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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얼굴을 가린 손과 범람하듯 흘러내리는 눈물을 뚫고 보이는 흐릿한 인영으로도 너임을 알았다. 이 무너져내리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화마를 헤치고, 나를 따라 들어올 사람은 너뿐이니까. 내게 남은 건 너뿐이니까. 머릿속을 징징 울리는 이명은 생각을 무디게 했다. 그래서일까 품에 안은 이 유골함이. 네가 앗아간 것들의 잔해가 더욱 무거웠다.

 

웃기기도 하고, 화도 난다. 저세상의 부하 놈들이 알면 길길이 날뛸 일이지. 하지만 나오는 것은 웃음도 화도 아닌 그저 눈물뿐이었다. 무너진 장애물들을 치우며 다가오는 네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불길 속의 너를 보며 동료들의 굳어버린 살점들을 태워내던 그 불길을 떠올렸다. 지금 이 불길이 그와 같은 불길이라면. 나와 너와 이 유골함까지 모든 걸 함께 태워낼 수 있다면.

 

“카나!!”

먹먹한 귓구멍을 후벼파는 목소리. 눈앞까지 닥쳐온 긴토키가 내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우려 애썼지만 어쩐지 헛손질을 했다. 휘청이며 겨우 일어선 눈높이가 긴토키와 닿았다.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이지 않을까. 지금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면. 멍한 정신으로 입을 열었다.

 

“..긴..토..키” 입에서는 꺽꺽거리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지금껏 입으로 거칠게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너에게 뭘 바라는 걸까. 부름에 눈을 맞춘 긴토키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육중한 시계추가 한번 왕복할 만큼의 시간 후에 말을 맺었다.

“...도와줘.”

그리고 머릿속을 잠식하는 불길에 눈을 감았다.

 

 

 

 

눈을 떠보니 하얀 천장이 보였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 병원.. 싫은데...

 

같은 말을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어수선한 소리가 나는 주변을 둘러보자 구석에 고개를 처박고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있는 긴토키가 보였다. 찔린 듯 시선을 돌렸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 주변으로 흰 커튼이 둘려 칸막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병원의 응급실 정도 되는 곳일까. 고개를 떨어뜨리자 붕대가 칭칭 감긴 양팔이 보였다. 오늘 붕대를 감은 기억은 없는데. 내가 감는 것과 반대로 기울어져 감긴 붕대에 위화감을 느끼며 기억을 더듬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유골함. 내가, 내가, 잡고 있었는데, 어디에. 황급히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려는데, 시야 안으로 쑥 유골함이 들어왔다. 유골함을 내민 한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자고 있던 긴토키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채였다. 장해물을 치우는 동작이 버거웠던 게 생각이 났다. 불길 속에서 다친 걸까.

 

“...”

말없이 유골함을 받아들었다. 긴토키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열어봤을까. 내용물이 뭔지 알아차렸을까. 세상에 남은, 내가 지키고 싶은 유일한 잿더미들을.

 

차마 입을 열어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꼭 너여야만 했나, 날 뒤따라온 사람이 꼭 너여야만 했나. 울컥 억울함이 치밀어 목안이 화끈거렸다. 너에게만은 보이기 싫은 속마음을 불길 속에서 미친 듯이 토해낸 탓이다. 두 손안의 것을 꽉 안아 들었다.

 

긴토키는 고개를 숙인 나를 가만 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팔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댄다. 또 아픈데 있으면 얼른 말해.”

 

“ㄱ....”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목이 콱 조여들었다. 기침이 터져 나오는데 모기 찢어질 것만 같았다. 긴토키가 급하게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그러고 있자 기침은 가라앉았지만 목은 여전히 아팠다. 술자리에서 백 곡 정도 뽑으면 이렇게 될까. 콜록대며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긴토키가 의사를 데리고 커튼 안으로 들어왔다.

 

“아 하세요.”

의사는 차분히 옆의 의자에 앉아 기묘한 후레시와 납작한 금속 막대를 입안으로 넣었다.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고 있으니, 의사가 진료를 끝내고 소견을 읊었다.

“기관지에 화상을 좀 입었네요. 한동안 말씀하시는 건 불편하실 거예요. 연기를 많이 마신 것 같으니까 일단은 하루 입원하시고, 약 드릴 테니 드시구요.”

의사가 설명하는 동안 긴토키는 뒤에서 보호자마냥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동안 말을 못할 거라는 소식이 조금 반가웠다.

 

마지막으로 목 안에 뭔가 약을 칙칙 뿌리고는, 의사는 다시 커튼 밖으로 사라졌다.

 

긴토키와 둘이 남겨진 상황에서, 불타버린 집 생각을 했다. 오늘 밤은 병원에서 보내게 되겠지만, 내일부터는 어쩌나. 아줌마는 친구 집에서 지내시려나. 앞으로 지낼 장소를 추려보는 건 정말 금방이었다. 그야 길바닥이나, 유치장이나, 개집 같은 곳밖에 없으니까.

 

긴토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침묵과 외면으로 대항했다. 목이 쉬었으니 침묵이 어찌나 좋은 핑계인가. 눈마저 다쳤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애써 불편함을 견디고 있는데 긴토키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무슨 생각이었어.”

 

젠장. 고막을 다쳤어야 했는데.

아쉬운 생각을 접으며, 목을 톡톡 쳤다. 목이 아파서 말을 못 한다-의 의미가 담긴 손짓에 긴토키가 눈썹을 찌푸렸다. 잠깐의 침묵 후 긴토키가 다시 물었다.

“죽을 생각이었냐.”

예, 아니오로 대답 가능한 간단한 질문. 나는 고개를 저으면 이 문답은 끝이 날 것이었다. 그렇지만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고 그저 시선을 커튼으로 돌릴 뿐이었다.

 

긴토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무언가를 꾹 눌러 참는 것 같았다. 그를 피해 시선을 더 돌리다, 문득 유골함에 눈길이 닿았다. 불길속에서 이것을 구해준 보답을 해야 할 텐데.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이정도로 되돌려주면 충분하리라.

 

긴토키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대답이 되었을까.

 

계속 눈을 피하는 나와, 계속 뚫어질 듯 시선을 보내는 긴토키. 절대 이해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무언가가 문득 익숙한 것들과 닮아 보이는. 그런 혼란스러운 눈길로 나를 보았다. 그게 싫어서 계속 눈을 피했다.

 

긴토키와 있는 게 껄끄럽다.

 

긴토키가 마지막 질문을 고르는 걸 알았다. 눈앞의 알 수 없는 상대를 가늠할 마지막 질문.

“그럼 아까 한 말은...”

“촤라락”

 

최후의 질문은 커튼 속으로 들어온 간호사의 등장에 막혀버렸다. 간호사는 분주하게 약을 몇 알 나눠주었고, 내가 먹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조금 졸리실 거예요.” 그 말만을 남기고 간호사는 바쁘게 사라졌다.

 

잠깐의 침묵을 놓치지 않고, 나는 재빨리 누워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덮었다. 긴토키에게 등을 돌렸다. 완강하게 대화를 거부하는 몸짓에 긴토키도 말이 없었다. 노려볼지 한숨짓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눈앞에 안 보이니 마음이 더 편했다. 한동안을 그렇게 내 등 뒤에 서 있다가 느린 발걸음 소리를 남기며 떠났다.

 

사실은 내가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되는 장소가 딱 하나 더 있다. 염치 불고 잠시 얹혀살게 해달라고 말해볼 만한 유일한 장소. 오갈 데 없어진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인 양 해결사들에게 애원을 늘어놓으면. 어쩌면 받아주겠지.

 

목과 팔의 따가움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래 봬도 전투민족 신라족이니까 회복은 빠르다. 어쩌면 내일쯤이면 다시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내일. 내일 이야기 하자. 내일이라면 말할 수 있을까. 내일이면.

 

내일을 기약하며 눈꺼풀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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