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소처럼 커피를 내리던 헤세드는 문득 다니엘이었을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 오늘은 라일라의 생일이구나.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이 애매한 몸으로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그래도 마음의 문제가 있으니 축하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일라가 좋아하던 원두와 로스팅 방식으로 커피를 내리니 책 정리를 막 끝낸 그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환한 웃음과 함께 익숙한 듯이 자리에 앉는 그 모습은 토끼를 연상하게 했다. 물론 몸집이 작은 것도 한몫했지만 붉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눈동자 역시 토끼를 꽤 닮아 있었다.
“커피 향이 좋은데 일부러 준비해준 거야, 헤세드? 정말 기쁘네.”
“물론이지~ 라일라가 좋아해 주면 좋겠으니까.”
자신의 머그잔을 감싸 쥔 라일라는 햇살처럼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건 잊은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라일라는 늘 그래왔다. 타인을 챙겨주는 것은 익숙하지만 정작 자신의 생일은 제대로 챙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헤세드는 제 몫의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라일라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라일라가 다니엘도, 자신도 좋았다. 하지만 다니엘은 때로 고민하곤 했었다. 라일라가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헤세드였고 라일라가 자신과 함께 하는 삶이 좋았다. 지독한 욕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랬다. 라일라가 L사에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과는 다시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지금 이렇게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라일라,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지.”
“응? 어떤 거야? 혹시 게부라랑 싸우기라도 했어?”
“응? 게부라와는 싸운 적이 없는 걸~ 그건 아니고 다른 거야.”
헤세드는 다시금 제 입을 축였다. 네가 원한다면 나를 대니라고 불러도 괜찮아. 자신이 아닌, 과거의 그로 투영해도 된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었다. 라일라는 다니엘에게 햇살처럼 웃으며 대니라고 불렀다. 애정이 듬뿍 담긴 애칭을 부르는 그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었다. 그렇기에 라일라가 원한다면 헤세드인 자신이 아니라 그때의 다니엘로 봐도 된다는 건 진심이었으나 속은 적잖이 쓰려왔다.
그 말을 들은 라일라는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자신이 들은 말이 어떤 것인지 판단하려고 애쓰는 것 같은 모습에 헤세드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질투는 정말이지 추악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헤세드는 헤세드잖아. 대니이기도 하지만 헤세드는 다른 사람인걸. 제법 단호한 목소리에 그제야 헤세드는 다시 라일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흔들림 없었으며 표정에는 굳은 의지까지 보였다.
헤세드를 사랑하는 것은 내 선택이기도 해. 진심이기도 하고. 말을 이어나가던 라일라는 제 커피를 마시더니 이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대니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라일라의 말에 헤세드는 안도한 듯이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그렇네. 고마워, 라일라. 라일라의 진심이야 알고 있었으나 그 입으로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확인받고 싶어 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해도 라일라는 계속 헤세드가 원하는 답을 변함없이 말해줄 것이다.
라일라, 생일 축하해. 선물로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아쉽지만, 나중에 입 맞춰주는 걸로 대신해도 될까. 그 말에 라일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일? 양손으로 날짜를 가늠하던 그는 그제야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짧은 탄성과 함께 라일라가 고맙다고 쑥스러운 듯이 답했다. 내 생일을 축하받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 그도 그럴 게 도서관에서는 날짜 감각이라는 게 무뎌지잖아. 그 말에 헤세드는 그렇네, 하고 짧게 답했다.
확실히 도서관에서는 언제가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뿐더러 계절 감각 역시 사라졌다. 늘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이곳에서 자신은 어떻게 라일라의 생일임을 안 것일까. 헤세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것이 사랑이라고 치부하였다.
그리고 선물은 지금 주면 좋겠는데……. 조금 쑥스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헤세드는 조금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귀까지 붉게 달아오른 라일라의 모습은 정말 사랑스러웠으며 자신만이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나. 그 말과 함께 서로의 입술이 맞닿으려던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힘 있는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책이 잘못 왔거든. 이건 여기에 둔다.”
게부라의 무덤덤한 말에 라일라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책장 사이로 사라졌다. 반면에 헤세드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지 그러냐고 말했고 게부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책만 내려놓았다.
퍽이나 커피 한잔 마실 생각이 들겠네. 게부라에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헤세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 개의 머그잔에 새 커피를 따랐다. 그렇게 말해도 마실 거잖아, 게부라. 이건 루시아의 몫이야.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는 헤세드를 노려보던 게부라는 성큼성큼 다가가 잔을 집어 들었다.
잔은 나중에 돌려줘도 괜찮아. 그리고 책도 가져다줘서 고마워~ 미소 짓는 헤세드의 모습에 칼리는 알았다고 답하곤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래서 루시아의 생일은 알아냈어? 등 뒤로 들리는 헤세드의 말에 게부라는 뭐라고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사회과학의 층 밖에 나온 게부라는 언어의 층으로 돌아가면 담배라도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계단을 따라 걸음을 옮겨 바로 밑에 있는 곳에 다다르자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루시아였다. 아마 위의 층에서 난 소리를 예민한 청각으로 듣고서 게부라가 들어오기 편하게 문을 연 것일 터였다.
책 정리는 다 끝냈습니다, 게부라님. 바로 명상에 들어가실 건가요? 조심스럽게 묻는 모습에 게부라는 아니라고 답하곤 루시아의 커피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수고했다. 짧은 말과 함께 소파에 털썩 앉은 게부라는 아직 따뜻한 커피잔을 매만졌다.
루시아는 제게 내민 잔을 받아들더니 게부라의 옆에 앉았다. 예전에는 게부라가 앉으라고 해도 못 앉고 얼굴만 붉어졌는데 지금은 꽤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게부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자신과 같은 23구 뒷골목 출신의 이 아이는 제 생일을 잊었다고 했다. 하루 살아가는 것도 힘든 그 환경에서 자신의 생일 같은 것을 기억하기보다는 어떤 식으로 제 몸을 지켜야 할지 그 방법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했으리라.
…죄송합니다. 자신이 생일을 물었을 때,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죄지은 표정을 지었다. 루시아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는 게부라의 말에 대답해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게부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을 뻗어 루시아의 머리 위에 툭 얹었다.
게, 게부라님?! 화들짝 놀란 모습이 꼭 고양이를 닮았다. 게부라는 최대한 살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루시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붉어진 얼굴과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봐도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게부라는 루시아의 애정만큼 답해줄 자신은 없었다. 칼리의 삶도, 게부라의 삶도 한 사람에게 오롯이 애정을 쏟기에는 척박하였고 어색하기만 했다. 물론 루시아가 자신에게 애정을 갈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게부라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게부라님, 저……. 제 생일은 역시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른 날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칼리를 만난 날이라고 할 거면 그만두도록 해.”
“아, 아뇨. 그날도 물론 기억하지만……. 제가 첫 징계팀 팀장이 되었던 날입니다.”
그 말에 게부라는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그날을 게부라 역시 잊을 수가 없었다. 분명 실망할 수도 있는 그 기계의 몸을 보고도 여전히 선망하던 표정을 짓던 녀석은 드물었으니까. 그때의 루시아도 나약하진 않았으나 아직 첫 입사였던지라 어색하고 부족함이 많았었다. 그래도 눈빛만큼은 마음에 들어 그가 징계팀의 팀장이 되었을 때는 나름대로 기분 좋기도 했었다.
그날을 제 생일로 여기면 안 될까요?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은 제 주인에게 혼날까 걱정하는 강아지 같았다. 게부라는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트리며 루시아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커피 향과 함께 바다 향이 은은하게 났다.
루시아의 심장 소리가 게부라의 귓가에도 정신없이 울려 퍼졌다. 보지 않아도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눈에 선하였다. 게부라는 그 소리가 좋았다. 자신으로 인해 생기는 그 소음과 반응들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으며 오히려 마음에 들 정도였다.
생일 축하한다. 아직은 이른 말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줄 수 있는 그 말을 루시아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루시아의 얼굴에 게부라의 품에 푹 파묻혔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보며 게부라는 제대로 생일 축하를 해주었을 때의 루시아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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