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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어스름한 등불 앞에 놓인, 더없이 익숙하지만 며칠 보지 않았다고 부쩍 낯설어진 뒷모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 일어났어? 양전.”
그림자의 움직임을 포착한 너는 금방 고개를 돌려서 내게 인사했다.
등불을 등지고 선 탓에 대부분의 면적이 어둠에 집어삼켜진 앳된 얼굴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아무리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아도 이 눈에 보이는 것은, 네 얼굴을 그리는 불빛의 실루엣뿐이었다.
“여기는?”
“서기야. 믿기진 않지만…, 문중이 우리를 살려둔 모양이야.”
그건 꽤 놀랍다. 무성왕을 서기에 들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우리들을 몰살 시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용케도 사성을 데리고 얌전히 물러나 주었단 말인가.
‘죽지만 않았지, 완벽한 패배군.’
아아. 위장이 쓰리다. 하지만 가만히 패배감에 젖어있을 여유는 없었다. 구겨지는 얼굴을 마른세수로 겨우 펴낸 나는 가장 걱정되는 사람의 안부부터 물었다.
“사숙은?”
“쓰러지신 후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지만, 맥도 숨도 정상이라고 그러더라고. 피로가 풀리시면 일어날 것 같다고 의원이 말했어.”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는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아마 지금 너는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로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야.’ ‘스승님을 볼 면목이 없어.’ ‘천화에게도 미안할 짓을 했어.’
입을 닫고 있어도 머릿속으로 절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가, 피곤한 몸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괜찮아?”
“나? 보시다시피. 큰 부상은 없어. 타박상은 전부 처치해뒀고,”
“잘 안보여, 네 모습.”
“…밤이니까.”
제가 내뱉은 대답임에도 불구하고 어이가 없다 느껴진 걸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매가 실소로 조금은 풀어졌다.
아아. 역시 못 봐주겠다.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보다 위태로운 미소에 몸을 일으킨 나는, 뒤쪽에 놓인 등불을 우리의 사이에 가져다 놓았다.
“…뭐해?”
드디어 드러난 네 얼굴은 생각보다는 의젓한 꼴을 하고 있었지만, 붓꽃 색 눈동자 속에서는 새까만 불안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반사적으로 한숨이 튀어나온 나는 절망할 틈도 없이 너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야 했다.
“봉신당한 사람은 없다는 거지?”
“서기의 사람이 꽤 희생당했어. 사성 중 한 명의 공격으로.”
“왕마의 개천주에 당한 피해자들 말인가.”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는 지금 대화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 보이기도 했다.
“양랑.”
“…….”
“…하아. 너는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무슨 의미야, 그거.”
겨우 다시 입을 연 네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물줄기를 만들며 흘러내릴 것 같이 축축했다.
바보 같기는. 울기는 왜 운단 말인가. 이 패배의 이유가 오직 너에게만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곤륜에서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있는 천재도사인 내가 더 책망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너는 왜 아무도 하지 않는 원망을 제 스스로 긁어모아,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자책을 하는 것인가. 하여간 요령도 없고 융통성도 없는 꼬맹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너는 이런 성격 때문에 내게 미움을 받고, 한 편으로는 동정을 받았지.
“천화 군은 만나봤어?”
“아니.”
“왜? 천화 군도 기절해 있어?”
“나보다 먼저 깨어났어, 그 애는. 워낙 튼튼하기도 하고.”
“그러면 왜?”
“…굳이 물어보고 싶어?”
가시 돋친 너의 말이 순식간에 나를 할퀸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네가 나의 질문이 어떤 의중을 담고 있는지 눈치 챈 것이 느껴져 마음은 좋지 않았다.
“아무도 네게 뭐라고 하지 않아.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잠이나 마저 자. 나도 자러 갈 거야.”
“양랑.”
“자꾸 왜 불러?!”
순간적으로 욱해 소리를 친 너는 지금이 한밤중임을 깨닫고 순식간에 숨을 죽였다. 비명에 가까운 날카로운 외침에도 깨어난 사람이 없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일까. 주변을 살펴보고 별다른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왜 보러 온 거야?”
“뭐?”
“천화 군도 보러가지 않아 놓고, 나에겐 왜 온 거냐고 물었어. 깨어나지 않아서 걱정했어? 아니면, 나에게 밖에 투정 부릴 상대가 없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난 내 몫을 잘 하는 사람이니 네가 있든 없든 별 차이 없었을 거 같아 미안하지도 않았다던가?”
나는 기억한다. 막 정신이 든 내가 허우적거리며 일어났을 때, 손가락 사이로 보이던 너의 뒷모습을.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당연하게 숨죽이고 있던 너를. 기름이 반 이상 타있던 등불을.
“…너 진짜 싫어.”
마치 커다란 비밀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너는 백짓장마냥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린다.
내가 말한 모든 말이 정답이었던 모양이구나. 그래. 그럴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양랑. 자기 자신을 영악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남에게 밉보이는 게 무서워 자기 자신을 지워나가기 바쁜. 어리석고, 요령 없고, 멍청하고, 멍청해서, 불쌍한….
“그렇게 말하는 것도 하나도 안 변했네.”
“진짜 짜증나.”
“알겠어. 난 잘 테니, 천화 군에게는 가봐. 널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너무나도 닮아있고 거짓을 내보일 수도 없을 정도로 가까워 자연스럽게 심술을 부리게 되는 나와 달리, 그는 순수하게 너를 좋아해 주니까. 지금도 분명 ‘나보다 양전 씨를 먼저 만나고 오다니!’ 라며 귀여운 질투를 하고 있겠지. 그러니 난 너를 위해 그렇게 권하고, 얌전히 이불 안으로 돌아갔다.
“…잘 자, 양전.”
내가 이부자리로 돌아가고 난 후에야 진정한 너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멀어져가는 발소리. 마룻바닥이 낡은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너는 역시나 울음소리 하나 내뱉지 않는다.
아아. 역시 미련한 아이다. 슬쩍 상체를 든 나는 다시 네 모습을 찾다가, 기름이 얼마 남지 않은 등불이 유난히도 눈이 부시다 느껴져 손등으로 눈앞을 가렸다.
점점 작아져가는 네 모습이 여전히 위태로워 보여, 잠기운이 싹 달아난다.
손가락 사이로 사라져가는 네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침묵의 탄식을 내뱉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