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은 재생버튼을 눌러야 재생됩니다.
손가락 사이로 네 모습이 보였다. 쭉 펼친 손바닥으로도 채 전부 담지 못하고 흘러넘친 노을과 함께.
단델은 어쩔 수 없이 눈을 찌푸렸다. 해를 등지고 서 있는 상대를 좀 더 뚜렷하게 보고 싶어도 저절로 눈이 감겼다. 한 시라도,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싶은데. 단델은 힘겹게 눈을 떴다.
“지루하지 않았어?”
옆에서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 단델은 손을 내렸다. 어느새 제게 다가온 상대는 햇빛을 피해 살짝 비껴서있었다. 그제야 태양 빛을 받은 이목구비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동그란 눈매에 순한 인상.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를 따라 단델도 미소지었다.
“그럴 리가. 필요한 건 다 찾았어?”
“응, 오늘따라 활성화된 다이맥스 굴이 많아서. 이만하면 충분하겠어.”
수고했어, 버터플. 노엘은 제 눈높이께에서 날고 있던 버터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버터플은 기분 좋은지 피, 하고 가볍게 울곤 노엘과 단델 주변을 빙빙 날아다녔다.
“단델도 모처럼 휴일인데 나 따라다닌다고 고생했어.”
“아냐, 괜찮아. 레이드 배틀은 언제 해도 즐거우니까! 그리고 옛날 생각도 나서 좋았고.”
“밥 먹다가 다이맥스굴 활성화됐다고 뛰쳐나가던 일?”
“그런 일도 많았지.”
단델은 머쓱한듯 하하, 소리 내며 웃었다. 그땐 그랬다. 단델이 뛰쳐나가면 노엘도 덩달아 같이 뛰쳐나가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뒤에 차갑게 식은 카레를 먹었었다. 그게 뭐라고 마냥 좋았는지.
잠시 눈을 감고 옛날 생각을 떠올리던 단델은 “아, 그래.” 하고 가볍게 운을 뗐다.
“생각난 김에 잠깐 캠프 치고 있다가 갈까?”
“난 좋은데… 그래도 돼? 시간 괜찮아?”
“물론이지! 숙박은 무리지만 숨 돌릴 시간은 충분해.”
같이 있을 수 있다면야 뭐든 좋지만…. 괜히 바쁜 사람 붙잡고 있는 거 아닐까 주춤이던 노엘은 이내 활짝 웃었다.
“그럼 그럴까?”
“좋아, 내가 카레도 해줄게!”
“응? 단델, 요리도 할 줄 알아?”
그 성격 급한 단델이? 성격이 급해서 길조차 제대로 못 찾는 단델이? 예상치 못한 제안에 노엘은 눈을 크게 떴다. 체육관 챌린지 당시엔 두 사람 다 요리를 못했기 때문에 레토르트로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다 하게 되어도 요리는 노엘 담당이었고 단델에게는 방해하지 말고 침착히 앉아있으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었다.
“연습했어. 소니아한테 엄청 혼나가면서.”
단델은 씨익 미소지었다. 그에 반해 노엘은 다소 떨떠름하게 치켜 올라간 입꼬리가 슬슬 떨렸다. 소니아라면 믿을만하지만…. 확실히 소니아의 요리 솜씨는 훌륭한 데다가 남을 가르치는 능력도 뛰어났다. 단델도 포케몬 배틀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습득이 빠르고 능숙했고. 하지만 그와 별개로 요리처럼 인내와 차분함이 필요한 분야를 단델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약불로 오래 조리해야 하는 요리를 시간 절약한다고 강불로 지지지만 않아도 다행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캠프를 친 단델이 노엘의 어깨를 끌어와 의자에 앉혔다.
“자자, 푹 쉬고 있어! 조사 하느냐 힘들었잖아? 지금부터 챔피언 타임!”
“…챔피언이 나서야 하는 일이야?”
한 손을 높이 치켜세운 단델을 보며 노엘은 웃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단델은 “나만 믿어.” 제 가슴께를 통통 두드렸다.
“그럼 기대할게.”
염려와 달리 단델은 꽤 침착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서툰 칼질도 무리하게 속도를 높이지 않았고, 불도 적당한 화력을 유지했다. 후자는 리자몽의 도움이 컸지만. 요리가 막바지에 달아서야 노엘은 마음 놓고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댔다. 그제야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긴장했던 몸이 노곤히 풀렸다.
그러고 보니 그 성격 급한 단델도 저의 곁에선 다소 느긋이 행동했다. 물론 평소 대비라는 의미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여전히 빠릿빠릿했지만. 그 당시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행동이 느린 노엘을 배려한 행동이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눈으로 좇으며 옛 생각에 잠겨있던 노엘은 저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았다.
피- 피-.
이제 그만 일어나. 저를 깨우는 소리에 노엘은 눈을 떴다. 아, 나도 모르게 잠들었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버터플의 붉은 눈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제 몸 위에 올라타 있는 버터플을 쓰다듬으며 노엘이 입을 열었다.
“버터플, 나 얼마나 잤어? 아, 1시간? 너무 잤네.”
평소에 잠이 없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깜빡 졸다니, 꼭두새벽부터 와일드 에리어를 돌아다닌 영향이 꽤 컸나 보다. 눈을 비비며 살짝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단델이 옆에 앉아있었다. 그는 노엘이 깬 걸 알아차렸는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놨다.
“더 자도 되는데. 밥 먹을래?”
단델이 다정히 흐트러진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주자 노엘은 천천히 끄덕였다. 그 모습을 흐믓히 바라보던 단델이 몸을 일으켰다. 살짝 떨어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노엘이 퍼뜩 눈을 부릅떴다. 아니아니, 이렇게 보살핌받으면 안 되는데. 단델은 저를 단지 손이 많이 가는 친구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좀 더 자립적이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는데. …단델 옆에만 있으면 괜히 어리광부리게 된단 말이야. 노엘은 저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버터플을 외면했다.
단델이 만든 음식은 사과가 올라간 달달한 카레였다. 노엘은 그걸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다 팟 핸드폰을 들었다. “헤이 로토무!” 포켓몬들 사이를 노닐고 있던 로토무가 노엘의 부름을 듣자 핸드폰으로 쏙 들어왔다.
“로토무! 사진 찍어줘! 잔뜩!”
“식기 전에 먹어야 맛있어.”
“하지만 그 챔피언이 직접 만들어준 음식이잖아! 난 성덕이지, 성공한 덕후!”
노엘의 요란한 반응에도 단델은 익숙한듯 웃어넘겼다. 단델에 대한 흑심이 갈 곳을 잃다 결국 이런 방향으로 표출하게 된 사정은 모르지만. 그는 그냥 정말 챔피언으로서,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으레 하는 행동이라 여겼다.
찍은 사진을 한 번 쓱 훑어본 노엘은 만족했는지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단델 눈치를 슬쩍 본 노엘은 그의 시선을 피해 슬쩍 감자를 갈라봤다. 부스스 부서지는 속살이 다행히 잘 익은 모양이었다. 사실 안 익었어도 다 먹었을 요량이었지만. 왜냐하면 단델이 처음으로 만들어준 기념비적인 요리였기 때문이었다.
노엘은 문득 저에게 몰린 시선을 느끼고 한 바퀴 둘러봤다.
“응? 왜 다들 안 먹고 있어? 아, 나 먼저 먹으라고?”
포켓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해주는 걸까? 단델은 몰라도 단델의 포켓몬들은 노엘의 마음을 이미 진즉 알고 있었다. 노엘의 포켓몬들은 두말하면 입이 아팠고.
괜히 쑥스러워진 노엘은 조심스럽게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맛있어!”
“정말? 다행이다!”
노엘이 힘차게 고개를 흔들자 단델은 살짝 긴장했었는지 한숨을 슬쩍 흘렸다. 그 모습을 눈에 담던 노엘은 다시 한 숟갈을 펐다.
“단델도 먹어봐.”
“어?”
노엘은 옆에 앉아 있는 단델에게 카레가 가득 담긴 수저를 내밀었다. 샛노란 카레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단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단델? 노엘이 조심스레 부르자 그는 결심한 듯 눈을 꾹 감고 수저를 물었다. 오물오물 입안에 든 카레를 씹으면서 단델은 슬쩍 노엘의 시선을 피했다.
“마, 맛있네.”
“그치?”
시선을 요리조리 움직이다 노엘과 맞닿은 단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푹 숙였다. 쟤 왜 저래? 노엘은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기울였다.
“단델, 혹시 뜨거워? 뜨거워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단델은 급히 제 수저로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기계적으로 카레를 입에 집어넣는 그의 행동이 여전히 어색했지만 노엘은 그냥 제 수저와 접시로 시선을 옮겼다. 바쁜 일이 생각났나? 그런 사정으로 대충 납득한 노엘이 수저를 움직이려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직접 먹여주는 건 좀 아니었나?’
그런 건 보통 부모 자식간이나 연인끼리 하는 행동이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노엘은 헉, 숨을 들이켰다. 아니아니, 단델은 태어났을 때부터 쭉 같이 지냈으니까, 그래, 연인보단 가족에 가깝겠지. 단델도 애취급 당해서 당황스러웠나? 하긴, 보통 단델은 챙겨주는 쪽이었지 받는 쪽은 아니었으니까…. 노엘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앞으론 단델 좀 챙겨줘야겠다. 이런 일로 저렇게 쑥스러워하니, 원.’
노엘은 단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보라색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비치는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초가을 바람이 선선히 불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