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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손바닥을 내리자 구석진 곳에 멀리 놓인 테이블까지도 확실히 보인다. 몇 번을 바라봐도 붉은 머리, 테이블에 얼굴을 박을 듯 말 듯 무모하게도 퍼마시는 모습을 보니 단 하나의 생각만 스쳤다.
-왜 저기서 저러지?
답은 명확하다 : 여기는 막스의 단골 술집이기도 하니까. 싸구려 술집치고는 사람도 적고 분위기도 좋아서 단둘이 자주 왔었지,
그러니까 파혼 전까지는.
-
그날 막스는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손을 움직여가며 구경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라며 그는 만족스런 웃음을 띤 약혼녀를 바라만 봤다.
사실, 완벽이라는 건 있지도 않고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은 하던 그였지만 오늘은 정말인지 완벽에 가깝다고 자부할 만했다. 오랜만에 막스도 기분이 좋았고 –그러니까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아 그를 몰지 않았고- 웬일인지 일정도 널찍해서 오랜만에 약혼녀에게 쏟아부을 시간도 많은 데다, 도로도 뻥 뚫려 순조롭게 웨딩드레스 샵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막스는 말한다.
“서재에 침대도 하나 놓을래. 소파 말고 침대!”
“그러든가. 그럼 개문은 어디에다 놓을래? 방문 마다 뚫어놓을 수는 없으니까. 서재? 안방?”
“아냐, 강아지는 기르지 말자.”
“그래? 왜?”
막스는 핸드백을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아. 벌써 귀찮은 거 보니까 나 강아지를 좋아하지도 않는가 봐.”
“흠, 글쎄.”
“당신 집에 없을 건 안 봐도 뻔하잖아. 놀아주고 똥 치우고 산책하는 건 다 내 몫 아냐? 난 못 해.”
“그거야 사람 시키면 되지. 집에 너만 있을 것도 아니고, 나라고 계속 바쁘지도 않을걸.”
“아, 그래도 싫어. 자기 반년 전에도 그 말 했잖아. 바뀌는 것도 없는데 말만 번지르르 한 거 싫더라.”
이내 조그마한 립스틱과 손거울을 꺼내 들어 입술에 바른다. 그는 저 색을 싫어했지만, 잠자코 있기로 한다.
“이것 참, 누가 들으면 내가 밖에만 있는 줄 알겠는데.”
“밖에만 있는 거 맞잖아. 나 당신 집에서 일주일 동안 당신 기다린 적도 있거든, 기어코 안 오더라.”
“그땐 특히 바빴나보지, 그리고 집에 있을 거면 나한테 미리 말 하라고 하지 않았나.”
“왜.”
“당연한 걸 물어보네, 사적인 공간이잖아.”
“그렇네, 숨길 게 너무 많으신가 보네. 그때 그냥 집안을 뒤져볼 걸 그랬어.”
“하하, 너 또 너무 가네.”
“뭐래, 그따위로 말할 거면 열쇠나 주지 말았어야지.”
“대체 왜 얘기가 여기까지 이어졌는지 모르겠거든. 이쯤에서 그만 하자니까, 나도 항상 이렇게 바쁘진 않을 거고, 내년에는 확실히-”
“짜증 난다고.”
“아, 또 시작이군.”
“뭐?”
그러다가 들린 말은 이거였다.
“썅! 당장 차 세워! 창문 깨고 뛰어내리기 전에 세우라고!”
귀가 쨍하고 울리자 순간 온몸의 열기가 빠져나간 듯 차분해졌다. 급정지를 했는지 끽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쏠렸고 그는 막연히 궁금해졌는데, –‘왜 이렇게 됐더라?’- 막스가 차 문을 벌컥 열고 나간 뒤에야 깨달았다. 오늘은 완벽에 가까운 날조차 못 된다는 것을.
“맞아.”
막스는 다시 차 문을 벌컥 연다. 어서 오라며 능청을 부릴 틈도 없이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더니 그에게 내리꽂듯이 집어던졌다. 이게 다트였다면 아마 만점을 받고도 남았겠지. 어쨌든 그러더군.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로-
“하루라도 안 싸울 수는 없을까?”
“아... 지금부터라도 그러면 되지, 자기야.”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마. 나 지쳤어. 이쯤 하자.”
“뭘?”
“묻지 마. 알잖아. 안녕.”
멀어지는 (전) 약혼녀의 뒷모습을 보며 시트 위에 놓인 반지를 내려다봤다. 의외로 정적은 빠르게 걷혔는데,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디로 모실까요, 사장님?
“가던 길로 가.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그는 덧붙였다.
“예약은 취소해야 하니까.”
-
막스는 이게 미련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회사 건물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혹시라도 마주치면 아닌 척 스쳐 지나가다가 붙잡아 안부라도 물을 수 있는 거고, 그러다가 얘기가 잘 통하면 뭐...
잘 통하면 뭐? 어쩌려고? 내가 울고불고 빌 줄 알아? 누가 먼저 건드렸는데?
그들은 그러지 않아도 될 때 자존심을 내려놨으며 그래야만 할 때는 서로의 자존심을 꽉 붙든 채 누구 하나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특히 그날이 그랬다. 자다가 불려 나가니 대뜸 급하게 예약을 해둔 게 어쩌구 저쩌구 그래서 오늘 웨딩드레스를 맞춰야 한다고 나왔어도, 그간 바빠서 안 그래도 까만 눈매가 더 까매졌을 정도니까-
'오죽했겠어? 세상에, 저렇게 들떴는데. 그럴 수 있지.'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에, 또 시작이군.”
“뭐?”
이것도 살벌한 시작이었지만 의외로 잠잠히 가라앉았고, -“몰라서 묻는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서로 기분 상하는 거 알잖아?”,“그래, 그건 그렇네.”- 막스는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봤다. 그가 갑자기 내뱉은 것도 그때다.
“그래, 내가 참는 거지.”
“뭘?”
“너 말이야, 너. 나 아니면 누가 참아.”
“뭐라는 거야 지금? 말 다 했어?”
그렇게 막스는 본격적으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고 늘 그렇듯 서운함이나 자잘한 짜증, 여태껏 각자를 몰아세운 외부상황을 핑계 삼아 서로를 공격하고 탓하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 이 미친개 같은 싸움이 절정에 다다를 무렵 그녀는 자신의 귀까지 먹먹해지도록 소리를 지르다가 생각했다.
‘아 잠깐.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그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었고 동시에 차까지 멈춰버려 그녀는 그대로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웨딩드레스는 골랐냐고 묻는 어머니의 말에는 꿈을 꾸는 듯 멍한 느낌을 받는다.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말했다.
“나 파혼했어.”
그리고 멍청하게 흐흐 웃으면서 방으로 올라간 뒤에는 침대 위로 쓰러지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이 순간이 익숙했다. 한참을 흐느끼던 막스는 축축한 눈가를 매만지며 생각을 가다듬다가 그와 싸우고 헤어지면 이 순간이 반복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 멍청한 고리도 이젠 끊겼다, 이런 식으로 우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지. 생각했다. 생각했었다. 생각했어야만 했는데.
막스는 마지막으로 회사 건물을 바라보다가 돌아서며 택시를 잡는다. 이제 진짜 끝인가? 하지만 아리송할 때야말로 정말 끝이라는 걸 그녀는 안다. 서점에 들를까 하다가 내키지 않아 곧바로 집에 가기로 했다.
그 뒤로도 며칠이 지나도록 막스는 같은 자리를 맴돌았지만, 그런데도 자신이 그 멍청한 고리에서 벗어났다 굳게 믿었다. 만일 이러다가 그 사람과 마주치면? 모르겠다. 그건 그때 알아서 흘러가리라.
생각해보면, 그랬다. 스쳐 지나갈 뻔한 우연을 그가 우그리고 찢고 접어 필연으로 만든 그 날부터 그들의 관계는 항상 삐걱거렸다. 그러니 파혼도 당연하다, 어쩌면 그들에게 평생이라는 건 어차피 끝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잇기 위한 최면 같은 단어였을지도 모르겠다. 결혼해도 금방 이혼했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혼보다는 파혼이 나으니까. 그렇게 막스는 지금까지의 그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징그러운 인간이었는지 낱낱이 생각하다가 옷가게 창 너머의 감청색 코트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어떤 얼굴을 떠올렸고, 그런 자신에게 경악하며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
한두 달 정도 그녀가 자주 가는 서점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그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이럴 필요는 없지.’
어차피 같이 살면 피곤한 건 자기 자신이라며 한껏 능청을 떨던 그였으나 그즈음에는 외면하기 힘들 정도로 매일매일 새롭게 기분이 별로였다. 물론, 그는 철두철미한 남자이기에 일에 지장은 없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지장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을 부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뭐, 그녀와 예상외로 길게, 꽤 깊게 관계를 맺어왔기에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하며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을 바쁘게 몰아넣거나 이런저런 들큼한 사랑들을 들쑤시고 맛보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나날이었다. 그날, 꿈에서 깨어난 그는 식은땀을 연신 닦으며 읊조렸다. 제길.
‘이렇게 진부할 수 있나?’
그랬다, 몸서리가 쳐지게 진부했다. 꿈속에서는 막스가 나와서 그가 제일 싫어하는 블라우스와 끔찍해 하는 립스틱을 바르고서는 멀뚱히 서 있었다. 심지어 구두도 스타킹도 신지 않은 우스운 꼴이었지만 제일 얼간이 같던 건 그런 막스를 보고서 주저 없이 발걸음을 내디딘 자기 자신이다. 막스는 그 웃긴 립스틱을 잔뜩 찍어 바른 입술을 길게 늘이며 말했다.
“나, 당신 그렇게 달려오는 거 처음 봐! 너무 웃겨!”
그리고서는 늘 그렇듯 몸을 살짝 웅크리며 하하하! 하고 크게 웃는다. 그는 막스가 웃을 때 과하게 몸을 들썩거리며 입을 크게 벌리는 걸 –그리고 옆 사람을 너무 세게 치는 것도.- 너무나 싫어했지만, 농담을 조금 해보자면 그렇게 싫어하진 않았다. 그게 지금 그가 차를 타고 구석진 골목으로 향하는 이유다.
생각했다, 무의식이 흩날린 스케치마저도 그녀를 원한다면 뭐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러니 ‘진짜’ 그녀를 다시 볼 수는 없는 만큼, 막스의 모습이 제일 생생히 떠오를 법한 장소로 가서 거하게 마신 뒤 자기 자신에게 선언해야 한다. 이제 인생에서 그녀는 없고, 결국은 여기까지였음을. 설령 무의식일지언정 이런 식으로 자신을 쥐락펴락하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그이기에. 그렇게 싱클레어는 평소보다는 다소 흐트러지게 차를 세워 놓은 뒤, 술집 문을 벌컥 열며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으려 했다. 그리고-
마침 막스는 감정이 북받치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던 참이었다. 그녀는 ‘영영 끝’이라는 상황을 힘겹게 납득하려다가도 자신을 뒤덮는 온갖 영상에 속수무책으로 함락당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 같은 침대에서 잠이라도 자는 날이면 그녀는 그의 손을 꽉 붙잡아 놓지 않았다든지. 손 냄새나 살갗을 타고 오르는 몸의 온도, 그리고 밀착된 몸. 그런 게 자꾸만 생각나서 막스는 눈물을 훔치며 위스키를 한 잔 삼켰다가 자기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그랬지? 그렇지만 그날은 그 개새끼가 날 너무 건드리긴 했었다며. 막스는 정신없이 눈물을 훔치며 스스로를 진정시킨다. 이따금은 주변에 들러붙어 왜 그러냐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남자들도 쫓아내야 했다.
그렇게 위스키를 한 병 반째 비우는데 누군가 슬그머니 다가와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말했다.
“우네?”
썅.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미치게 싫었다. 그녀는 잔에 시선을 고정하며 받아쳤다. 꺼져. 그러자 하하 웃으며 받아친다. “이야, 여전하네!” 저 목소리,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흩뜨리려 애쓸 때 나오던 목소리다. 끝이 조금 떨렸던가, 중간중간 말을 조금 골랐던가. 그녀를 붙잡아 세우며 말을 붙여 연락처를 받아내며 말했던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라고 하더라고요. 맞죠?- 그때 같다, 대체 왜 자꾸 생각나는 거지?
“있잖아.”
그는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가더니 위스키를 콸콸 채우며 덧붙였다.
“그래도 이 술집에서 제일 믿을만한 건 전 약혼남 아니겠냐 이거지. 안 그래?”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그는 동의를 구하는 듯 의기양양하게 바라봤다. 그녀는 아직도 축축한 눈가를 훔치며 말한다. 스토커 새끼. 그가 받아친다, 글쎄다. 지금은 나도 좀 놀랍거든.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낭만적인 말로 하자구, 이거야말로 ‘통한’ 거지.
막스는 짜증이 치밀게 여유로운 그를 보며 생각했다. 이다음은 분명 어깨를 으쓱하면서 같잖은 농담으로 그녀를 웃기려 발악하겠지. 그녀가 결국 그 거지 발싸개 같은 농담에 웃어버리면 긴장이 깨져버려 그는 은근슬쩍 내일도 다시 만나자는 둥 내가 바래다주겠다는 둥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그녀를 차에 태울 것이다. 그럼 심야의 분위기에 휩쓸려 다시 멍청한 사이클 안으로 들어설지도. 그렇게 언젠가 또다시 이런 순간이 찾아올 것만 같다. 다음에는 술집이 아니라 공원일까? 아니면 식당? 극장? 아니면 서로의 집 앞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어깨가 아니라 손을 들어 안주로 나온 싸구려 비스킷을 하나 집어 입안에 던져 넣었다. 그녀의 예상처럼 얼빠진 농담을 지껄이는 대신, 처음 보는 얼굴로 –막스는 그 순간을 화창했다고 기억한다. 어쩌면 벅차다고도.- 웃으며 말했다. 근데 너, 세수해야겠다.
“정신 없었나 보네. 눈 화장 번져서 말이 아냐.”
그러더니 테이블에 놓인 막스의 핸드백을 뒤적거리다가 파우더 컴팩트를 꺼내 들어, 그녀는 그걸 받기도 전에 그의 양복 가슴께에서 행커치프를 잽싸게 잡아다 뺐다.
“이야, 눈썰미 좋네. 마침 거기에 네가 좋아하는 향수 뿌렸거든.”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향이 날아갔나 본데. 다시 뿌려줘?”
“필요 없어.”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알 거 없잖아.”
“꽤 됐나 보네. 좋아, 나 보고 싶었지?”
“그런 말 좀 하지 마. 짜증나.”
“그래 그럼.”
“근데 보고 싶었어.”
간간이 소란스러워지는 한적한 새벽의 술집이었다. 둘은 나른한 조명과 분위기에 섞여들어 누군지도 모르게 흐려졌다. 웃음소리가 들리고 이따금 훌쩍거리면서도 대화는 다시 웃음으로 마무리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