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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태양에서 내려온 빛은 파르르 떨리며 그들 둘 사이에 긴 광채를 내뻗었다. 주렴같은 빗살은 눈꺼풀에 광채와 같이 흐르다가 눈꺼풀끝에서 새하얀 빛을 나리리라. 연녹빛으로 빛나는 눈매가 그의 눈길을 쫒았다.

 

정오였다.

 

   태양이 오즉 하늘 위 중앙부를 가로지르고 광채를 뻗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북적거리는 소란함이 햇볕에 고스란히 섞여 들렸다. 휘황한 태양빛이 뻗은 열기는 시장에 도는 이야기들이 섞인 소란함과 어울렸다. 붉은 천을 두른 상인이 장사진을 이룬 곳이었다. 상인들이 보이는 모습은 다양했다. 객중 손객과 흥정을 하는 듯 중국어로 음청을 높이다 이내 좌판을 탁 치며 소란스러움을 내는 상인, 중국의 길조전승에 따라 붉은 천을 곳곳이 무색하게 두르고 목청을 잔뜩 높여낸 채 제가 팔 물건을 뽐내는 상인, 뚱한 채로 팔짱을 끼고 아쉽지 않다는 듯이 처신하여 값을 높이는 상인들이 돈황 항구를 점유했다.

 

   세계로 향하는 물류가 머무는 관문이 돈황이라 하였던가.

 

 

 

   사람들은 몰려들어 줄을 섰다. 그들 역시 이 돈황에 줄을 선 손객중 하나이리라. 상인들은 그들 앞에 물건을 내밀며 손을 휘저어 호객행위를 하기 바빴다.

 

" 하나사면 하나 더 줄게. 금세공이 예쁘고 수려하다니까? 구중궁궐 마님들이 거치는 목걸이라고 알사람은 다 알고 모를 사람도 알아모신다오. "

 

" 이놈 정인은 오색으로 팔수를 놓은 수려한 간식을 좌안에 얹는 것 말고는 영 세사에 흥미가 없는지라 어렵겠네요 "

 

" 누가 아내랍니까 "

 

" 번거로운 사람을 떨쳐내게 하는데에 이만한 말이 있겠냐는 거지요? "

 

" 다 들었소이다. 번거로운 사람이라 미안한데 에이, 이 일 몇십년째 하다보면 잡히는게 있지않소. "

 

   남자는 넉살좋게 팔짱을 끼고 그들 앞에 섰다. 용케도 그들이 나눈 대화를 귓등이 밝은 아동처럼 알아낸 모양이다. 남자는 츳 혀를 차며 여간 능청스럽게 말문을 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마주선 채 마을 총각아씨들의 중매를 놓는 매파와 같이 빙긋 웃었다. 입가에 새겨진 긴 주름이 옴짝 입안 안쪽으로 부드럽게 접혀졌다. 남성의 나잇대를 짐작케할 주름이 입가에 깊게 파인 걸로 미루건데 남성은 넉살좋게 웃어넘기며 장사를 한 지가 한두해가 아니란 걸 짐작하게 했다. 그는 쉽사리 그들을 보내줄 의향이 없어보였다.

 

"두분 정말 아무사이도 아니요? "

 

   이경은 말을 멈추고 더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경은 할 말을 찾다 둘의 사이를 나타낼 어휘가 없다는 것에 공연 침묵에 사로잡혔다. 그 날 이경은 답하기 곤란한 말을 듣고 유야무야 웃음으로 무마해 넘기는 뻔뻔함이 있지를 못했다. 사회생활에 잔뼈가 굵었데도 그 날 이경은 고개를 숙여 들어가야했다. 몇년새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기도 했고. 둘은 상사와 부관 사이라고도 정을 품은 사이라고도 하지를 못했다. 무슨 사이냐고 묻는 질문에 능히 답하도록 물건이 손에 익듯이 긴 시간이 우리에게 지어졌다면 이경은 기꺼이 아무사이가 아니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소식이 끊긴지 어연 몇주만에 홀연히 나타난 남자에게 답해줄 문제는 아니었다는 이야기였다.

 

" 자, 자, 들어가시게 "

 

   남자는 황망한 채 서있는 이경을 보았다가 찡긋 가후에게 눈짓을 했다. 몸을 미는 남자의 발걸음이 하늘히 올랐다 가뿐히 내앉았다. 오늘 반액입니다. 남자는 시선을 끌기 위하여 손뼉을 짝 요란스럽게 벌렸다 마주했다 빙긋 웃었다. 호객꾼으로 탁월한 재량을 타고난 남자였다.

 

" 자자, 구경은 공짜. 추억은 돈주고도 못 사네? 무위여행에서 무엇이 남을까. 같이 고르던 물건이 쪽진 채 정인의 귀밑머리에서부터 슬 댓닢같은 아미 위로 올라가는 걸 보아한 눈짓이 평생에 남는 추억일텐데? 나도 마누라 반지 골라준 기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

 

   남성은 이경과 가후의 양 어깨에 어깨동무를 한 채 그들을 가게 안에 들여보냈다.

 

   주인은 명랑하고 분명한 음색으로 그들을 부르며 맞이하였다. 청아한 종소리가 손님을 맞이하며 울렸다. 문을 열자마자 둥그스름한 잔무늬가 새겨진 선반이 돋보였다. 나무와 나무가 위치와 속한 방향을 두지 않고 이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목각 구조물이 솟은 방 안에서는 말라붙은 나무 조각들이 곳곳에 떨어진 채였다. 방 안은 작업대와 장식대가 목각 목판 하나로 구획이 나눠져 있어 작업대 위에 서린 나뭇조각이 구획마다 니스칠을 기다리는 조각과 깎아지기를 기다리는 조각과 다듬어져 매끈한 사포질을 기다리는 조각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표표한 고요였다. 앵무가 표조한 깃선을 선보이며 횃대 위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경과 가후는 안내자를 따라 나섰다. 그는 장식대에서 더 깊숙한 곳에 파고들어가려는 듯이 몸을 숙여 깊숙히 선반 안측에 몸을 묻었다. 남성은 몸을 움츠리기도 손을 뻗기도 하며 선반에 찬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곤란한듯이 뇌까리는 언화가 틈새를 차지했다.

 

   그 둘은 거리를 둔 채 외로 서 있었다.

 

   말을 대신해 채워줄 사람이 없으니 고민할 두 사람만이 서 있었다. 둘의 몫으로 남은 공백 이 어색해 이경은 침묵에 시선을 먼쩍 떼었건만 가후는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빙그레 따라붙는 눈짓이 그윽하고 조용했다.

 

"재회기념으로 사줄테니 골라보란거지요."

 

 

" 책사님 "

 

   이경이 잇새에서 나올 말을 다듬었다. 말을 윤문하고 어휘구조에 논리적이고 보기 좋게 끼워질 단어를 찾아낸 것이 아니다. 이경은 손을 잡지는 못하는 사이 간 본질을 검게 물든 방에 불등을 켜 그들이 볼 윤곽을 보여내 듯이 그들 사이의 윤곽을 그려낼 말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이경은 생각을 떠올리다 이내 입매를 꽁 다물었다, 우리는? 채울 공백은 어휘의 틀을 미끄러져 내려가 말깃을 적시었다. 내 연인인 듯 내게 처신하지 말라고? 당신하고 내가 반지에 끼울 손 크기를 재고 그럴 사이긴 하냐고? 이경은 그가 들어온 이 날이 그들이 맞이할 마지막 오늘이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머물러 거절을 표하지 못했다.

 

" 됐습니다, 예, 몇 년간 잠 안 재우고 부려 드신 만큼 세기의 역작과도 같은 물건을 고르렵니다 "

 

   그를 향하던 이경의 시선이 빤히 그를 꿰뚤듯이 멈추었다. 남자는 웃었다. 단일한 단자 같은 문장을 이경은 떠올렸다. 의미의 언명은 이경이 향할 시선을 흐트러뜨리고 그녀가 채울 말까지 가져가는 것이었다. 안내인을 겸한 남성은 하얀색 옥단 으로 옷칠된 비녀를 꺼내 쥐고 그들에게 내밀었다.

 

 

 

   이 양반들 낌새를 보아하니 붓글 꽤나 잡아왔듯이 보이는 터라. 둘다 문인들 아니오? 먹이 흐르는 붓길이 내게도 보이는구려. 이 옷단으로 말하자면, 즉석에서 원하는 문구를 써 새길수 있다는 거외다. 이 공방에서 일하는 일꾼은 어여쁜 장신구를 제조하는데 도가 트이고 눈이 밝아 금세 붓글이 써진 비녀를 만듭니다. 옥오지애? 애별리교? 교목언혜? 연모지정? 이 비녀가 마음에 든다면 새길 문구를 말만 하시오.

 

" 목필이라는 언구를 새겨주세요. " 이경은 단언하며 말했다.

 

   본의였고 본류였다. 그가 그녀를 쥐고 있는 언명이자 그녀를 궁정에서 써 내려갈 시기에 그가 든 본자였다. 위례와 의식과 제례와 같이 사회적으로 거쳐야 할 시초를 연 곳에 당신이 부른 이름이 있었다. 그가 쥐어 움켜잡은 붓은 물길에 잠기었다 가장 그에게 적법한 필체로 종잇칸을 먹으로 칠해 흘겨냈다. 잠깐 놓는 힘에 붓은 초점을 흐릿히 취하듯 굴다가도 붓필의 중앙부를 가로지를 곳에서는 강건히 구획을 획정했다. 그의 손아귀에서 태이경이란 붓은 쇳덩이를 쥔 명장의 무기와 같이 필주의 손에서 자유로히 의식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렸다. 먹을 쥔 붓은 영명했다. 당신과 내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 행지인 것이라는 예감에 그녀는 그가 쥐어준 붓이라는 언명을 받아들기로 했다.

 

- 나보고 붓이라면서요, 알고있었죠? 내게 언명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께 말을 전하며 가형이 내 자명을 말해 주었잖아요. 그러니 나를 규정해주세요. 정략위 지평에 붓을 잡은 손끝을 휘갈기며 당신이 만들 서책에 의거한 지필을 써주세요. 당신이 가장 잘 운용할 그을음으로 나를 써달라는 말입니다.

 

   그녀는 그에게 말했었다. 가벼운 일상의 언변을 말하지 않고 문인이 두르는 단어로 말깃을 올려세웠다. 자존심을 기껏 지키겠다는 마음에 살려주면 뭐든지 하겠다는 말을 어렵게도 에둘러 표현했었다. 그녀는 서린 간절함을 보이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었다. 그는 빙긋이 웃었었다. 대상과 타자. 이용자와 이용물.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의미가 만들어졌기에. 그중 목끝까지 나오려드는 감정을 그녀는 기어이 삼켰다. 말은 미끄러진다, 감정은 미끄러진다, 본질은 적히 단단한 외피로 심부를 감춘다. 우리를 말 할 단어는 그녀가 그의 붓이고 그가 그녀를 쥔 문필가였다는 것. 목필, 꽃눈이 붓을 닮아 붙여진 목련의 이명이었다. 행간에 읽어진 의미에서 난 마음을 말하지 못해 뭉뚱그리는 단어로 그들을 통칭해야 한다는 한계였다. 이도 잡아쥐자고, 그나마 잡아쥘 말이 이 단어였다.

 

   그는 웃었다. 눈매가 가늘어지다 남자는 느른한 웃음을 폈다.

 

" 이놈이 보기에 주는 사람이랑 어울리는 것으로 지었다는 거지요. 뜻깊고 이유있는 선물을 만들어줘 이놈은 좋은 안목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지라 "

 

   이경은 말을 받아냈다.

 

" 예, 사직서 수리를 메일 하나로 통보하며 사라진 누군가가 섭섭하게 한 걸 보자니 상관을 보는 눈만은 미흡했습니다만."

 

" 가형이 손수 짓지 그러셨습니까."

 

"이놈은 얼굴가죽이 두껍지는 않은 사람이라"

   이경은 어이가 없다는듯 핏 웃음을 새며 웃었다. 가장 안 어울리는 말을 하십니다, 흰 새가 떨어진 오색 깃털을 모아 공작인척 한다는 말은 가형을 두고하는말일겁니다. 그녀는 볼멘소리를 내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들이 말을 주고 받는 새 점원이 다가와 그녀에게 새하얀 옥비녀를 건네주었다. 흰색으로 윤문된 비녀가 여미했다.

 

   하얀색 옥빛은 정갈히 바닥에 편 흰 서편과 같았다. 감돈 흰 빛은 사뿐히 감아드는 빛을 광명 삼아 샛빛 서광처럼 비춰들기도 하였고 물그림자에 지새운 은하수와 같이 신비로운 이형의 빛을 내기도 했다. 쓰여지지 않은 이 필서에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긴 샛털에 먹을 담뿍 묻어내어야한다는 뜻이었다. 그러고서야 글을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만의 글을. 본질을 짓치지 못하고 의미의 틀에서 미끄러질지언정, 실감과 내가 겪은 감상과 감정의 겪어듬을 모두 드러낼 수 없을 지언정, 당신이 나를 두고 쓴 이야기가 그럴지언정.

 

 

 

 

 

 

 

 

 

   비녀는 여여쁘고 작게 맞추어낸 흰빛 백우와 같이 보였다. 유려히 이어진 비단잇이 펼쳐지며 보이는 흐름은 품귀 높은 구중 궁궐 안 귀부인의 옷품새를 생각케 했다. 사뿐히 발걸음을 나리우며 접어졌다 구부러지면서 보이는 유여한 고요함이 비녀깃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예사한 비선으로 보여지는 고아함이었다. 궁정을 쏘다니며 보기에 편하고 입기에 편한 옷차림만 입는 태오는 생전 인연이 있을 물품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이경은 습관적으로 집에서 하듯 매듭은 매듭진 채로 두고 머리를 틀어올리려는 버릇에 대강 머리칼을 손으로 모으고 비녀를 올리려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감추려 들었건만 10년 넘은 반복으로 만들어진 습성은 그녀가 편해보시는 올림새로 비녀를 꽂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손을 멈칫하다 내렷다. 그는 옅게 빙긋 웃음을 머금으며 웃었다. 이놈이 하염없이 편해보이는 거지요. 태이경씨 거실 소파에 있는 걸로 오인하겠어. 웃지마십쇼, 못 본 모습이 있습니까. 탁군에서 밤새며 눈길이 붉게 물들어 피로가 만든 그늘이 볼우물까지 내려온 걸 보았잖습니까.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예, 이놈이 몰라보았네요. 안 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해도 될는지 묻고싶다는 거지요.

 

 

 

   그는 짐짓 물었다.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입매에서 쏟아뜨리는 말에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빙긋 웃었다. 비녀를 틀어올려주려 하시렵니까, 이경은 눈짓으로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가 둥근 눈매를 그와 같이 마주해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눈망울이 그녀와 마주쳤다. 남자는 이내 아니라고도 맞다가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답변이 나올 애매함을 지시하였지 보여줄 명징한 곳을 알리지는 않았다는 듯. 선택할 색감을 지어준 상황에서 색감을 고르는 일은 태이경이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해석될 여지가 사위에 진 말에서 이경이 택한 말은 비녀로 머리를 올려주시려냐며 의향을 묻는 일이었다. 가문화는, 그랬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수긍의 뜻을 내보이고는 이경에게 의사를 물었다. 이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에게로 향하는 눈짓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여상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빙글 돌아 그녀는 그에게로 걸어가 앞에 멈춰섰다. 뭐하십니까, 하고 여상한 일을 묻는 다는 듯 의구심을 품은 눈동자가 그에게로 진득해 맺혔다. 이경은 그 근방에 있는 탁자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이내 말을 이어냈다. 단어가 이어질 수록 점차 담긴 음성이 높아졌다. 머리칼을 틀어 올려주지않고요. 가형 손으로 올려주신다면서요. 이경은 이내 그에게 비녀를 건뒤로 돌았다. 그의 손길에 닿는 머리칼이 넘짓했다. 손이 닿으며 사르락거리던 쥔 손길이 땋아내 넘긴 머리칼을 이내 풀기 시작했다. 한새한새 아침에 그녀가 감아쥔 채 엮은 머리칼이 그의 손끝에서 이내 정반향으로 향하며 가늘고 긴 머리칼로 풀어졌다.

 

   오늘이 그를 눈매에 담을 마지막 하루라고 칭하자면 이 하루는 흡족했다. 평소 눈길을 줄 수 없는 비녀를 고아하게 꽂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과 사랑을 하고 연인처럼 구는 시기를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속에 심감히 차올라 뜬 마음을 단 하루만으로 이내 흘려낼 수 있을까. 거짓말이다, 돌발적인 침략처럼 기억은 무심코, 불현듯, 까무룩히와 같은 표현들이 의거하듯이 내점한 의식의 순간들을 지나와 그녀 의식이 걸어잠근 문에 몸을 들이밀 것이다. 외창을 걸어잠그고 휘장을 지어내 천을 내린 곳에 기억은 밤중에 흐르는 속삭임과 같이 파고 들어왔다. 기억이 두른 옷깃은 밤중에 새록거리는 숨소리와 같이 나직했으며 그가 쥔 지팡이는 기억의 수문장의 눈꺼풀에 잠을 입히고 의식을 밀어 젖힐 수 있었다. 기억은 돌연한 무방비함을 선사하고는 해서 새어나오는 감정에 저를 문책하는 것이었다. 이경은 불현듯 슬픔에 접어들지 않았던가. 잘 알면서 둘이 자아낸 거짓말을 누리고 싶어 제 의식결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잊을 수 있을 거라고.

 

   그와 지새우며 고심했고, 기다렸고, 감내했으며, 삭혔던 마음을 영영 못보는 걸로 삼자는 묵과로 그들의 관계는 족했다.

 

   묵계적으로 둘은 약속했다. 이경은 연인인 채로 하루를 붙잡자는 약조 이후를 생각했다. 우리가 머물렀던 기억은 먹으로 적어진 내용이 물에 녹아들듯이 지워질 것이다. 그녀가 그없이 살아갈 나날들로 하얗게 지워진 지 위를 채워낼 것이었다.

 

 

 

-

 

   가후는 가늘고 흰 손을 뻗어 머리칼 끝을 모아 올렸다. 하얗게 진 손이 유독 부드럽고 손에 상체기 하나 없이 말끔하다는 생각을 했다. 유선형으로 고이 뻗은 손가락이 매끈하였다. 새하얗게 굴곡지지 않고 펴진 손길이 목련꽃 같았다. 손톱끝은 정갈하였어서 언뜻언뜻 손톱이 뻗지 않은 손가락 끝이 그녀에게 스치우듯이 맞추어졌다. 뒤에서 웃고 있는 표정이 넘실대는 것이 안보고도 알 듯 머리속에 감돌았다. 떨리지 않고 동요라고는 없는 손짓이었다. 목련꽃이 진 비녀에 목련꽃과 같은 남자가 짓는 손길은 섬세하니 부드러웠다만. 이경은 머리칼을 올리다 양미간중 닿는 손길에 까무룩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쉿 하는 나직한 음색에 몸을 멈칫했다. 심장에서 전해들어오는 목동이 몸 전반을 휘감아 열이 얼굴에 오르는 느낌이었다. 잠시 올랐다 내리는 미열과 같이 확 더운 기운이 올라왔다가 연신 가라앉고 말았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가 입을 옴짝거렸다. 단어는 마음에서 목청으로 넘겨지지를 못했다.

 

   가후는 싱긋이 웃어 마음을 속절 알아볼 길이 없었다.

 

   수긍과 모름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내 서로를 볼 수 없을 것이었다.

 

*

 

   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가는 손가락이 덮어진 손틈새속에서 이경이 언뜻언뜻 비춰보이는 걸 보며 그는 빙긋이 미소지었다. 그녀는 그를 유난히 쓸쓸히 올려다보는 표정을 지었다가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태이경이 짓는 표정은 독백을 감내하고는 했다. 비춰드는 달빛이 얼굴 볼그스러미에 닿고 전안을 비춰주었다.

 

   월아천은 모래 언덕 사이에서 사막에 초승달 모양의 몸집을 떠올렸다. 둔항이 사막으로 변하자 슬퍼하는 선녀의 눈물이 고여 만들어진 곳이 이곳이라고 했다. 신화가 종언을 구한지가 어언 몇백년이었다. 몇백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이 호수는 사막 열기에 발하지를 않으며 일정양의 수위를 유지했다.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양으로. 작은 물방울 한 방울조차 금세 형체를 발하며 존재가치를 잃는 곳에서 호수는 이질적인 곳이었다.

 

   오랜 가뭄에 땅은 갈라지고 모래가 깃드는 곳에서는 숨소리가 건조하게 흘러들다 멎기가 잦았다. 이경은 목새에 새어든 말을 일렁였다.

 

 

 

 

 

 

 

 

   빛은 눈꺼풀을 거쳐 허공에 부유하는 빛 조각들을 잘근 부숴뜨렸다. 남성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얼굴에 드러낸 채 여정 없이 그곳에 서 있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움직임이 바람 한 점 없이 덮여있는 모랫빛에 사뭇 흐릿히 형체를 일렁였다. 이놈은 길을 잃었네요, 빙긋이 시선을 떨어뜨리며 뻔뻔한 낯빛에 말을 이어내고는 그는 웃었다. 그는 홀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위에 떠오른 달빛은 그들을 사막의 냉골에 빠뜨렸다. 홀로 머문 봄이 초승달 모양 천의 형태로 이곳에 있었다. 수천년 사라지지 않은 눈물은 낙루에 마를 줄을 몰랐다. 몸을 꽁꽁 이어진 천은 천대로 살갗이 아주 조금도 보여 지지 않아야 냉골에서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곳일터인데. 사막은 꽁꽁 싸메야 비밀이 비밀다울 수 있는 곳이었을지언정 옛 신화속 신은 외려 비밀을 숨기려들지 않았다. 그녀는 울음을 지으며 돈항에 습기가 발한 걸 슬퍼했다. 눈물은 곧즉 시간이 지나고 메말라 비틀어질 텐데 감정을 베일 속에 숨겨들려고도, 모랫바람에 저를 잃지도 않았다. 이는 불멸성을 타고난 신이어야 할 수 있는 도락이었다.

 

 

 

" 이놈이 알기론 자욱이 마르는 일은 없을터인데. "

 

 

 

   신화는 멈출 수 없는 영원성을 전지했다. 황하강이 탁해지지 않고 창허에 뜬 푸른 빛이 영명토록 푸른 빛이듯 그녀의 눈꺼풀에 외로 흐르는 눈물은 마를 날이 없을 것이었다. 신화는 멈춰있었다. 그곳에. 옛 베다시대의 제자는 스승에게 세계의 시초를 물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어디인가요, 스승님. 얘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우주라고 한단다. 우주를 무엇이 받혀들고 있나요? 거북이가. 거북이는 무엇이 받혀들고 있나요. 4마리의 코끼리가. 코끼리는 무엇이 받혀들고 있나요. 이어지는 반복은 돌파구를 알아내지 못하고 걸린 채 사막에 머물러 있었다. 인간이 영원에 물음을 달자면 영원이 된다. 찾을 수 없는 돌파구를 영원으로 박제하고자 한 인간의 시도는 흐르는 모랫바람이 무색하도록 그들의 심사에 남아있었다.

 

 

 

   사막에 남겨진 족적이 이경의 눈거울 속에 잠겨들었다. 연녹빛 눈길을 떨구었다가 이경은 사막속 모랫바람이 흐름을 타고 넘실거리는 걸 지켜보았다. 찬찬히 든 몸은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 있었다. 모래 바람에 찍힌 족적은 유속을 타고 어느샌가 사막에 남긴 발자국을 없애었다. 바람이 분다. 읽기를 멈추어야 할 때였다.

 

   감정의 순간들은 한시에 머물렀다. 인간이 영원에 물음을 달자면 답이 나오지 않은 영원일지어니. 이경은 가뿐히 그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그의 허리품에 자신을 묻었다. 긴 양팔을 뻗어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품속 온기가 여린 실줄끝에 물방울이 흘러들듯이 조금씩, 몸에 당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기가 파고들며 체온을 부드럽게 밀어뜨렸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아들어서야 그녀의 몸이 따듯하다는 걸 알았다. 몸이 차갑다, 뜨겁다는 말은 품에 서로를 기울이기 전에는 확증조차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남성이 눈길 속에 웃음을 거뜬히 품다가 이내 이경을 보며 작은 중얼거림과도 같은 숨을 내쉬었다.

 

 

 

   껴안는 손길이 그의 허리 깨에서 손을 미끄러지듯이 튕기다 손깍지를 꼈다. 이경은 이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는 기시감을 느꼈다. 이경이 그의 품에 연인과 같이 파고든 일은 첫번인데도 오랜 연인이 벌린 품에 안긴 것마냥 익숙했다. 이경은 품에 저를 묻다 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 예인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풀려난 이후 그는 누명을 알리려 자선콘서트를 열었다. 몇년간 옥살이로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못했거늘 그가 현을 켜 만드는 가락은 유려했고 음율이 만든 조합은 마음속에 울리는 이명처럼 선선히 남았다고 했다. 한 당돌한 기자가 비결을 묻자, 그는 대답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앞에 바이올린이 있다고 상상하며 연습했다고. 외등하나 없는 외딴 방. 빛이 만든 거스러미가 가림막 없이 들어오는 곳에서 그가 연습을 위해 의탁한 곳은 그가 만든 상상력이었다. 멀건 먼지가 부유하는 곳에서 그는 상상력에 의거해 감옥에 바이올린을 세웠다. 현을 두들기고 스치우는 손길이 얹어지며 공기위를 부유하는 리듬감이 흘렀다. 이는 그가 만든 곡조였을 것이었다. 당신에게 연심을 품은 몇년동안 내 무의식은 그를 끌어당겼을까. 가늘고 길고 서늘하기까지 한 손가락이 내 손을 감아쥐는 모습을.

 

 

 

  두 뼘쯤 차이가 났다. 그녀는 발을 돋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의뭉스러운 웃음이 떠오른 채였다가 이내 그가 입가에 흘려드는 침묵은 고요했다. 입안 가득히 열기가 흘렀다. 찬찬히 몸을 바로 세워 그의 입술 끝을 열듯 입술에 메마른 손가락 끝을 쓸어내리며 더듬었다. 그는 손가락을 잡아 쥐며 그녀가 기울인 손끝에 입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말문을 열지 않았다

 

 

 

   돌아가기에는 당신과 나는 멀리 왔다던가. 돌아갈 길을 따져 재어 보는 것이 아니었다. 저 동떨어진 여로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빛 조각이 허공을 부유했다. 눈이 까무룩 마주했다. 깜박거리는 시선이 마주한 채 이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갸르스름히 뻗은 눈꺼풀은 그에게 시선을 당기고 있어 가후문화는 이경과 눈짓을 마주선 채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나는 연녹빛으로 비춰드는 눈동자에 이내 내 눈을 감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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