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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먼 곳을 보며 웃고 있는 타낫세, 네가. 팔을 뻗으면 옷자락이 손끝에 걸릴 거리였다. 그럼 금방이라도 사랑한다고 외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말해도 혼나지 않을 텐데. 입을 벌려도 혀뿌리의 아래까지 치민 말은 어디엔가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별 수도 없이 손가락 틈으로 비치는 네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부서지는 햇빛 아래 빛나는 옅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흩어지고 있었다. 이 바람은 네 마을이 있는 곳에서 불어오고 있는 걸까. 한 걸음 앞의 청년은 시를 읊듯이 중얼거린다. 네 마을이 있던 곳에서 불어오는 거라면. 어깨의 걸친 천이 바람에 흐트러지는 일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니히트.”
그 목소리에.
“함께 나갈까.”
나를 돌아보며 웃는 너의 목소리에 꿈이라는 걸 깨닫고.
* * *
성인이 되기 전까지 니히트는 성의 다리를 건널 수 없다. 성과 이어지는 길은 하나뿐이었으므로 그 말은 곧 성에서 나갈 수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소소한 반발은 있었으나 리리아노 전 폐하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에 이내 잠잠해졌다. 물론 명령의 대상이 되는 니히트 본인의 불만이 폐하에게까지 올라가지 않았던 것도 그에 기여했으리라. 때문에 니히트는 일 년간 성 밖의 세계와는 깔끔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그래도 불만이 없던 건 아니었어. 뭐가 됐든 나가고 싶어서 강행돌파를 해 보려다가 바로 앞의 위사에게 붙잡혀서 타낫세에게 혼난 적도 있었고. 정말 뒷일이라고는 생각도 안 한 행동이었는데.”
“우와, 타낫세의 앞에서 그런 짓을 했다니. 니히트도 꽤나 대담한 걸.”
“뭐, 그 때는 어렸으니까.”
바일이 웃음을 터트리자 시선이 닿을 거리에서 두 사람 분의 키득이는 소리가 흘러 넘쳤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팔로 걷어 시야를 확보하자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둘만이 아는 비밀 장소는 때때로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먼 곳을 바라보다 바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말이지, 이 곳에 니히트랑 이렇게 나란히 앉을 때가 올 줄은 몰랐어. 그 말대로였다. 자신 또한 이런 모습은 상상해 보지도 못했으니까.
“어릴 때는 이렇게까지 친해질 줄도 모르고 넘어가버려서. 아쉽네, 정말.”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 걸.”
“니히트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아직 찾으러 온 사람은 없겠지. 업무도 다 끝냈는데 쉴 틈 정도는 줬으면 좋겠어, 정말. 왕도 귀찮다니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바일을 따라 연두색의 머리카락이 낮게 흔들렸다. 찾으려면 금방 찾겠지만, 지금은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더 둘러보다 안심한 듯 숨을 짧게 내쉬고서 몸을 고쳐 앉은 바일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성인이 되고 나면, 니히트는 성을 나갈 거라고 생각했어.”
“……으응.”
왜냐면 항상, 먼 곳을 보고 있었잖아. 마을을 그리워하는 건가 싶었지. 그게 아니더라도 성에 매여 있는 모습은 영 상상이 안 가서.
긴 말을 끼어들 틈도 없이 내뱉고서 마지막으로는.
“타낫세 때문이지.”
덤덤한 목소리로 정곡을 찌른다.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지 않아 옆에 앉은 사람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반박할 수 없는 한심한 자신의 모습은 훤히 내보일텐데.
전부 사실이었다. 녹의 달을 지나 니히트는 완전한 성인이 되었다. 다리는 열렸고 니히트를 더 이상 성에 붙잡아 둘 제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성을 떠나지 못 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타낫세 란테 요아마키스였다. 그가 디톤으로 떠난 지금, 그와 자신을 이어주는 것은 전서구가 물어다 주는 편지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성에서 떠난다면, 그래서 무언가가 바뀌어버리고 만다면.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상임은 알고 있었다. 연고도 없던 그 때의 촌뜨기와 지금의 니히트는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위치에 있었다. 자신의 행동은 소식이 되어 그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디톤으로 여행을 간대도 막을 사람은 없으며, 그 반대로 타낫세를 이곳에 다시 초대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니히트.”
바람이 불었다. 그 순간 시야에 연두빛이 들어 찼다. 바일의 머리카락이었다. 타낫세와는 비슷하면서도 확연하게 다른 빛의 녹색. 긴 다발을 하나로 정리해 낮게 묶은 모습의 바일을 낯설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던가.
“무서운 거구나.”
“옛날부터 바일은 정말…… 정곡을 잘 찌르는구나.”
“니히트는 표정에 다 드러나 보이니까 말야.”
머리카락이라면 자기도 길었으리라.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는 언제부터 날개뼈의 아래로 드리워졌을까. 그렇지. 변하고 싶지 않아도 변해버리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그 모든 것들이 무서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달콤하지만은 않은, 그러나 필사적으로 붙잡고 싶었던 나날들이 전부 꿈으로 바뀌어 버릴까봐.
타낫세는 바뀌고 싶어서 알을 깨고 나갔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생각만은 아니었는지 뺨을 타고 흐르는 흐릿한 무게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울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따뜻한 손가락이 젖은 눈썹을 부드럽게 스쳐지나갔다. 탓하려던 것도 아니야. 다만.
바람이 멈추지 않아서 눈가가 시렸다.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닦아내도 흘러내리는 게 멈추지 않았다. 두 눈을 꾹 눌러 감았다. 상냥한 말을 들으면 왜 울게 되는 걸까. 타낫세의 곁에 있을 때도 자꾸만 울던 자신이 떠올랐다. 등을 다독여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꼭 이런 부분만 닮아있는 두 사람을 생각했다.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뜨면 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일 것만 같아서.
* * *
타낫세는 먼 곳을 보며 웃고 있다. 푸른 빛의 머리카락도 어깨를 감싼 천도 바람에 흐트러지지만, 옅은 청록빛의 눈동자만은 흔들리지 않고 들판의 너머를 응시한다. 햇빛은 산산이 부서지는데. 그러면 꼭 네가 뻗은 손을 잡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