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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그날은 날씨가 좋아 낡은 창틀의 갈라진 결 사이를 햇살이 촘촘하게 메웠다. 일상복이라고 하기엔 너무 검고 상복이라고 하기엔 화려한 그녀의 투피스는 빛이 닿는 자리마다 난색으로 광택이 났다. 막고 있던 구름이 지나가기라도 한 것인지 원고지 끄트머리에 볕이 기어들자 겐타로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들었다. 따끔거리는 눈알, 무거운 뒤통수, 가벼운 현기증. 순식간에 지나간 감각 사이에서 일순, 낯선 것이 보였다.

  동그란 눈동자 속 적녹색. 햇살이 포말처럼 부드럽게 부서지는 콧등과 뺨. 검게 늘어뜨린 망사 그물에 조각난 빛이 비추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아……, 방금 본 것이 그녀의 얼굴이구나.

  관망이 한 박자 늦게 인식으로 이어지자 그제야 글씨를 쓰고 있던 손이 덜컥 멈추었다. 「去」는 온전히 쓰이지 못하고 지반이 물결 모양인 「土」가 되었다. 겐타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원고지를 스쳐 창틀에 앉은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쿄코?”

  그러나 조금 전 본 것은 환상이라고 단언하듯,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옛 시대를 연상케 하는 모자에서 늘어진 망사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햇살은 얼굴까지 닿지 못하고 챙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으며, 망사는 성겨 둥글게 말아 묶은 머리카락은 물론, 귓불에 박힌 진주 귀고리도 선명하게 비쳤다.

  하지만 단 하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그녀의 얼굴 위에는 정갈한 글씨로 문장이 쓰여 있을 뿐이다.

「아침부터 집 안팎이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언젠가 겐타로가 “그 문장은 어떤 의미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저의 첫 문장이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듯 즐겁게, 「유메노 선생님께서는 잡지 인터뷰에서 이 문장은 『오싱』을 오마주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오래 살지도 성공하지도, 가출하지도 않았지만.」이라고 조잘거린 적이 있었다.

  향년 스물넷, 다난한 일생을 보낸, 눈도 코도 입도 없이 글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얼굴이 「유메노 선생님」이 아닌 스물네 살의 겐타로를 응시하고는 물었다.

「유메노 선생님?」

  겐타로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상념에 잠기는 건 잠깐으로도 충분했다. 겐타로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색 곱슬머리가 사박 나부끼며 이제는 거의 사라진 샴푸 향이 흩어졌다.

“방금 쿄코의 얼굴이 보였답니다.”

「정말인가요?」

“뭐어, 거짓말이지만요.”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보이지 않는데도 길고 완만한 호를 그리는 입술이 보이는 듯했다. 겐타로는 그럴 리가 없지, 독백을 새기고는 다시 원고지를 내려다보았다. 멍하니 쥐고 있던 만년필에서 잉크가 넘쳐 원고지를 적시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 쉬듯 말했다.

「그건 못 쓰겠네요. 아까워라.」

  그녀가 아쉬워하는 대상이 원고지인지 만년필 잉크인지, 그것도 아니면 원고지에 쓰여 있던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겐타로는 끝맺지 못한 문장에 서글픔을 느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원고지를 집어 들었다. 종이는 까맣게 웅덩이 진 잉크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그녀는 손이 더러워지는 것에 개의치 않고 비행기를 접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틀어 창밖 먼 곳을 응시한 채 비행기를 날렸다.

 

                   物語の切れ端を乗せた船は

                                               瞬きの隙間をぬって飛び土

                                                                                             ……➢

 

   문장을 이루던 잉크가 원고지에서 떨어지며 허공에 흩날렸다. 무게를 벗은 비행기는 가볍고 매끄럽게 날았다. 햇살에 녹아 사라지는 잉크를 보자 겐타로는 그녀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구시대의 옷을 입은 메리 포핀스…… 라는 인상답게 우산을 날개 삼아 사뿐하게 들어온 여자. 얼굴이 없는 여자. 유메노 겐타로의 유작이며 후세에 길이 전해질 명작 『그녀』의 모델이자 주인공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가칭, 소노하라 쿄코.

   저명하신 「유메노 선생님」께 쓰이길 기다리다 못해 독촉하러 왔다는 그녀는, 노년 시절의 겐타로나 유메노 문학상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풀어놓았다.

   「후세에는 아쿠타가와나 나오키는 유메노 상에 비할 바가 못 되지요. 순문학에서부터 대중 문학에 SF, 라이트노벨 같은 장르문학까지 총망라한, 그야말로 장르 불문 최고의 역작이라는 영예니까요.」

   아쿠타가와상 수상 이후 최근에 책이 팔리기 시작한 겐타로로서는 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 같았다. 그러나 첫 문장밖에 없는 얼굴이며 단어를 갖고 노는 기묘한 재주에는 역설적이게도 강한 현실감이 실려 있었다.

종이에서 해방된 문장이 공중으로 사라지고 종이비행기 역시 시야에서 벗어나자 겐타로는 짝짝짝 손뼉을 쳤다. 그녀는 과장스레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이윽고 모자를 고쳐 쓰고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그녀』를 써주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

   겐타로는 대답 대신 미소지었다. 그러나 뺨이 굳어 찌그러진 웃음이 되었다.

   『그녀』는 작가에게 있어 최고의 이야기라는 사실에는 누구나 찬성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도입부터 결말까지 이미 정해져 있으며, 쓰기만 하면 후세에 길이 남아 문학상까지 만들어질 걸작이므로.

   그러나 약속된 명예를 생각해 만년필을 들어도, 결국 겐타로는 원고지를 열 장도 채 채우지 못하고 전부 찢어버렸다. 종잇조각 위에 쓰인 글자를 보고 있으면 위장이 요동치고 식은땀이 나 불쾌했다.

   원고지 열 장 분량은 겨우 초입에 불과했다.

   동시에 그녀의 요절로 이어질 재해와 고난의 입구였다.

   한 사람에게 다 담기기에 너무나 많은 비극은 겐타로의 일생과 교집합을 이루고 있었다. 아주 적은 범위지만, 그 틈으로 겐타로는 가난과 배척으로 이루어졌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엿보았다. 겐타로는 앞으로 그녀가 느낄 고통을 제 것처럼 생경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그렇게 저는 죽었답니다.」라고 마지막 마침표까지 태연한 목소리로 읊어도.

「주저하지 마세요, 유메노 선생님. 제가 앞으로 맞이할 인생에 운명이든 예정조화든 어떤 단어를 붙여도 상관없어요. 저의 죽음은 곧 예술이 될 거랍니다.」

   그리고는 「후후」하고 낮게 웃었다.

   검게 늘어뜨린 망사 그물 너머도, 동그란 눈동자 속 적녹색도, 햇살이 포말처럼 부드럽게 부서지는 콧등과 뺨도,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낡은 창틀의 갈라진 결 사이를 촘촘하게 메우는 햇살, 빛이 닿는 자리마다 난색으로 광택이 나는 그녀의 투피스가 전부였다.

   여전히 정갈한 글씨로 쓰인 문장을 보며, 겐타로는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사명이라 생각해서 진심으로 웃고 있어도, 혹은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목소리만 울려 웃고 있어도, 어느 쪽이든 보기 힘들 것이라고.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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