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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시아 로엔그린은 봄의 색을 닮은 이였다. 머리카락이나 눈의 색만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 역시 그랬고 조슈아는 그런 루시아가 좋았다. 자신의 세계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신기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자신은 무엇을 감히 탐한다거나 할 상황도 아니었고 제국에 대한 충성을 제외한 다른 감정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이렇게 봄이 찾아오다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루시아의 말에 조슈아는 가만히 시선을 맞추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예뻐서. 조금은 낯간지러운 말에 루시아는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금 조슈아의 옆에 누웠다. 막 올라오기 시작한 풀 내음과 함께 흐드러지게 핀 등나무꽃의 향이 은은하게 나는 것이 좋아 루시아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이러다가 풀물로 옷이 얼룩질지도 몰라, 조슈아. 우리 둘 다 흰 옷이라서 보기 흉할걸. 장난 섞인 루시아의 말에 조슈아는 가만히 보다가 루시아에게 제 팔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조금은 나른함이 담긴 목소리였으나 루시아를 보는 시선은 애정이 가득해 그는 가만히 조슈아의 팔을 베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 분명 조슈아보다 더 오랜 기간 아발론에 있었음에도 조슈아에게 이끌려 오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분했다.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어주던 조슈아는 가만히 이마를 맞대고 살짝 부빗거리더니 웃었다.

너하고 오고 싶어서 찾아낸 거야. 네 색을 잔뜩 머금은 곳이니까. 사실이었다. 루시아의 색이 가득한 이곳에 함께 오고 싶어서 일부러 더 일을 빨리 끝내고 이렇게 온 것이었다. 루시아가, 그가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좋았고 두근거려서 조슈아는 정말 단단히 빠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보랏빛의 세계에서 웃는 루시아의 모습은 자신의 상상보다 더 아름다웠고 눈이 부셨으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미약한 소유욕마저 들게 했다. 이런 감정을 루시아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꾹 눌러 참으며 조슈아는 따라 웃었다.

 

“조금 더 지난 후에는 장미가 아름다운 곳으로 가자. 내가 잘 아는 곳이 있어.”

 

“플로렌스 이야기하는 거야? 행정실에도 푸른 장미가 있긴 하지.”

 

“…뭐, 맞긴 맞지만, 그 사람 이야기가 아니야. 옛 로엔그린 가문의 영지에서 절경인 곳이 있거든.”

 

옛 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는 모습에 조슈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맞는 단어이기는 하나 루시아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말이기도 했다. 조슈아는 제 표정을 보는 루시아의 시선에 모르는 척하며 그를 품에 더 끌어안았다.

나는 정말 괜찮아, 조슈아. 마주 안아오는 그 팔을 익숙하게 조슈아의 등을 토닥였다. 물론 루시아는 괜찮을 것이다.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하는 이이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가문이 몰락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고 하는 이도 아니었다.

그래도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건 싫어. 조슈아가 낮은 목소리로 루시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슈아는 루시아가 아직도 명망 있는 가문의 이이건, 몰락한 귀족이건 상관은 없었다. 다만 그가 자신의 옛 영지를 떠올리면서 가문이 몰락하게 된 일까지 생각하는 것이 싫은 것뿐이었다.

루시아는 그런 조슈아의 생각을 알았기에 가볍게 등만 토닥이며 눈을 감았다. 조슈아 레비턴스는 간혹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처음 만났을 적에는 어떠한 것에도 욕심내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던 사람이었고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너의 상냥함에 나는 기대기만 하는구나. 루시아는 차마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입술만 살짝 짓씹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애가 타고 소유욕을 느끼는 그가 좋다는 그런 말을 어찌 할 수 있을까. 자신 역시 그를 욕심 내고 자신에게만 이러기를 바란다는 추저분한 감정을 내비치기 싫었다.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 아래에서 본 너는 누구라도 탐을 낼 것 같아서 두려웠다. 나의 사랑스러운 바다. 나는……. 루시아는 조금 더 조슈아의 품에 파고들며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작게 웅얼거렸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는 이렇게 봄이 어울리는 이가 아니야.”

 

그 말에 조슈아의 시선이 제 품에 파고든 루시아에게로 향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멋대로 떼어냈다가는 루시아가 곤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품 안에 루시아를 숨기듯이 조금 더 꼭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 말 말아, 루시아. 너는 내게 늘 봄이야. 네가 어떻게 생각하건 나에게는 네가 구원이었고 인생의 봄이었어. 앞으로도 그렇고. 조슈아는 자신의 말주변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연인에게 달콤한 위로를 건네기에는 서툴고 어리기만 했지만 그래도 진심이 닿기를 바라며 조슈아는 눈을 감았다.

미약하게 떨려오는 루시아의 몸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조슈아는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루시아와 연정을 속삭이고 맞이한 첫봄이었다. 조슈아는 앞으로도 루시아와 맞이할 봄을 상상하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읊조렸다.

 

“언제나 사랑하고 있어, 나의 따스한 구원.”

 

그 말에 루시아가 언뜻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던 것 같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 말로도 자신과 루시아는 괜찮으리라 생각하며 조슈아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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