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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꿈일 것이다. 너는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 지척에 있어줄 이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인지한 채 눈을 떴다. 실루엣만 보이던 너는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어깨가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몸의 선은 얇지만 탄탄한 체격 탓에 결코 가느다랗게 보이지는 않는 인상이었으나 내 꿈 속의 너는 울고 있었다. 너의 윤곽이 모두 흐려져 마지막엔 물거품이 될 것처럼 일렁였다. 도대체 무엇이 너를 그렇게 섧게 만들었을까. 나는 아무 말 않고 너에게로 다가갔다. 아무것도 신지 않았는지 차닥거리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너에게는 예외인 듯했다. 왜 우냐는, 짧은 문장도 입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네 두 손은 무언갈 안아드는 데에 열중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인 것도 같았다. 그걸 확인하려는 순간 모든 것이 물 속으로 깊게 가라앉았다. 아득히 멀리서 네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조금 작은 권총을 손질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런 걸로 사람이 죽기는 하나? 아무리 호신용이라지만 더 확실히 살상이 가능한 총기가 좋지 않을까. 하기야 자신은 저런 것이 없어도 몸 하나 정도 지키고도 남지만. 그런 생각이 어쩌면 늘 짓는 비웃음으로 슬그머니 드러났을지도 몰랐다. 그는 어느 샌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그녀를 알아챘다.

 

"뭡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인데요? 당신이 먼저 쳐다보고, 같잖다는 듯 웃었잖아."

 

"그럴 리가. 착각입니다."

 

"뭐, 그렇다고 쳐 줄게요.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그녀는 총을 마저 손질한 뒤 깨끗하고 충분히 빠른 속도로 재조립했다. 그 모습을 보는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들은 적이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활발히 활동하던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잠겨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열었고 어디가 되었든 자연스레 녹아들어 당연한 듯 존재하던 사람이라나 뭐라나. 특히 총기류를 그렇게 잘 다루었다지. 검은 머리칼이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이제는 거의 전설처럼 떠도는 소문들 중의 일부였다. 갑자기 왜 그런 것이 떠올랐는지 남자는 스스로 설명하지 못했다. 머리색이 같아서라기엔 그 인물과 지금 눈 앞의 이 사람은 다른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애초에, 그렇게나 다재다능하고 전지전능하게까지 추앙받았던 이라면 사이퍼였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능력은 대체로 유전적 요소에 의해 정해지는 법이었다. 이 여자는 이능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으니 괜한 짐작이 끼어들 틈도 없었다.

 

   어쨌든, 그 완전히 일반인인 여자와 헌터 루드빅 와일드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함께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사이가 되었는지는 길고 길고 긴 이야기이므로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고, 그는 최근 들어 하루빨리 그녀와의 거래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요즘의 자신은 전혀 자신답지 못했다. 본래라면 베풀지 않을 친절을 일삼거나 의미도 없이 상대의 기분 혹은 컨디션 따위를 살피고는 했다. 비즈니스에 있어 그리고 루드빅 와일드에게 있어 의뢰인과 피의뢰인 사이에는 거래 내용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원칙을 자꾸만 흐리게 만들고 선을 제멋대로 넘어가는 구둣발을 굳이 막지도 않는 그녀를 그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로 이어져 있는 유일한 방향을 틀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미간을 살짝 구기고 있거나 말거나 필요한 자료까지 다 챙겨 카운터에서 일어났다. 안 갈 거예요? 당신 요즘 자꾸 멍청한 표정 하는 거 아는가 모르겠네요. 똑바른 억양의 퀸즈잉글리시가 그를 일으켰다. 참 어울리지 않는 말투라고 그는 다시금 상념에 잠겼다.

 

"그래서 뭐 때문에 그런 표정 하고 있었어요?"

 

"당신과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럼 내가 안 보는 곳에서 하지 그래요? 신경 쓰이게 한 사람이 누군데."

 

"알아서 뭐 할 겁니까? 당신과 일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신경 끄세요."

 

   여자는 알았다며 가볍게 웃었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표정이었다. 으슥하고 축축한 골목을 지나는데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느긋한 발걸음에 여유로운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는 것이다. 남자는 도무지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이런 환경에 이골이 났다지만, 실전 경험도 적을 일개 정보상이 어떻게 요만큼도 동요하지 않는 걸까. 그녀는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전방을 주시하면서 천천히 운을 뗐다. 그저 지나가는 듯이 나직한 어조였다.

 

"루드빅, 당신 같은 사람도 사랑을 할까요?"

 

"긴장해서 헛소릴 하는 겁니까?"

 

"당신이 사랑할 사람은 참 힘들겠다 싶어서요."

 

"애초에 그런 게 정말로 존재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건 세상에서 가장 큰 패배일 겁니다."

 

"왜?"

 

   불현듯 여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둠과 불쾌한 적막을 등지고 선 그 모습에서 그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물음이 재차 돌아왔다. 푸른 눈동자는 해가 떠오르기 전 새벽녘처럼 고요했다. 루드빅 와일드는 문득 잘 해왔던 것들이 왜 이렇게 통제되지 않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 모든 답은 아마도 그녀, 킴 레이블의 발 밑에서 꺼낼 수 있을 듯했다. 그가 굳은 입술을 움직이려고 할 때에 탄환이 날아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끊겨 떨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아무렇지 않게 두 발을 쏘았다. 두 명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그도 알았다. 그의 손은 이미 지근거리에 접근한 이를 붙잡아 태워버린 후였다. 푸르게 광채를 띠는 빛이 손끝에서 반짝거리며 어두운 골목을 이따금 밝혀갔다. 탄환 소리가 정적을 좀먹고, 살갗 타는 냄새가 좁은 거리를 메웠다. 가끔씩 돌아본 곳에 있던 그녀는 늘 단정하고 차분하던 머리칼이 마구 흐트러져 옷매무새마저 온통 구겨져 있었지만 숨소리는 약간 불규칙해졌을 뿐 표정에 미동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점차 탄창을 바꿔 끼우는 손길에서 초조함이 엿보였다. 상대는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사전에 입수해 둔 정보와는 달랐다. 새어나갔나? 어디에서? 그녀가 이를 악무는 것을 본 순간 남자는 급격히 불안해지는 자신을 알아챘다. 그의 기준은 이미 임무의 승패나 유치한 개개인의 능력 같은 것에 있지 않았다. 사이퍼라면 어떻게든 될 수도 있겠지만 비능력자,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에게 이 앞은 예정된 결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길을 만들 테니 우선 먼저 빠져나가라고, 그가 그렇게 신호를 보내려던 때였다. 남자의 허리에 탄환의 궤적이 겹쳐지면서 동시에 잘 벼려진 날이 여자의 어깨를 꿰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3초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시선은 자신에게 있지 않았으며 그 순간 서로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는 그녀가 웃어 보였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이냐는 말이 먼저 나왔어야 했지만 입술은 아무것도 뱉지 않았다. 여자는 단도를 잡아 빼 그 자리를 손으로 막고, 습격한 이에게 한 발을 쏘았다. 그리고 그에게로 돌아서서 권총을 들어 흔들림 없이 겨누는 것이었다.

 

"다시 물을게요."

 

   방아쇠를 당기는 흰 손가락이 지나치게 극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랑은 패배인가요?"

 

   총구에서 밀려난 탄환이 남자의 귓가를 지나 뒤에 있던 이에게 명중했다. 이번에는 망설여야 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쉽게 문장으로 빚어지지 못했다. 결국엔 무조건적인 복종을 바치다 못해 제 자신까지 강제로 그이의 손에 쥐어다 주는 부조리한 패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남자는 홧홧한 허리께의 통증보다 그녀의 시선이 더욱 타는 듯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구둣발 밑에 그녀가 일부러 숨기고 있는 대답을 찾으려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볼품없이 가장 낮은 모습이 되어 바닥에 뺨을 대면서 애원해야만 했다. 이에 대한 불쾌감보다 그녀의 손틈 사이로 연신 흘러내리는 날것이 그를 지옥불로 걸어 들어가게끔 만들었기 때문에, 루드빅 와일드는 끝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말았다.

 

"그래요, 내가 졌습니다."

 

   그러니 제발 좀 먼저 돌아가라고 애원했지만 그녀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당신이 누굴 끌어안고 서럽게 울고 있었어요. 혹시 나였을까? 여자는 태평한 소릴 하며 가만히 남자에게 어깨를 맡겼다. 부축하는 사람이나 부축받는 사람이나 성하지 못한 꼴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으므로 큰 차이는 없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내가 울긴 왜 웁니까,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여자가 눈썹을 들썩였다. 당신은 그 말버릇부터 고쳐 줘야겠네요. 그보다 우선 애칭을 정해주고 싶은데, 루디, 는 어때요? 남자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무어라고 입술을 열다가 한숨만 쉬었다. 패배한 자에게는 어쩔 도리 없는 침묵과 그의 주인을 경건히 받드는 손길만이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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