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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미완의 메데이아였고, 보는 것만으로 내게 미망迷妄을 안길 미망未忘의 존재였다. 나는 눈을 덮은 이의 손을 걷어내었다. 그녀 또한 메데이아였다. 스러지는 저 자신 앞에서 내 눈을 가린 속내를 나는 평생을 가도 모를 것이었다. 그것이 마스터를 향한 배려일지 치부를 들키고 싶지 않은 자존심일지, 분간할 수 없을 것이며 가늠하려 들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다만, 그것이 내 곁의 메데이아에게 멋대로 속을 헤집는 일이 된다 한들 나는 지금의 순간과 행동을 스러지기 시작하는 메데이아에게 할애하고 싶었다. 메데이아의 이름을 가진 이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싶다는 흥미만이 존재했으므로.

 


 눈을 가렸던 이는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입을 열어 묻지는 않았고,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 당장의 감정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그녀의 속내를 모두 알지는 못할 것이었으나 미루어 짐작하기로 그녀는 애당초 할 말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손을 놓고는 그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에게 다가갔다. 꼭 나와 같은 금발을 사랑한 그 아이는 그 블론드의 남자 곁에서 부서지고 흩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 손으로 만든 모습임을 나는 스스로 알았으므로 미완의 존재가 부서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은 변명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그제야 처음으로, 나는 입을 열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메데이아. 그녀는 내 곁의 사람과 꼭 같은 이름을 한 채 전혀 다른 얼굴로, 둘도 없이 다른 눈으로 나와 시선을 견주었다. 견준 시선이 안으로 스미는 감정이 낯설어 퍽 쓸쓸해지고 말았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는 바다는 계절과 무관하게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 탓인지 날씨 탓인지 오늘은 물결이 높았고, 돛 나부끼는 소리는 유달리 소란스러웠다. 나는 두르고 있던 검은 머플러를 풀어 메데이아의 목에 두르기 시작했다. 메데이아는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어깨를 움츠렸다. 개의치 않았다.

 “바다는 날이 험해. 나보다는 네게 더 필요하겠지.”

 그러니 네가 두르고 있어, 말이 채 뒤따르기 전 그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순간이었으나, 나는 그것이 으레 어린아이들이 갖는 치기이기를 바랐다. 순간에 지나지 않는 감정이었음에도 그것은 어쩌면 바람보다는 염원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리만큼 강렬하기도 했다.

 “…괜찮아요, 칼데아의 감독관님. 저는 곧 사라질 거고 당신도 추워 보이는걸요.”

 혀 밑으로 쓴물이 고였다. 나는 웃고 말았다. 그녀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실을 말할 뿐이었고, 나를 가리키는 말 또한 사실에 지나지 않았다. 어릴 때의 메데이아인들 메데이아에게서 나를 지칭할 적에 어떠한 사사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감정이 담기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냥 하고 있어도 괜찮아. 다음에 또 만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으니까.”
 “…….”

 메데이아는 고개를 수그리고 머플러를 어루만졌다. 내가 가엾은가요. 내게로 시선이 돌아오지 않을 적에 그 아이는 내게 꼭 그렇게 묻고 싶은 듯했다. 나는 메데이아라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그 어떤 시간에 속해 있대도 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로 입을 열어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 어떤 답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생에서 철저하게 외부인이었고 감히 그녀의 생을 가엾다는 말로 가볍게 재단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아니고 싶었다.

 


 말을 대신하듯, 나는 메데이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동안 메데이아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날 서 있지 않은 시선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녀는 사라지는 순간까지 나를 어른의 그것처럼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이윽고 메데이아는 내 손을 잡았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사람이 변하고 시간이 변한들 닿아오는 온도는 그렇게나 같을 수 있었을까. 내가 평생을 염원한들 가질 수 없는 완벽함이 새삼스러워서, 나는 아주 조금 눈물이 날 듯도 싶었다.

 


 그녀와 함께 갑판으로 향할 적에도 메데이아는 말이 없었다. 오롯이 나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밀쳐내지도 않았다. 다만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스러질 때를 고대하듯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어깨를 움츠릴 따름이었다.

 “감독관이 본 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침묵을 지켜야 할 쪽은 내 쪽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려 지금의 물음을 던졌는지 모르지 않았다. 메데이아는 영령의 반열에 든 사람이었으나 지금 현재 아이의 몸으로, 아이의 사고로 실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결말을 아는 감정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미련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기에. 아니, 그래야 했다. 결말을 알고도 미련을 놓지 못하는 일은 오롯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그 아이의 것이어야 했다.


 만일, 어리지 않고, 충분히 자라고, 충분히 알았더라도, 생에 두 번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그 모든 일을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했던 것이라면 나는…….

 “그건 너를 말하는 거니, 아니면 메데이아라는 사람 그 자체를 말하는 거니.”

 ……조금 더 잘 할 수도 있었겠지.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도 있었겠지. 나보다 나이가 많고, 나보다 더 오래 살았던 그 사람은 생에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일랑은 가져본 적 없는 듯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 행동 양식이 생에 두 번이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비롯되었대도 나는 미성년의, 미성숙한 메데이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려 들지 않았으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내 곁의 그 사람도 돌아간다면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할지에 대한 문제는 내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내 눈앞의 메데이아에게 달려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스스로 겸제당한 듯싶기도 했고, 감정 자체가 나를 침노한 듯싶기도 했다. 메데이아는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웃은 듯도 싶었고, 입을 열기도 전 무엇인가 대답한 듯도 싶은 순간이었다.

 “지금 대답을 드리지는 않을래요.”
 “…….”
 “당신은 제게 다음에 또 만나기 위한 구실을 주셨는데, 지금 제가 그걸 답해 버리면 만날 구실이 없어지잖아요. 제가 드리는, 다음을 기약할 구실로 감독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삼아도 될까요.”

 대신, 다시 만난 그때는 당신께 그 구분이 중요한 연유도 말해 주셔야 해요……. 앳된 아이 같은 음성은 맺어질 듯 맺어지지 못할 듯 흐릿하게 끊어졌다. 금빛으로 부서지고 흩어진 메데이아가 서 있던 곳에 내 머플러만이 남았다. 그녀에게 속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머플러를 둘러줄 적에도 예견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막상 머플러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모습은 퍽 재와 황금의 차이를 분간하여 따지게 만들었다.

 


 어린 메데이아는 나를 사랑하지도, 내게 어떠한 감정이 깃들 시간도 없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아이는 사라질 때까지 내가 건넨 머플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두 사실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점이 없었으나 나는 그것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생각이란 그저 비물질적인 추상성에 한없이 가까운 것이어도 내가 메데이아를 생각하면, 두 사실의 존재하지 않는 연관점을 끝없이 생각하면 마치 닳아 없어질 것처럼 나는 덩그러니 남은 머플러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플러를 주워든 이는 내가 아닌, 머플러를 두르지 않았던 메데이아였다. 시름에 잠긴 듯한 인상과 창해 같은 푸른 눈을 한 익숙한 상대. 그녀는 내게 머플러를 건넸다.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사무적인 태도였다. 나 또한 그녀에게서 사사로이 망설이지 않고 머플러를 받아들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바다를 등지고 몸을 돌릴 적에 그녀는 처음으로 내게 물었다.

 “따뜻했나요?”

 한 번도 젖어 든 적 없는 듯한 건조한 음성으로, 바다를 담은 듯이. 차고 매서운 바닷바람에 몇 번이나 몸을 웅크리며 편지를 펼쳐 낭독하는 듯한 물음이었다.


 ……아마도.


 입술 새로 흘러나오지 못한 나의 대답 또한 그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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