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은 재생버튼을 눌러야 재생됩니다.
손가락 사이로 당신의 모습이 보였다. 토막난 뼈에 덜렁이고 있는 살덩어리를 손가락이라고, 결정체가 다닥다닥 붙은 채 신기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움직이고 있는 산송장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분명 눈을 가리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감쌌으나 다 떨어져 나간 넝마로는 어떤 것도 가려지지 않았다. 괴로움에서 늘 도망치고자 하던 어린 零은 마지막에 와서조차 같은 행동을 취했다. 그것은 그가 많은 것에 무지한 탓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손으로 눈을 가린다고 해서 숨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당신이 내게 해준 말은 분명 첫 생일축하를 받은 날에 들은 말이었다. 생일이라는 건 태어난 날을 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까마귀지 않나요 태어난 날이 알 속에서 처음으로 온전한 모습으로 영글었을 때인지 알을 깨고 나왔을 때인지조차 알 수 없고 무엇보다도 어느 쪽이든 저는 그 날짜를 알 수 없어요 저는 줄곧 상자 속에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소생시킨 그 날을 당신의 생일로 삼지요. 당신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다정해서 나는 목소리로도 체온을 전달할 수 있는 줄로만 알았다. 나는 인간으로서 탁월하게 미성숙했으나 당신은 나를 착실하게 교육시켰다. 그리고 그런 분에 넘치는 따스한 삶을 망가뜨린 것은 다름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확실히 깨닫고 있다. 그리고 덕트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 겨우 끌어온 나날들에 종지부를 찍는 오늘은 종말의 날이다. 그리고 사상 최악의 흑문은 아가리를 벌리고 수많은 몬스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과 나는 단둘이 최후의 전투를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과 나는, 당신과 그리던 날을, 그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당신의 옷깃을 쥐던 힘없는 손가락은 이제 제 기능을 수행하리라 기대되지 않는 모양새로 흐느적대고 있다. 당신 역시 같다. 나를 이끌던 단단한 팔은 이제 제 기능을 수행하리라 기대되지 않는 모양새로 꺾여 있다. 찢어진 옷가지 사이로 당신의 몸이 보인다. 상처가 보인다. 부적이 보인다. 자색 결정이 보인다. 푸른 불꽃이 보인다. 당신의 몸에 돋아나는 수많은 눈알들이 보인다. 나는 시선이 무서운데 당신은 그걸 알 터인데 나에게 가혹한 짓을 한다. 눈알 하나가 빙글 돈다. 초점은 정확히 나에게 향해 있다. 눈알 하나가 더 빙글 돈다. 초점은 정확히 나에게 향해 있다. 눈알 하나가 또 빙글 돈다. 초점은 정확히 나에게 향해 있다. 나는 가장 본능적이고 생리적인 공포를 느낀다. 동시에 나는 가장 본능적이고 생리적인 안도를 느낀다.
당신의 손가락 사이로 당신의 눈이 보인다. 당신의 이상한 각도로 돌아간 손이 툭 떨어진 탓이다. 눈가에도 자라난 보라색 결정은 붉은 눈에 비쳐 기묘하고 몽환적인 색채를 그려낸다. 문득 나는 그런 당신의 모습이, 참으로 ■■스러웠다. 문득 나는 그런 당신이, 참으로 ■■스러웠다. 문득 나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당신이, 참으로 ■■스러웠다. 문득 나는 그런 내가, 참으로 ■■스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