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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햇볕을 가린다고 손을 올린 걸까. 햇살을 받아 더 눈부셔 보이는 너는, 수염도 깨끗이 밀고 제 나름 나갈 준비를 다한 듯 했다. 제 허리에 얹은 손은 오늘은 봐주지 않고 자신의 뜻을 전달하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요루히루 씨, 잠꾸러기네요. 자, 눈 떴으면 어서 아침 먹고 일하러가야죠.”

 

달력을 힐끗 쳐다보았다. 12월 17일. 아, 넌 나와 오늘을 맞는게 처음이구나. 한숨을 쉬고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저 오늘 일 안가요. 커튼 좀 쳐주세요.”

“엑? 어제는 그런 말 없었잖아요. 지금 무단으로 빠질려고 거짓말 하는 거 아니죠?”

“아니니까, 얼른 커튼.”

 

넌 말대로 커튼을 치고는 옆에 누워 나를 살포시 안았다. 멈춘 시간만큼이나, 오늘의 무게는 엄청났다. 5주기였던가, 그 아이가 내 곁을 떠난 것도.

 품속으로 파고들려다, 밀어내기를 선택했다. 1년에 한번 정도는 오롯이 그 아이를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밀어내어도 장미덩굴 마냥 더 꽉 안겨오는 넌, 오늘따라 가시를 세운 것 마냥 아프게만 온몸을 찔렀다.

 

“요루히루 씨. 무슨 일이 있나요?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불안해 보여서 그래요.”

 

집안에 늘 잠가두는 방이 있다. 오늘만, 단 두 시간 칠분만 열어두는 방에 시선을 두었다. 눈을 두어 번 끔벅이다 눈을 감았다. 너의 말에 더 이상 대답할 기력도 없는 날이다. 아직도 난 27살에 고착되어있고, 더 앞으로 나아갈 자신도 없다. 그 아의 시간에 나를 멈춰서. 네게도 스물일곱이라고 이야기하고, 내 나이를 아는 건 회사 사람들 정도일까.

 자는 줄 아는지, 곧 품에서 떼어내고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든 게 소음이고, 모든 게 거슬리는 오늘 같은 날에도 왜 우리는 같이 있을까. 오늘 하루는 좀 떨어져있어도 될 텐데.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목이 졸리는 느낌에 헉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너 또한 놀랐는지 옆에 있다가 바로 어깨를 잡고 괜찮냐며 식은땀을 닦아준다. 어디 아파요? 많이 아파요? 묻는 네 말은. 예전에 내가 그 애한테 해줘야했던 말 같은데. 애꿎은 너에게 나를 투영하는구나, 나는.

 

“키스케 씨.”

“응, 말 해봐요. 무슨 일이에요? 악몽이라도 꿨어요?”

 

시계를 보고 방 쪽으로 이동했다. 조금 일찍 열어도 되겠지. 어차피 두시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니니.

 

"키스케 씨에게 숨겼던 게 있어요. 숨기려고 한건 아니고, 나조차도 가끔 잊어요."

"숨기고 싶으면 계속 숨기셔도 돼요. 잊을 만큼의 비밀이라면, 너무 힘들어서 무의식으로 떠내려갔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는 것과 별개로, 내년에도 이렇게 힘들 수 있으니까."

 

서랍장에 열쇠를 찾아 방문을 열었다. 시라이 엔의 사진 밑에 향을 피우고 어제 사 둔 하얀 장미를 앞에 두었다. 기도할까요, 물으려 옆을 돌아보았으나 키스케 씨는 이미 묵념 중이었다. 너도 하고픈 말이 많겠지. 매번 돌아오지만, 그때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내 밴드의 멤버로서 많이 도와준 엔을 위해, 이 정도는 오롯이 집중해도 되겠지.

 

‘시라이 누나, 있잖아요. 나 예명 뭐할까요?’

‘그러고 보니까, 너 이름 뭐야? 알려준 적 없잖아.’

‘그건 비밀이구요, 빨리이.’

‘머리가 붉으니까……아카아시 엔 어때?’

‘음, 그렇게 한다면. 난 시라이 엔 할래요. 누나처럼 밝아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뭐가 밝아.’

‘적어도 나한테는 누나가 빛이에요.’

 

스물하나 부터, 그가 스물일곱이 될 때까지 만났다. 누나로서, 연인 아닌 채로 사랑하다 이렇기 떠나보낸.

이렇게 향을 피우고, 그의 모든 유품을 받은 건 그 애의 부모는 일찌감치 이혼했고, 양측에서 아이를 맡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환멸감을 느끼면서도 엔을 내 한 공간에 둘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를 빛이라 생각하고, 또한 슬퍼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 너에게 기도하고 다시 내 곁에 있는 사람과 웃어야겠지.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다. 키스케 씨의 손을 잡고 웃어보였다.

 

“둘이 인사 했어요? 자, 여기는 시라이 엔. 내 밴드의 드럼이었고요. 내 아끼다 못해 사랑하는 동생. 시라이라니 엄청 친동생같다. 그치, 엔 군?”

“안녕하세요, 시라이 씨. 요루히루 씨의 애인 우라하라 키스케라고 합니다. 이렇게 멋진 분이 계실 줄 몰랐네요. 요루히루 씨가 말한 그분인가요? 어떤 멋진 사람이 자신한테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고.”

 

무얼까, 키스케 씨를 바라보니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직접 본 듯이 얘기했다. 흐음, 그렇군요. 혼자 중얼거리다 말을 잇는다.

 

“시라이 엔 씨는, 결국 요루히루 씨가 되고 싶었군요. 빛이었기에, 자신이 가까이 가면 나락으로 떨어뜨릴까봐. 그래서 도망가셨습니까?”

“키스케 씨, 뭐예요. 그게, 무슨…….”

“요루히루 씨를 다시 만나고 싶다면, 지금보다는 소울 소사이어티로 가시는 게 나으실 겁니다요. 당신은 원래 나쁜 영혼이 아니었으니.”

 

소울 소사이어티가 뭔지 몰라도, 영혼이라는 말이 나올 때 직감했다. 이곳에 엔이 있고, 키스케 씨는 그걸 볼 수 있다.

 

“엔, 엔. 여기있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여기 있어줘. 매일매일 내가, 돌봐주고, 할 테니까. 드럼도 가져다 놓을게. 응?”

“요루히루 씨, 인과의 사슬이란 게 있습니다. 이 사슬은 언제까지나 이어나간다고 말할 수 없어요. 이게 끊어지고, 불순한 마음을 먹으면 호로가, 즉 괴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에요.”

“엔은 나쁜 아이가 아니야!”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키스케 씨는 한숨을 푹 쉬고 늘 품에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로 허공을 푹 찍더니, 내 어깨를 꽉 잡고 귓전에 속삭인다.

 

“엔 씨도 원한 겁니다. 엔 씨는, 계속 요루히루 씨의 곁에 남아있고 싶다는 마음을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빨리 가길 원했어요. 엔 씨는, 요루히루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랐어요.”

“……왜 내 소중한 사람을 또 보내는거예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어요. 요루히루 씨, 지금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건 알고 있습니다만,”

“나도 데려가면, 좋겠다고 생각한 걸 겨우……잊어갈려 했는데, 당신이 데려갈 수 있다면 데려가요.”

“요루히루 씨!”

 

돌연 엄하게 목소리를 깔면서도 힘 있게 이야기한다. 부서지지 않게 하겠다는 듯 꽉 끌어안고. 보다 부드럽지만 먹먹하게 귓전에 이야기한다.

 

“……요루히루 씨, 엔 씨가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고 했잖습니까. 저도 하나 이야기 해드리죠. 저는 사신입니다. 당신이 흔히 저승이라 생각하는 소울 소사이어티의 사람이었죠. 그래서 엔 씨의 영혼을 볼 수 있었죠.엔 씨는 웃으며 갔지만, 자신에게 얽매여 살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지금처럼, 하루만 슬퍼하며 살길 바란다고. 전해드리라고. 분명, ‘요루히루 누님은 이렇게 우라하라 씨와 얘기하는 걸 알면 울 테니까 좀 전해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더 없어요? 엔이 한 이야기.”

“자아, 진정 되셨으면 나가서 이야기해요.”

 

향을 끄고, 다시 한 번 그의 사진을 보고 나왔다. 문은 이제 열어두기로 했다. 키스케 씨는 눈물이 마른 내 얼굴에 잔뜩 비누칠을 해 세수 시키고 머리를 빗어 묶어주며 말했다.

 

“아, 이야기에 대해 말하자면……요루히루 씨 나이는 ……살입니다, 매형. 이라고 했다는 거?”

 

덕에, 수분 보충으로 마시고 있던 물을 뱉을 뻔했지만.

그래도, 너로 인해 오늘이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리 보낼 수 있다면 늘 즐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감히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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