를 부렸다.

 

 

“당연히 장난이지. 후루야 너 말고 다른 남자는 다 걸어가는 감자처럼 보여. 그것도 아주 못생긴 감자”

“그건 좀….”

“감자 싫어? 그럼 오징어로 바꿀까?”

 

 

후루야의 온기를 느끼며 나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내일이 졸업식이다.

 

 

13

“선배 저 기절할 것 같아요”

“기절할 거면 무대 다 끝나고 해주라”

“그게 졸업하는 선배가 후배한테 해줄 말이에요?”

 

 

긴장을 풀려고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다 보니 팽팽한 분위기도 누그러지고 순식간에 무대로 나갈 시간이 됐다.

 

 

무대로 올라간다.

 

 

관객들 사이 그 어딘가에 후루야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지만 바닥없는 불안함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나는 내 자리에 멈춰 섰다.

 

전주가 흘러나온다. 끝을 향한 시작을 알리는 전주가 흘러나오자 노래를 아는 사람들이 좀 있는 모양인지 어! 하는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아마 대회였다면 상당히 짜증이 났겠지만 졸업식이고 마지막인 만큼 그저 다 같이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하늘은 푸르고 맑게 개었네

 

 

겨우 첫마디를 불렀을 뿐인데 마치 노래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던 무렵으로 돌아간 것 같다. 그때도 이렇게 속이 간질간질하고 목이 살짝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긴장이 풀리고 나면 시아갸 넓어지고 마음은 편안해진다. 이제야 좀 전체가 보인다.

 

이미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도 빨리 다음 가사를 부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다. 하지만 이건 독무대가 아닌 합창, 다 같이 만들어가는 무대인 만큼 내 욕심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박자 하나, 가사 음절 하나하나에 충실하다 보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녹아들게 된다.

 

그렇게 어우러진다. 노래를 부르는 속도에 발맞춰 작별도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이 무대가 영원히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헤어지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러나 아무리 온몸과 마음을 쏟아부어도 어쩔 수 없는 건 있다.

 

 

소중한 무언가가 무너졌던 그날 밤에

 

 

후루야가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간다고 말했을 때 나는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떤 재난은 아무 이유 없이 다가와 내가 일구어낸 모든 것을 부수고 가지만, 후루야가 나에게 둘러준 목도리처럼 새롭게 꽃피는 것도 있었다.

 

 

무서워도 괜찮아.

 

 

예감이 든다. 우리가 어디에 있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지 간에 상관없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을 잊는 건 절대로 불가능할 거라는 확실한 예감이.

 

빨래를 개다가, 지루한 선생님의 수업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창문 너머 하늘을 바라보다가, 아무 이유 없이 혼자 있고 싶어지는 순간에 나는 후루야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또 나가자. 앞을 향해!

 

 

결국 노래가 끝나버렸다. 힘이 쭉 빠진다. 모든 게 연습한 대로 되었다. 휘파람과 박수 소리가 불꽃처럼 터진다. 시간을 돌려서 다시 무대 위에 선다고 하더라도 이것보다 더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사를 하고 멍하고 몽롱한 기분으로 무대에서 내려온다. 1학년이 훌쩍이는 걸 2학년이 달래주다가 결국 같이 울기 시작해서 눈물바다가 된다. 나는 후루야를 만날 때 깨끗한 얼굴로 있고 싶어서 입안 살을 씹어가며 올라오는 울음을 밀어 삼켰다.

 

 

 

무대가 끝나고 강당으로 내려오자 부모님이 나를 반겨주셨다. 두 분은 안 울었다고 시치미를 뚝 뗐지만 둘 다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라는 걸 모두 알아서 장내는 사진을 찍으려고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들로 와글와글했다. 나도 몇 번인가 불려 다니면서 후루야를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후루야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후루야 벌써 갔나..?”

“나 여깄어.”

“후루야!”

 

 

뒤를 돌아보자 후루야의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로 보이는 분들이 계셨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후루야의 가족분들도 똑같이 인사로 받아주셨다.

 

 

“같이 사진 찍자 후루야.”

 

 

후루야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내 옆에 섰다. 무대에 설 때보다 지금이 훨씬 긴장됐다. 지금 나 괜찮나? 땀 때문에 화장 다 무너졌을 것 같은데. 다른 애들이랑 사진을 찍을 때는 생각도 안 났던 것들이 후루야의 옆에 갑자기 신경이 쓰여 죽을 것 같았다.

 

 

“오늘 예쁘다”

“이 타이밍에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노린 티가 나지 않아?”

“뭘 노려?”

“...그런 게 있어 후루야”

“그게 뭔데?”

 

 

어딘가 2% 맹한 게 마지막까지 후루야는 후루야다웠다.

 

 

그 뒤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단골 초밥집에 앉아있었고 엉엉 울면서 초밥을 씹고 있었다. 사무치는 슬픔과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맛이었다.

 

 

 

14

...그랬던 게 3일 전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공항에 있다.

 

 

“어머. 그때 졸업식 때 같이 찍었던 학생이네”

“안녕하세요. 후루야랑 같은 반 친구예요”

 

 

정말 그냥 같은 반 친구일 뿐? 하고 되묻는 후루야 어머님의 표정이 짓궂으시다.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다정한 인상의 후루야의 할머니와 달리 할아버지는 무뚝뚝해 보이셨지만 오는 길에 고생했다고 말해주시면서 그리고 후루야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셨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에게 후루야의 어머님이 진짜 마지막이니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오라며 부드럽게 날 격려해주셨다.

 

 

“후루야”

“와줘서 고마워. 마지막까지 귀찮게 해서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 보는 건데 당연히 와야지”

“응. 고마워”

“여름방학에는 올 수 있어?”

“아마 못 오지 않을까. 고시엔에 갈 테니까”

“고시엔? 벌써 거기까지 생각했어?”

“우승할 거야”

 

 

미묘하게 동문서답이다. 대체 야구가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180도 바꿔놓는 걸까? 그렇지만 나는 후루야가 1번을 차지할 거라고 확신한다. 한겨울에도 손가락 끝이 얼어 터지기 직전까지 공을 던지는 게 후루야다. 무대가 도쿄로 바뀌었을 뿐 욕심은 여전하다. 후루야는 지지 않을 것이다.

 

 

“가서 잘 지내야 해”

“응. 너도 고등학교에서 합창부 열심히 해”

“오디션에 붙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거기도 쟁쟁한 곳이라서”

“할 수 있어”

 

 

후루야의 군더더기 없는 말에 이번에도 용기를 받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껴안았다.

 

 

“잘 할 거라는 말은 내가 너한테 해줘야 하는데, 마지막까지 너한테 받기만 하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보고 싶을 거야”

“나도”

 

 

내 세상은 한 번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졌다. 떨어졌던 합창부 오디션에 재도전해서 붙었고 마지막 무대를 포기할 뻔했지만 도망치지 않고 당당하게 끝까지 노래를 불렀다. 후루야도 중학교 때는 야구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외톨이였지만 도쿄에서는 에이스로 활약할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끝맺음은 분명 필요하다. 우리는 여기서 결별한다. 하지만 이건 나중을 기약하는 일종의 루트 변경이지 영구한 헤어짐은 아닐 것이다.

 

 

“겨울에 만나”

“응. 꼭 날 만나러 와야 해 후루야”

 

 

후루야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펼쳐지는 풍경은 여름의 야구장. 아무도 딛지 않은 마운드로 후루야가 올라간다. 사방에서 후루야를 외치는 함성에 고막이 먹먹하다. 후루야가 공을 던진다. 타자의 배트가 허공을 맥없이 훑는다. 쾌청한 하늘을 배경으로 후루야가 포효한다. 멋진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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