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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또 이상한 자세로 자고 있네.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건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지척에 들려왔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나는 수마를 못 이기는 채 눈을 슬그머니 감았다. 반쯤 깨어있단 걸 눈치채지 못한 건지 목소리의 주인은 조용한 한숨을 내쉬었다. 문이 열린 후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는데. 부드러운 모래 위를 밟더라도 이만큼 고요하지는 않을 테다.

“아카리, ... 깨운 모양이네. 의도는 아녔는데.”

 

   눈을 가리던 손을 거두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치카게가 곤란한 웃음을 띠며 내려다보고 있다. 손을 뻗어 다시 시야를 가리는 손에 잠에서 덜 깬 투정이 되돌아갔다. 너무 늦어요, 치카게 씨. 바깥에 오래 있다가 이제야 온 걸까, 체온보다 먼저 다가오는 냉기에 그 손을 양손으로 쥐어 내렸다. 남자는 여전히 빙그레 웃고만 있다.

 

“깨운 게 아니라 혼자서 깬 거예요. 잘 만큼 잤고.”

“정말?”

 

   몸을 일으키자 한 손에 들고 있던 담요-덮어주려던 걸까, 라고 나는 추측했다-를 내려놓으며 치카게가 이내 곁에 자리 잡았다. 한동안 뜸하게 본 얼굴을 본 반가움이 가시자, 그의 옷차림이 아직 출근을 위한 정장에서 변하지 않았단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들어가서 쉬지 그랬어요.”

 

   늦게 들어왔으면서, 로 시작해서 요즘 유행하는 감기 따위의 걱정을 늘어놓았다. 여기저기 감기몸살에 걸려 앓아누운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는데 치카게 씨는 정말 괜찮은 게 맞는지, 일은 무리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이어지던 잔소리 같지 않은 잔소리를 끊자 이야기를 듣던 그가 왜 그러냐는 듯, 여전한 미소로 고개를 설핏 기울였다. 나는 작은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고쳐 잡았다. 차게 식은 손은 평소보다 마른 것마냥 유독 도드라진 뼈대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피곤하시죠?”

“아,… 그렇게 보였으려나. 별로, 괜찮은데.”

 

   거짓말.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말에 내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단 건 충분히 전해졌을 테다. 입 밖으로 그 말을 내지 않는 건 둘만의 규칙에 가까운 습관이다. 숨기는 것이 많은 남자는 자신의 비밀에 파고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하기 위해 부러 그어진 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가벼운 거짓말에 속는 건 아니었다.

 

“오늘은 이제 쉬는 건가요?”

“응, 일단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는 줄곧 이럴 것 같네. 미안.”

“미안해할 게 뭐가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번엔 공연까지 겹쳐서 정신없죠?”

 

   저는 다 알아요, 하고 젠체하자 남자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웃었다. 비웃는 것도 아니고, 놀리려는 것도 아니고. 기운이 빠진 모습으로 웃는 모습이다. 어떤 사람을 오랫동안 봐오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알게 되는 사실들이 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특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러니까 연인이라면. 이렇게 입매가 곱게 올라가 짓는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도는 알아챌 수 있다. 평소보다 잦은 침묵,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선. 그래, 이런 사소한 것들. 아까 잡힌 손을 빼내지도 않고 잡힌 그대로 내어주는 그런 제스처도.

   누구나 가끔은 위로가 필요한 법이겠지. 잡은 손을 끌어당겨 가슴을 맞대고는 남자를 깊게 끌어안았다. 손만큼 차갑지는 않지만 끌어안은 품에는 여전히 한기가 맴돌았다. 순간 굳었던 등은 감싸 안은 손으로 살살 쓸어내리자 잠에서 덜 깬 사람의 응석이라고 생각한 건지 금방 긴장이 풀렸다. 어쩔 수 없는 아이라고 가볍게 한탄을 하며 내가 기대오는 무게를 그는 가뜬하게 감싸 안았다.

 

“아, 옷 구겨지지 않아요?”

“그건 신경 쓰는 건가. 괜찮아,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고.”

 

   평소의 산뜻한 목소리의 흉내를 내지만 한 구석이 부드러워진 것이 느껴져 입매가 근질거렸다. 소리 내어 웃는다면 뭐가 즐거우냐고 퉁명스럽게 굴 거나 오히려 괴롭혀 올지도 모르겠다. 어떤 반응을 예상하더라도 지금은 이 순간을 붙잡고 있자. 단둘만 있는 것도 오랜만이다. 치카게 씨가 추워 보이니까 제가 안아드리는 거예요. 가벼운 어조로 억지를 말해도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조금 불안해지고 만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과했나, 일순 고민한 것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올곧게 나를 보고 있었다. 평소보다 집요한 눈빛과 일자로 굳어 웃지 않는 입매. 무슨 일이 있나요, 묻기도 전에 그는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추운 건 아닌데, 설마 추위까지 많이 타는 편인가. 겨울은 고생이겠어.”

“그야 그렇지만요. 눈을 보는 건 좋아해요.”

“하하, 작가 선생님 답네.”

 

   가장자리에서 겉도는 대화는 따뜻할지라도 맞닿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성미의 사람들이 아니니 어조는 점점 단막극을 분하는 배우와 닮아갔다. 작가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라고 응하면 공상가에게 잘 어울리는 호칭이라며 웃는다. 자물쇠에 잘못된 열쇠를 끼워 넣어 헛도는 것만 같은 무의미한 주고받음. 한참 가볍게 웃으며 나누는 담소는 이내 사그라들었다.

   어느새 우리는 평소처럼 손 한 뼘 정도의 거리를 사이에 둔 채 앉아있었다. 차라리 참견하는 게 나았을까. 비밀을 용인하기로 했다고 해서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고민하는 게 있다면 듣고 싶고 함께 고민하고 싶은 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이기에, 넘어서는 안 될 선 너머에서 조용히 걱정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날밤은 치카게 씨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늦은 시간까지 극단에 계속 남아있을 거면 아주 기숙사로 이사를 오라는 농담 겸 잔소리를 들으면서. 무언가 숨기는 남자의 옆얼굴은 쓸쓸해 보여 돌려보내기 전 한참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위로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운 소리 하나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을 보아서는 그도 그 위로를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열흘 정도 지났을까, 치카게 씨가 준비하던 연극의 막이 올라가기 전까지 극단에는 또다시 소소한 사건이 줄 지어 터졌다. 쿠몬이 형인 쥬자와 거리를 두겠다고 선언을 한다든지, 쥬자가 디저트를 거부한다든지. 극을 올릴 때마다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질리지 않았다. 애초에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별 기행을 다 하는 연극배우들이 가득한 게 이 극단이니까, 소재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같은 불량 소설가(유키의 표현이다.)인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이 극단에서 일을 돕기 시작하면서 쓰는 글의 코믹함이 생생해졌다나, 뭐라나. 칭찬에 인색한 편인 편집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믿어도 괜찮을 테다. 하긴, 복도의 벽을 달리는 삼각형 열성가가 거주하는 극단이니 코미디가 손에 익는 것도 당연한 일인가 싶다.

   사건 사고가 많은 극단에서도 올해의 마지막 큰 공연을 무사히 올리게 된 것은 축하할 일이었다. 한동안 속을 썩이던 배우들, 치카게, 히소카, 쥬자와 쿠몬, 도 무사히 역에 익숙해져 초연 날에는 감독인 이즈미도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대를 위한 연습을 제하고는 극단에 오랫동안 머무는 일이 줄었던 치카게 씨도 공연이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바깥을 돌아다니는 일이 줄어들었다.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고, 굳이 묻지도 않았다. 깊게 관여하지 않기로 한 약속도 있었고, 긴장이 풀린 태도를 보고 내심 안심하기도 했다. 큰 무대를 앞둔 배우가 긴장한 기미가 없는 것은 또 얄미운 구석이 있기도 했지만, 그 얄미움이 없다면 그게 과연 우츠키 치카게일까.

   그렇게 연극 ‘스칼렛 미러’는 무사히 초연되었다.

   첫날은 극단원들도 전부 극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나 자신도 그들의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 있었지만, 며칠 사이 마감을 위해 밤샘을 연달아 했더니 생각보다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봄조의 다른 단원들과 함께 고른 화환을 전하고 먼저 기숙사에 돌아와 깜빡 졸았던 것은 기억나지만, 그 이후의 일은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소파에서 잠들었던가, 이젠 정말 방을 하나 내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걱정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전에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아카리, 요즘 피곤해했잖아. 지금은 이대로 놔두자. 아, 이건 아마 이즈미의 목소리. 그렇게 숨 쉬듯 내어주는 배려는 그 사람이 아니라면 보기 드물다. 담화실에는 불이 반만 켜져 있었다. 시간이 늦어진 모양이지.

   잠에 취한 정신이 조금씩 명료해지자 뒤늦게 어깨에 무언가 무거운 것이 기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야가 흐려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연인과 쏙 빼닮아 있었다.

   나는 가볍게 내 볼을 꼬집어보았다. 잠은 더 깼지만 눈 앞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꼬집을 즈음에는 어깨에 기댄 사람이 움찔거리다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다시 보니 안경조차 끼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카리.”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피로와 졸림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나는 모르는 사이 피식 웃고 말았다. 인상을 조금 찌푸린 치카게가 몸을 일으켰다.

 

“네, 미나기 아카리랍니다. 이번에는 제가 깨우고 말았나 봐요.”

“…네 탓이 아냐.”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아직은 피곤한 건지 치카게는 손으로 눈매를 문지르다가는 앞에 벗어둔 안경을 찾아 손을 뻗었다. 나는 웃으며 그의 흐트러진 머리 위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조금 더 주무실래요?”

 

   나긋한 목소리로 묻자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이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한숨을 몹시도 닮아 있었다. 이내 치카게는 이끄는 대로 내 어깨 위에 머리를 순순히 얹고서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목덜미에 닿는 간지러운 감각에 긴장해서 차라리 베개를 가져올까 묻는 말에 치카게는 눈을 살며시 뜨고는 ‘됐어.’ 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냥 침대에 가서 자는 게…”

“…네가 물어봐 놓고 이제 가라는 거야?”

“아뇨, 불편하실까 봐…”

“불편하지 않아.”

 

   잠에 취해서인지 의뭉을 떠는 일 없이 딱 잘라 말하는 말투. 자주는 아녀도 종종 보여주는 모습이라 놀람보다는 정겨움을 느꼈다. 다만 어깨에 기대오는 무게감은 도통 예상치도 못했고 익숙해지지도 못할 것이라 심장이 팔락팔락, 나비처럼 날갯짓했다.

   들뜬 마음의 탓일까, 평소에는 조심스레 간직한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괜찮은 건가요? 라고. 남자는 평소보다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켜줄 거라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은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마 자기 자신에게 여러 번 반복해서 들려준 탓에 입에 익은 말.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말이 잠꼬대처럼 나올 정도라면 몇 번을 거듭한 말일까? 흐트러진 앞머리를 옆으로 빗어 넘겨줘도 남자는 무언의 질문에 답하는 일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게 어떤 무게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사람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과장이다. 다만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고민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이런 안온함에 빠져들어서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설령 제가 함께하지 않는 내일이 오더라도, 당신이 괜찮을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올까요? 여전히 대답 없는 연인에게 묻는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에 익숙해지고, 당연하게 여기는 날이 오면 좋지 않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서툴게 위로를 바라지 않아도 될 텐데.

   눈을 다시 감고는 이번엔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녕, 안심하고 잠들어요. 다시 내일 만나요.”

 

   가물가물, 저물어가는 의식 속에서 치카게가 몹시도 평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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