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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등 뒤로 지는 황혼 저 너머의 빛에 가려져 그늘이 져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이 부셨고 어쩐지 그녀가 웃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슴께 깊은 곳에 난 상처가 바닷물에 덮히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그는 이것이 꿈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여행자는 꿈을 꾸는 편이 아니었다. 고단한 하루의 여정 끝을 맺는 것이 여유로운 시간 동안의 수면이든 토막잠이든 어쨌든 다음날을 위해서라면 푹 잠들어야 했다. 반복되는 일상은 그가 사랑한 그의 일생 중 가장 가치있고 다정한 것이었다.  담담히 지내온 삶을 보상해주기라도 하듯 그가 향유할 수 있는 것은 모래사장 끝에 감싸듯 부딪혀 거품을 일어내는 파도같이 조용하고도 꾸준히 찾아왔고, 그는 그런 물결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잔잔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왔다. 

 

 참으로도 견고하고 믿을 수 있기 마지않는 그런 일상에서 튕겨져나왔을 때, 여행자는 꿈을 꾸었다. 부서진 액자의 꿈. 파편을 밟고 선 그가 뒤를 돌았더니 분명히 걸어왔던 길이 보이지 않았다. 돌아본 길은 그저 밝고 밝은 빛에 감싸여있었다. 눈이 부셔 그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조차 생각해내기 힘들었다. 그는 간절히 어둠을 바랐다. 그를 이 길에 내몬 것은 빛이다. 아무리 눈 앞을 손으로 가려보아도 손 틈 사이로 비집어 들어오는 강렬한 빛은 그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만 했다. 그는 그 밝기만 한 빛이 자신의 책임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빛이기에 후회는 없었으나 때때로 그 강렬한 열기는 그의 목을 바싹 태우는데 유감이 없었고 그는 때로 손으로 눈을 가려 어둠을 찾고 싶은 간절한 욕망에 휩쓸렸다.

 

  깊은 숨과 함께 선뜻 눈이 떠졌다. 코 끝에 소금기 있는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몸은 잔뜩 물을 먹어 눅눅한 습기에 무거웠지만 입 안은 모래를 한 웅큼 씹은 듯 거슬거렸다. 그는 혀 끝으로 입천장을 두어번 쓸어 낸 뒤에야 자신이 잠에서 깨어났음을 알았고 이윽고 그가 꾼 것이 악몽인지 기억해냈으며 손을 뻗어 익숙한 호흡을 찾았다. 손 끝을 타고 옅은 새근거림이 느껴지자 그는 조용히 천장을 보고 돌아누우며 조용하게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자신이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호흡을 하는 임종 직전의 노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니 면도를 잊은 턱선이 거칠었다. 방 안은 초침 소리도 없을 만큼 조용했고 그는 자신이 덮고 있는 것이 온몸을 감싸는 고요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탁상 위에 놓인 전자 시계가 소리 없이 깜박일 뿐 숨을 죽인 그 외에 살아있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옆에서 잠든 그녀는 분명 숨을 쉬고 있었고 뺨이든 어깨든 손을 가져다 대어 보면 그녀 또한 이곳에 존재함을 알 수 있겠지만 그는 아직 그녀의 '살아있음'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게 혀를 찼을 뿐 그녀에게 손을 뻗지는 않았다. 잠든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잠이 없었을 뿐더러 정확하게는 자신이 먼저 잠드는 순간까지 일이나 적어도 어떠한 생산적인 행동을 하려고 했으며, 그녀의 의사와 상관 없이 그 어떤 가벼운 자극에도 깰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짧은 잠에 방해가 될까 그는 몸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고민에 빠졌다가, 이내 방 안을 빠져 나가기로 한다.

 

  새로운 시간대의 밤은 낮과는 다르게 밝았다.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도로에는 차들이 별빛보다 더 맑은 주홍색 빛무리를 지어 이동했으며 어쨌든 사람이 켜고 있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빌딩은 그 유리창 너머의 사람들에게 동질감과 연민이 섞인 적당히 따뜻한 감정을 일으켰다. 그는 꿈속에서 본 날카롭고 차가웠던 빛을 생각하면서 손을 눈 앞으로 가져다대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미약한 빛마저 가려지자 그는 그제서야 그가 등지고 선 벽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지상 관제소에서 톰 소령에게... 여행자는 언젠가 들었던 노래를 떠올렸다. 지구로 돌아올 수 없는 우주선과 우주비행사의 노래. 달은 저 궤도 위에 있고, 지구는 푸르고,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네...

 

 그는 대체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 하려는 편이었지만 알 수 없는 울컥거림과 함께 이따금 밀려오는 무력감을 느낄 때에는 그야말로 홀연히 우주를 떠다니는 미아 같았다.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없는 암묵의 장 안에서 그는 자유로움과 외로움, 고립감과 편안함이 섞인 헝클어진 감정을 느꼈다. 적어도 빛이 없으니.. 어둠은 따뜻했다.

 

릭.

 

 꿈속에서 그녀는 그를 불렀을까. 손가락 사이로 보인 그녀는 그가 머릿속으로만 그려오던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그 해사한 빛이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모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는 스스로가 그 미소를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장 아프게 알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지 모를 분노와 연민과 향수를 느끼고는 몸을 반쯤 돌려 그가 그러안을 수 있는 최대한의 어둠을 끌어안았다. 그에게 잡히는 것은 단단한 어깨와 등허리였으며, 자신의 가슴께에 그녀의 숨의 증거들이 설풋하게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을 확인하며 자신이 무엇을 의지했었는가를 깨달았다. 그에게는 도망쳐야 할 이유도, 도망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허리에 그녀의 손이 에둘러지자 잠시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마주 닿은 뺨에 닿는 피부, 자신의 팔에 안겨 있는 무게감과 미약하게 흐르듯 들리는 숨소리와 마른 밤의 향. 알 수 없는 것은 그녀의 모습 뿐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다시 눈을 가리고는 그 손가락 틈 사이로 눈을 떴다. 

 

 그곳에는 어둠만이 있었고,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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