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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영체화인 상태로 제 눈을 가리고 등장하던 초반에는 몇 번 놀랐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연구원은 몸을 뒤로 빼고 손을 들어 아프지 않게 그의 콧잔등을 툭 쳤다. 악, 창병의 가벼운 비명이 들린 것을 확인하고서야 연구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들어올 때는?”

“노크하기였지? ……아니, 이건 불가항력이었는데!”

“제가 안 된다고 말을 했다면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아가씨가 안 된다고 말을 했는데 내가 굳이 들어온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하여간 한 마디도 안 진다니까. 연구원은 한숨을 내쉬며 한창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만족한 듯 씩 웃던 창병은 챙겨두었던 서류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 의사 양반이 빠진 내용이라고 하더라. 건네받은 서류를 확인한 여자는 아, 하며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거 챙겨갈 때 나랑 부딪혔잖아. 그때 빠졌나 봐.”

“랜서 탓은 아니잖아요, 주의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제 탓이죠. ……감사해요.”

“아, 그리고 말을 전하자면 무리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닥터가요?”

“아니, 마스터랑 방패 아가씨가.”

 

 

  인리소각이 확정된 이래로 가장 쉴 수 없었던 것은 그 아이들이었건만, 천성이 굳건하고 상냥하기에 그렇게 남은 스태프들을 걱정하고는 했다. 특이점을 수복하고 돌아온 그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되었는데, 어찌 보면 가장 막중한 그 역할을 하다 낸 실수였다. 빠진 자료를 확인하고서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자격이 없는 게 아니냐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찰나였다. 빠진 자료를 찾은 것에는 내심 안심했지만…. 어찌 됐든 서류를 가져다준 그에게도 감사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연구원은 고민하다 손에 쥐고 굴리던 볼펜을 내려놓고 제 방의 문을 열었다. 감사하다는 답례 정도는 하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요. 그런 변명을 하며 자신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거울 같은 것은 놓지 않았기에 알 방법은 없었다.

 

 

“음료라도 만들어줄게요. …제 방은 딱히 그런 걸 준비하는 거엔 적합하지 않으니까, 일단 장소를 옮기죠.”

“그거, 기대 되는데?”

 

 

  등 뒤로 창병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원래도 그런 성격이었기에 놀랍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기억 속 그와 함께한 티타임은 대체로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다. 이참에 새로운 기억으로 덧씌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 했던 선택이었지만,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좋지 않았다. 연구원은 자신에게 남겨진 기억을 따라 습관적으로 그에게 음료를 만들어줬고, 그것을 지적한 창병에게 아무런 반문도 하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자신에게 그 사실을 지적한 그에게 화났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견딜 수 없는 건, 여전히 기억과 감정을 분리하지 못한 채로 자아를 혼동하던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눈이 시큰거리고 뜨거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연구원은 안경을 벗어 챙겨두고 벽에 기대어 몸을 웅크렸다.

 

“무서워. ……이런 감각, 싫어. 느끼고 싶지 않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아.”

 

   겨우겨우 내뱉은 솔직한 진심. 솔직한 마음으로, 연구원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창병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컸다. 그렇기에 조심하고 긴장하고 있었는데, 결국은 이런 상황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터진 것처럼, 한 번 터진 감정은 쉽사리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눈에 띌까 싶어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던 찰나 몸을 번쩍 들어 올리는 감각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

“쉿, 일단 아가씨 방으로 들어가자.”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게 품으로 끌어당기는 그의 손길에 연구원은 가만히 기대 눈을 감았다. 그의 배려는 다소 거친 편이었지만,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음료를 줬을 때 바로 지적한 것 역시 자신이 그런 기억들을 지독하게 싫어하기에 했던 그 나름의 배려였을 텐데, 견디지 못한 건 연구원 자기 자신이었다. …됐다. 그런 말을 하며 그가 자신을 침대 위에 내려주는 손길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연구원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그리고 미안해요.”

“아가씨, 사과를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야? 내가 화낸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아가씨가 더 잘 알잖아. 네 잘못이 아닌 걸 가지고 사과하지 마. 그건 정말로 화가 나니까.”

 

   이 이상의 사과는 받지 않겠다는 단호한 목소리, 그의 그런 말에는 이길 재간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웅크리니 그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에 있는 아가씨는 기억 속의 그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

“……네.”

“그래, 그것만 잊지 않으면 아가씨는 언제고 아가씨로 있을 수 있어.”

 

   혼자서 노력해오던 것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그의 발언에 마음 한구석이 익숙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쉬라며 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이안 해리스가 스스로 느낀 그 두근거림에 대하여 생각을 가지게 됐다는 건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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