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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설산의 하얀 눈은 희미한 달빛도 전부 반사 시켜 어두운 밤에도 네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나의 눈이 지독하게 좋은 탓도 있겠지마는, 나는 네가 달빛에 빛나고 있어서 더욱 잘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널 특별하게 생각해서 그럴 지도 모르지. 나도 모르게 쓰게 웃고 말았다. 고작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연연할 때가 아닌데.
“아라쉬? 안 주무시나요?”
“그러는 비스야 말로.”
“저는 수면이라는 행위를 취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호문클루스니까요. 마력만 있으면 영구기동 가능합니다.”
“오오, 그 논리로 따지면 마력으로 이루어진 나는 서번트라서 더 잘 필요가 없겠는데!”
너는 내 말을 듣고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는 말을 하나하나 곱씹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안에 차곡차곡 쌓는 그 일련의 과정들. 나는 흐뭇한 마음에 들어 너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한 올 한 올 전부 마력으로 이루어진 이 머리카락들은 손아래를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비스, 하고 네 이름을 불렀더니 너는 고개를 한참을 들어 올려 나를 보더니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 순간 기묘한 충족감이 차올라서 웃고 말았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니 비스 네가 나를 빤히 마주본다. 너는 아마 생각하고 있겠지. 내가 왜 웃고 있는 지. 내가 갑자기 웃는 이유를 찾기 위해 너와 내가 함께 있었던 이 짧은 순간을 되새길 거고, 함께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한 번 곱씹겠지. 그렇게 또 네 안에 내가 채워진다.
나는 비스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고 허리를 숙여 눈을 마주쳤다. 어쩐지 조금 만족스러운 얼굴이라, 나는 또 웃었다.
“비스. 잘 필요가 없는 사람끼리 코코아나 마실까?”
“……아르주나가 오늘은 단 걸 너무 많이 먹었다고 했습니다. 몸의 회로가 엉망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다시 해가 떠야 먹을 수 있다고…….”
“그래서 지금 해가 뜨는 걸 기다리고 있던 거야?”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과연, 아까부터 괜히 창가를 어슬렁거린다 했다.
미각은 네가 홀로서기를 시작하고 나를 포함한 ‘우리’와 함께 성장하면서 가장 먼저 얻은 감각 중 하나였지. 어느 날 네가 “아라쉬가 준 초콜릿이 아주 신기했어요. 그래서 많이많이 초콜릿을 먹었습니다.” 라고 말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광택이 흐르는 검은색의 단단하고, 하지만 손이 닿으면 녹아내리는 달짝지근한 것은 내가 살던 시절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신기해서 너에게 주었다. 그리고 너는 내가 준 것이 신기해서 그것을 탐구해 나갔지.
너와 함께 있을 때마다 나는 그런 걸 느낀다. 내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네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 같다고. 나의 작은 순간들이 네 안에 쌓이고 쌓여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사소한 것들이 네 안에서 커지고 커지는 것 같다고.
꼭 내가 너에게 대단한 존재인 것 같았다.
“그러면 같이 해 뜨는 걸 기다릴까.”
“괜찮나요?”
“나는 눈이 좋으니까. 해가 살짝만 떠도 나는 그 태양빛을 전부 볼 수 있지. 해가 뜨자마자 알려줄게.”
네가 그제야 살짝 웃었다. 이제 막 ‘웃는다’는 걸 배운 너의 어색한 미소였다. 나는 네가 그렇게 웃는 게 정말, 너무 좋아서.
“갈까. 비스.”
“네. 아라쉬.”
해가 뜨면 알려주세요. 그럼. 알려주고말고. 해도 달도 별도, 이 세상 어떤 작은 변화라도 전부 네게 알려주고말고.
나는 내 손을 잡는 너와 나란히 섰다. 나라는 존재를, 아라쉬 카망거라는 존재를 가득 채운 신화와 이야기를 돌아본다.
그리고 지금 내 안의 모든 신화는 빛바래지고 오직 너와의 이야기만이 나를 가득 채운다.
여기에 있는 나는 이미 영웅이 아닐 지도 모르지.
네 손을 마주잡는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꾼다. 이 찰나가 영원과도 같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