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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개별 자율 훈련을 하는 중간에 물을 마시며 바닥에 앉아 쉬고 있던 로브 루치의 곁에 아마데우스 에르샤가 다가와 뜬금없이 그가 처음 본 자신의 어땠는지 물어본 것에 대한 답이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에르샤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다가 그때의 상황을 떠올린 듯 환히 웃었다. 루치가 좋아하는 에르샤 특유의 미소였다.
“그때 내가 월보 연습 하겠다고 계속 지붕을 뛰어넘어 다녔었는데. 그걸 봤구나!”
에르샤는 꺄르륵 웃으며 물을 마시는 루치의 어깨를 툭 쳤다. 다른 사람이라면 흘릴 법도 한데 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깔끔하게 마셨다. 그리고 옆에 앉아있는 에르샤에게도 병을 건넸고 그녀는 그 병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다시 건네주며 입가에 있는 물기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해가 머리 위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오후. 눈이 부실 법하지만 에르샤는 해가 있는 하늘을 계속 바라봤다. 평소에도 맑은 날이지만 유독 날씨가 좋은지 사람들의 기분도 절로 좋아지는 날이었다. 에르샤는 다리를 모아 끌어안고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은 뒤 루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난 어땠어?”
“저 나이에 월보를 익힐 수 있나, 싶었지.”
“하긴, 내가 좀 대단해야지 말이야.”
에르샤는 루치의 왼쪽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그럼 지금은 어때?”
루치는 자신에게 기대오는 에르샤의 머리를 떨쳐내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다.”
그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대련을 하면서 나오는 무서운 미소가 아니라 평범한 그런 미소였다. 아마 재브라가 봤다면 저런 표정도 있냐며 놀랄 것이다.
하지만 이 미소를 에르샤는 보지 못했다.
에르샤는 어느새 하늘하늘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따스한 햇살에 취해 루치에게 기대 곤히 자고 있었다. 그의 귓가에 느껴지는 쌔액쌔액 숨소리에 루치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바람에 살짝씩 흔들리는 흐트러진 옆머리가 얼굴을 간지럽히는지 살짝 표정이 찡그러져있어 루치는 오른쪽 팔을 뻗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자 찌푸러진 인상이 펴지고 편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루치는 그게 퍽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좀 흐르고 그는 훈련을 계속해야 하기에 일어서려고 했지만 에르샤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톡톡 치고, 이마를 건들고, 어깨를 살짝 흔들어도 계속 자는 것이었다. 그는 주변에 지나가는 재브라에게 눈빛을 보냈지만 재브라는 씨익 웃고는 좋은 시간 보내라며 손을 흔들며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사람이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는데 거절한 그의 모습에 루치는 순간적으로 화가 났지만, 잘 자는 에르샤를 보자 큰 움직임을 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에르샤를 데리고 그늘진 언덕 위로 가기로 했다.
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오후. 다른 사람들은 개인 훈련을 하고 있을 때, 루치와 에르샤는 나무 그늘 아래 둘이서 함께 앉아있다. 서로에게 기대어 더없이 편해보이는 표정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둘이서만 좋은 시간을 보내는구먼.”
“그러니까. 그렇게도 서로가 좋나.”
“둘은 언제나 항상 그랬으니 그렇지. 이제 일상이 되어버린거야.”
그런 둘 앞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버팔로의 뿔 같은 머리를 한 사람, 머리를 길게 길러 올려묶은 사람, 그리고 코가 긴 금발 머리의 아이. 블루노, 재브라, 카쿠였다. 셋은 훈련을 마치고 루치와 에르샤를 찾으러 왔으나 둘은 이미 둘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아주 좋아보였다.
“아 옆에 에르샤가 있어서 루치녀석을 확 깨울 수 없고 진짜.”
“그냥 두지 그래.”
잘 자고 있었는데 재브라의 기척에 잠이 깬 루치는 한쪽 눈을 뜨면서 말했다. 그 눈빛이 꽤 싸늘해서 아직 어린 카쿠는 블루노의 뒤에 가서 몸을 숨겼다. 루치는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재브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안 그래도 피곤해하는 애야. 그냥 자게 둬.”
“누군 깨우고 싶어서 온 건가.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서 부른 거다.”
재브라의 말에 루치는 한순간 눈을 찌푸리고는 에르샤의 볼을 살며시 톡톡 건들였다. 그에 에르샤는 살며시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세 사람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루치가 갑자기 나타난 재브라를 발견했을 때 그 표정이었다.
“아주 둘이 천생연분이야. 날 보자마자 짓는 표정도 똑같아 아주.”
“천생연분이라서 미안하네요.”
에르샤는 루치의 어깨에 기댄 상태에서 재브라를 올려보며 말했다.
“이래서 솔로는 괴롭다니까.”
재브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린 먼저 내려가볼테니까 알아서 와라.”
재브라는 손을 펄럭펄럭 흔들며 언덕을 내려왔고 블루노는 흐트러진 에르샤의 머리를 한 번 정리해준 다음 카쿠를 안아들고 내려갔다. 이 섬으로 온 지 얼마 안 된 카쿠는 에르샤와 루치의 기운이 싸늘해서 무서웠으나 에르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따스함에 계속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다 문득 에르샤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고 그는 환한 미소를 지어주며 손을 흔들어줬다.
‘넌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와 같은 느낌이었다.
셋이 내려가고 난 뒤에서야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디가 깔려있는 바닥이었지만 기본적으로 흙이 깔려져 있는 곳이기에 바지에 흙이 묻어있었고 에르샤는 자신은 물론 루치에 묻은것까지 전부 털어주었다.
“어깨 안 아파?”
“한 두번 있는 일인가.”
“하긴. 오늘도 결국 어깨를 빌려버렸네.”
“상관없어.”
에르샤는 자신을 향하는 그의 다정이 너무 좋았다. 그가 자신에게 잘해줄때마다 마음속으로 그 상냥함을 자신에게만 보여줬으면 하기도 했다. 이제 곧 사이퍼 폴 요원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도 이 모습을 보여야 할 날이 올 수도 있지만 에르샤는 괜히 욕심이 났다.
“루치는 다른 사람에게도 나한테 하듯이 그래?”
“그래보여?”
“아닌 거 같은데...”
“아니야.”
“진짜?”
“진짜다.”
루치는 에르샤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에르샤는 별로 안 아프지만 그래도 일부러 그에게 아픈 척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 짖궂은 장난이었다. 에르샤는 그의 팔을 떼어내며 토라진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아프다는거 안 믿냐...”
“넌 아마데우스잖아. 지금 그 상황에서 철괴쯤은 썼을 거 아니야.”
“아니거든? 나 아직 철괴 안 배웠거든?”
“약하군.”
후, 참자. 에르샤는 그 말이 장난이란 걸 알지만 뭔가 화가 살짝 치밀어 올랐지만 루치를 때렷다가는 갑작스러운 대련이 될 거 같아 그냥 자신이 참기로 했다. 만약에 둘이 다시 투닥거리게 될 때 에르샤는 자신의 힘을 조절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치랑 싸우면 내가 무조건 이기게 되니까 내가 참는다. 진짜.”
“얼씨구?”
“절씨구다.”
둘이 함께 서 있는 언덕에 황혼이 지면서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빛에 에르샤의 백금발 머리가 조금씩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묘한 색으로 변해가는 그 머리가 묘하다고 생각을 했다.
“엘. 너 머리가...”
“응? 머리가?”
루치는 순간적으로 팔을 뻗어 그 긴 머리칼을 매만졌다. 보드랗고 긴 곱슬머리가 손 끝에서 흘러내리며 그의 손을 간질였다. 그는 손을 뻗어 머리칼을 한손에 쥔 뒤 스르르 빠져나가게 했다.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잘라서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엘프들은 머리를 잘라서 자신의 활로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자신도 에르샤의 머리를 가지고서 팔찌나 목걸이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머리 자르게 된다면 나 줄 수 있어?”
“갑자기?”
“머리칼로 팔찌 정도 만들 생각이라.”
“그럼 나도 루치 머리 자르면 조금 줘라. 나도 만들래. 팔찌로.”
에르샤는 루치에게 투명한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도 그 미소는 잘 보였으나 이번에는 미소 뿐 아니라 그 자체가 투명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에르샤에게 팔을 뻗었다. 에르샤를 끌어안고 가두고 싶었는지, 아니면 노을빛에 그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라도 했는지, 그는 이 미묘한 감정을 알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기에 그는 기분이 나빴다. 그때,
“루치 기분 나빠?”
루치의 양 팔 사이에 들어와 그를 끌어안은 에르샤가 고개를 살짝 들어 눈을 맞춰왔다. 루치의 미묘한 감정을 느낀 그는 사람과 온기를 나누면 마음이 안정된다는 내용을 기억해낸 뒤 곧장 실행에 옮겼다. 과연 성공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아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흐음... 괜찮은건가.”
모르겠어... 루치는 이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숙여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보통의 사람의 온기보다 조금 서늘한 피부였지만 그래도 그가 서서히 안정되기에는 충분했다.
‘얘가 답지 않게 흥분했네. 괜찮은게 맞나.’
루치가 평소답지 않게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에르샤는 숨이 좀 막혔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가 어리광을 부리는 날이 거의 없기에 이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몇 번 토닥토닥 해주면 괜찮겠지. 괜찮을거야. 하지만 루치는 에르샤를 놓아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숨이 계속 막혀왔다. 아무리 튼튼한 몸을 가진 그라도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었다.
“루치. 나 숨 막혀.”
“가지 마.”
루치가 에르샤를 세게 끌어안고 목에 계속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며 말했다. 어딜 간다니. 안 갈 건데.
“루치. 나 어디 안 갈거야. 내가 널 두고 어딜 가겠어.”
“하지만 아까 너가 사라질 것 같이 흐릿해보였어.”
“흐릿해 보였다니, 눈이 이상해 진 거 아니야?”
에르샤는 루치의 품에서 벗어난 뒤 그의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눈빛은 여전했다. 무언가를 노리는 맹수같은... 그 무언가는 나겠지. 하지만 초점이 맞지 않는다거나 흐릿해보이지 않았다. 그냥 평소같았다. 평소의 그였다. 하지만 내가 왜 흐릿하게 보였다는 걸까. 에르샤는 알 턱이 없었다.
“눈은 멀쩡한데.”
“그렇겠지.”
“사람이 피곤하면 그렇게 보일 수 있대. 오늘은 좀 일찍 자는 게 어때?”
진짜 피곤해서 그렇게 보인 것일까. 루치는 아니라고 생각을 했다. 아닐 것이다. 그는 쉽게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고된 훈련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피로해보인다니. 절대 그럴 일 없다. 그럼 심리적 문제인가, 그건 그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헛것이었나보네.’
그는 흐트러진 제 머리를 만져주는 에르샤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제야 좀 모습이 선명해보였다.
‘나 어디 안 갈거야.’
그건 완전히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다. 그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전혀 증거가 없는, 그로서는 상상해 볼 수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난 괜찮아.”
“진짜 괜찮은거야?”
“괜찮다.”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에르샤는 그의 손을 잡으며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루치는 그 뒷모습을 계속 바라봤다. 이번에는 노을이 져도 백금발이 전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손이 계속 닿고 있기도 했으며 제 곁에 계속 있어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로브 루치가 처음 가져보는 믿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