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 오면 히라리는 다른 향수를 꺼내 화장대 위에 진열해둔다. 상표가 뜯겨 있는 향수에는 오직 ‘플라워, 오드 퍼퓸’이라는 흐릿한 글씨만이 남아있었다. 손을 탈수록 흐릿하게 지워지는 글씨들에게 연연하지 않는 마음으로 아무 곳에나 지문을 묻혔다. 플라워 오드 퍼퓸은 샤넬, 디올, 아베다같이 이름이 근사하다는 이유로 명품이란 칭호를 부여받은 여타 향수들보다 차분하고 몽롱한 향내가 난다. 아침에 일어나 몸을 씻자마자 손목에 향수를 뿌리고 목덜미에 톡톡 두드리면 아침에 문을 나설 때까지 방 안에서도 은은한 향수의 향을 느낄 수 있었다. 겉치장이 끝나고 나면 그 이후에서야 빈속을 채울 생각이 든다. 느릿느릿 주방으로 걸어 나와 교복 치마의 주름을 정리했다. 아침부터 속상할 정도로 공허하다. 넓은 집에서 텅 비어있는 냉장고를 뒤지는 자신만이 이 집에 유일한 구성원이라니! 누렇게 반짝거리는 냉장고 불이 꺼질 때까지 이빨 빠진 노인네처럼 듬성듬성 꽂혀있는 소스 통이 전부인 냉장고를 바라보면서 히라리는 잠시 눈을 감는다. 아, 목숨이 꺼져가는 가엾은 냉장고를 위해 기도를. 텅 빈 집이나 냉장고는 무덤가같이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거기선 죽어가는 (어디에 뿌려 먹어야 적당한지 알 수 없다.)소스들, 숨이 죽은 (어디에 곁들여야 괜찮은지 모호하다.)야채들. 그리고 그런 집에서 시든 (어디에 사용해 먹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재능을 가졌다.)인간이 공존하고 있다. 히라리는 유통기한이 사흘 정도 남은 요거트를 꺼내 포장지를 주욱 뜯었다. 아침은 언제나 심플한 쪽이 좋다. 요거트 통을 다 비워갈 때쯤 카오루가 문을 두드리겠지. 똑똑. ……정답이다.
“좋은 아침.”
카오루는 생긴 것과 다르게 잠에서 깨어나는 걸 어려워했다. 깨우면 한참 후에야 일어나서 비적비적 칫솔을 입에 무는 주제에 겉치장은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다. 또 그러면서도 느긋하게 구는 재능은 천부적이어서, 마지막 요거트을 떠먹은 스푼을 입에 물고 문을 열면 ‘이런이런, 아기고양이는 이제야 아침 식사니?’ 하고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가방을 챙겨 들고 신발을 신자마자 카오루가 히라리의 손목을 잡아 올린다. 무슨 왕자가 공주의 손에 손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좋은 향기가 나는구나, 향수를 바꾼 거니?”
“네.”
익숙한 수작질에 놀라는 건 관둔 지 오래였다. 왕자가 예를 차리듯 고개를 숙인 카오루 주변에 장미꽃이 어른거리는 환상이 보이는 거 같기도 하다. 히라리가 냉큼 카오루의 목을 끌어당겨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익숙한 카오루의 향수 냄새가 확 풍겼다.
“세타 선배는 향수를 안 바꿨고요.”
“……아아, 그래, 그렇지.”
카오루가 냉큼 히라리의 어깨를 잡아채 거리를 멀리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얼굴이 새빨갛다. 늦었구나. 서둘러야겠어……. 뭔가 고장 난 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새 학기를 맞아 등교 시간만 되면 동아리 홍보 부스로 교문 근처가 요란스러웠다. 그리고 연극부도 그 홍보 행위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연극부도 매일 부원 두 명이 평소보다 일찍 등교하여 홍보 부스를 지키기로 했었다. 월요일은 세타 선배와 카나, 화요일은 야마토 선배랑 사에, 수요일은 다시 세타 선배와 아즈하, 목요일은……, 그리고 금요일은 세타 선배와 히라리. 잠깐, 이틀 간격으로 세타 선배가 있는 거 같은데요? 하고 물으니 ‘아무래도 카오루 님이 이 동아리의 간판이잖아?’라는 답이 돌아온다. 맙소사……. 전혀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네오카 여 학원 연극부의 간판 세타 카오루! 카오루가 홍보부스에 앉아 ‘기다릴게, 공주님.’만 해줘도 그 자리에서 실신할 여학생들이 하나, 둘……. 생각해보니 기절한 학생을 눕힐 돗자리를 챙기는 것을 깜박했다. 오늘은 접은 박스를 겹친 엉성한 임시 휴식처에 누워있게 될 가녀린 세타 카오루의 포로들을 위해 기도를.
“안녕, 아기고양이들아. 좋은 아침이구나.”
동아리 홍보 부스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슬아슬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세타 카오루의 허스키하고 매력적인 보이스는 신입생들의 마음에 백발백중으로 꽂힌다. 연극부의 취지와 무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카오루의 얼굴만 대문짝만하게 인쇄된 홍보물을 받아 가면서 떨리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저 여학생……! 분명 어제도 홍보 부스 근처를 서성거렸다. 교실로 들어가는 것처럼 굴다가 이내 고장 난 로봇처럼 한 바퀴 턴하더니, 연극부 부스 쪽으로 다가온다. 카오루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을 굳이 숨길 필요가 있나. 세타 카오루는 누구보다 관심받는 걸 즐기는 사람이니까 걱정 말고 다가와도 좋을 것을. 점차 가녀린 아기고양이가 된 그녀는 용기가 나는지 성큼성큼 부스 쪽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어째서 오는 방향이 카오루가 아니라 히라리 쪽이었다. 뭐, 뭐야? 자동 경계 모드로 전환된 히라리가 몸을 뒤로 무른다.
“선배님!”
무슨 선전 포고라도 하는 것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그 여학생의 목소리. 당황스러워 겨우 ‘네?’하고 되묻는 것에도 한참이 걸렸다. 그녀는 부스에 놓인 탁자에 손을 쾅, 내리치고는 뱉는 말이 그야말로 선전포고다.
“저 카오루 님을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곧 사귈 겁니다! 긴장하세요!”
그대로 미끌, 해서 자빠질 소리였다. 황당함에 옆으로 풀썩 쓰러질 뻔한 몸을 탁자에 기대 고쳐잡았다. 지, 지금 그런 취급을 당한 건가? 사랑의 라이벌? 히라리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주워 담고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기요. 난 세타 선배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아뇨! 제가 보기에는 무조건 좋아하는 눈이었어요!”
“눈이요?”
눈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던데 히라리의 그릇은 어디가 깨진 건지 공허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눈? 그런 눈은 들은 적도 없거니와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는 자신이 그런 눈을 하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히라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형식적으로 홍보 책자를 내밀었다.
“하네오카 연극부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 말은 모두에게 해주는 형식적인 멘트지만…… 그 여학생한테는 도전 수락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의욕으로 가득 찬 눈동자를 하고는 홍보 책자를 받아 채서 성큼성큼 교실로 향한다. 괴로운 봄…… 괴로운 춘삼월……. 히라리가 머리를 싸매고 짜증을 내다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선 가득 들어오는 지독하게 예쁜 얼굴…… 세타 카오루.
“으, 놀랐잖아요.”
“……나의 아름다움이 폐를 끼쳤군. 너무 아름다워 미안하다…….”
알면 잘해라. 이런 말이 목구멍을 빠져나오려고 따끔거린다. 입꼬리가 당장이라도 올라갈 것처럼 간질간질해 보이는 게 아까 대화를 엿듣고 있었나 보다. 히라리가 깊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해할까 말하는데 저는 선배를 두고 누가 가지느니 마느니 이상한 결투 같은 거 할 생각도 없고요, 애초에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고요, 내가 선배를 좋아하긴 하지만! 지금처럼 아무 관계도 아닌 게 좋은 거라고요. 와다다 쏘아붙이고는 흩어져 있는 홍보물들을 바르게 정리했다.
“가끔 나를 너무 사랑하는 아기고양이들이 비극을 저지르곤 하지. 하지만 우상은 멀리 있어서 아름다운 거란 걸 알게 될 거란다.”
“네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해준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 말 때문에 더 신경이 쓰인다. 카오루는 어떤 관계든 약간의 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네오카에서 카오루와 항상 같이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매번 우연히 만나는 사람과 점심을 먹었고, 카오루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아도 보통은 사람들이 곁에 모였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밴드 멤버들과는 친해 보였지만…… 그건 방과 후에 일이었고 학교 내에서 카오루는 ‘누군가의 세타 카오루’라기보단 ‘모두의 세타 카오루’에 가까웠다. 그렇게 선이 있는 사람이…… 이노우에 히라리에게는 선을 지워줬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카오루의 가장 깊은 곳,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은 노크조차 해본 적이 없었지만 히라리는 카오루와 꽤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카오루는 누구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걸까? 그리고 카오루도 언젠가 히라리가 ‘우상은 멀리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란 사실을 알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설명하기 어려운 텁텁한 생각이 들면 여름날 눅진하게 풀어지는 몸처럼 기분이 찝찝해진다.
“선배는 이상형 없어요?”
“모든 아기고양이들이 나의 덧없는 이상형…….”
괜히 물어봤다. 그다음 대사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니 그만두라고 입을 꾹 꼬집었다. 세타 카오루의 근처에는 유독 벚꽃이 화려하게 흩날렸고 향수를 바꾸지 않아도 매번 다른 향기가 나는, 아무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여자였다. 그에 반해 이노우에 히라리는 외로움에 찌든 냄새가 났으며, 소통의 부재로 내뱉어지지 못한 말들이 거미줄처럼 몸에 진득진득하게 붙어있는 텅 빈 그릇이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이미 혼자 남았다는 감정을 싱겁게 받아들이는 것도 익숙했다.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심으로 자신의 울타리를 열어준 것이라면 절대 사절이었으나……. 카오루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마저 없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구태여 묻지 않는다.
“세타 선배를 좋아하게 된 계절이 봄이었는데…….”
“대부분 아기고양이들은 나를 봄에 좋아하게 되지.”
……그렇지. 설레는 마음으로 새 학기 등교를 할 때 화려한 백마를 끌고 오는 장신의 여자를 보는 순간 ‘아, 저 사람이 내가 찾던 왕자님!’이란 비명을 외치며 사랑에 빠지게 될 테니까 말이다. 카오루에게 히라리는 좋아하는 계절조차도 특별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을 상기하는 것은 언제나 환상적이고, 동적이고, 애틋하다.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울고 있었잖아요. 그때 선배가 우연히 만났다며 내 어깨를 두드려 놓곤…….”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꼭 방금 뛰어온 사람처럼. 히라리가 작게 웃었다. 카오루가 기억이 안 난다며 어깨를 으쓱한다.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은 전부 지워버리는 사람이었다.
“이번 일 년도 잘 부탁해요. 선배와 함께하는 마지막 일 년이잖아요.”
“내가 졸업하면 연극부는 그만둘 거니?”
“아뇨, 선배가 제 무대를 볼 수 있는 순간은 내년이 유일할 테니까…….”
히라리가 자세를 고쳤다. 작년 이맘때쯤 이노우에 히라리란 여자는 얼마나 납작했는가. 이렇게 벚꽃이 화사한 빛깔을 낼 수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연극부에서 처음 받은 대본이 셰익스피어의 햄릿이었던 그 이상한 순간들. 고막을 파고들어 오는 물소리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붙잡곤 카오루와 손을 잡고 커튼콜을 이어갔을 때의 격정. 영원할 줄 알았는데 회상하려니 아득하다. 안 좋았던 기억들도 헝겊은 덧댄 천처럼 엉성하게 잘 가려져 그럴싸한 기억이 되어있었다.
“그래. 올해는 세타 카오루를 둘러싼 아름다운 두 여성의 왕자 쟁탈기를 지켜보는 거로 할까…….”
“짜증 나네…….”
그 이야기는 아까 끝난 거로 생각했는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홍보 책자를 뭉텅이로 카오루의 품에 안겨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쟁탈……. 진지하게 임할 테니까 키스해줘요, 그럼. 후배한테 선빵 날리고 시작할게요.”
“흐음…….”
카오루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아서 더 놀리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하굣길에 잔뜩 입 맞춰줄 테니까. 잘못이 있다면 쓰잘데 없이 귀여운 죄. 한참 시선을 피하던 카오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그대가 봄에 쓰는 향수가 좋아.”
시든 겨울날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던 오래된 겨울 향수는 중학교 시절부터 히라리의 정체성과 가까운 향을 냈다. 차갑게 식어 죽음을 연상시키는 냉혹한 향은 온기가 돌지 않는 책상 서랍 안에서 뒹굴고 있었다. 매번 다른 향기를 내는 카오루(가까이 다가가면 같은 향수였다.)는 ‘어떠한 나도 나’라는 문장으로 자신을 변화시켜가고 있었지만 히라리는 향수 통이 동날 때까지 새로운 향은 가져오지 않았다. 다른 모습은 그저 사은품으로 주는 향수 샘플처럼 한두 번 사용하면 향이 변했다. 결국 카오루처럼 완전한 변화를 이룰 수 없어. 그래서 히라리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로 다짐한다.
“저는 선배가 좋아요.”
말 한마디가 내뱉어질 때마다 감성 가득 꽃잎이 흩날리는 서비스가 무료 제공된다. 어색할 정도로 봄이다. 그리고 비어있어도 작동되는 집 냉장고처럼 단순하고도 무결한 사실. 우리 둘은 서로를 다른 방법으로 아껴주고 있었다. 돌아오는 겨울에는 카오루가 없을 것이었다. 서로의 부재에도 단단해질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해. 그러기 위해선 이 봄을 날 추억이 필요한 법이다.
“부원이 모이면 작게 연극을 해요. 준비할 시간이 없으니까 대부분 즉흥극으로.”
“…….”
“뭐야, 그 감동이라는 얼굴은…….”
카오루가 히라리의 손을 냉큼 잡는다. 그리고 평소처럼 자신이 얼마나……! 감격했는지에 대해 한참을 설명한다. 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소리를 내어 구태여 공허한 침묵에 소리를 보태는 것은 카오루를 만나고 생긴 습관이었다. 꽃이 하롱거리고, 햇빛이 반짝거리고, 바람이 선선하고, 네가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